116화. 회복
어느새 2세트 중반으로 접어든 경기.
지혁은 그랜드슬램 우승자의 실력이 얼마나 격이 다른지 스스로 증명했다.
관중들은 올해 개최되었던 여러 메이저 대회들을 통해 지혁의 전력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 지경까지 흘러가자 그 생각이 완전히 오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눈앞에서 경험하고 나니 영상으로 보던 것과 느껴지는 바가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괜히 해외 팬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연고도 없는 아시아인에게 골든 보이라는 최고의 별명을 지어준 게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의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쾅!!
코트 위에서 들리는 커다란 굉음에 깜짝 놀란 건지 몸을 움찔거리는 관중들.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바닥으로 내려 꽂힌 플랫 서브는 리턴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상식적으로 220km를 훌쩍 넘어가는 타구를 받아내는 것이 쉬울 리 있겠는가.
프로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반사 신경을 타고나지 않는 이상 짧은 시간 내에 적응하는 건 무리였다.
랭킹 100위 안쪽에 들어가는 탑랭커들도 지혁의 고속 서브에 속수무책으로 에이스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말이다.
“와! 피지컬이 좋아서 그런지 힘이 엄청나구나. 아시아에서 저런 서브가 칠 수 있는 선수가 골든보이를 제외하면 있기나 할까?”
“저 속도와 정확도를 모두 가지고 있는 선수는 한 명도 없겠지. 만약 존재했다면 ATP랭킹 50위 안에 아시아인의 이름이 한 명 더 있었을 테니까.”
“플레이 스타일이 올라운더 겸 빅 서버라고 하더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네. 그나저나 내 눈이 잘못된 건가 갑자기 케이가 작아진 것 같아.”
“······너도 그렇게 보여?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ATP에 등록되어 있는 프로필을 기준으로 따졌을 때 두 선수의 신장 차이는 10cm 정도였다.
하지만 신체 능력이 확연하게 비교되다 보니 그 격차가 더 크게 부각되었다.
분명 우세할 때만 하더라도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는데 지혁이 힘으로 찍어 누르는 모습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페더러, 나달과 같은 선상에서 언급되는 골든 보이의 진짜 실력인가······. 아직은 케이가 빅3급 선수를 따라잡는 건 무리였나 봐. 랭킹을 최소 15위 정도는 더 높여야 승산이 있겠어.”
“최악의 경우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밀리는 모습이라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단순히 시간이 조금 더 지난다고 여기서 상황이 달라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재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어서 장담하는 건 힘들지. 그래도 나이가 어린 만큼 조만간 유망주들이 한 번씩 거쳐가는 슬럼프를 맞게 될 거야.”
“그래? 델 포트로처럼 확실하게 주저앉았으면 좋겠네. 케이가 비슷한 랭킹까지 쫓아갈 때까지 말이야.”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관중석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물론 그럼에도 경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되었다.
***
[게임 세트. 4-6, 7-5, 6-2.]
백핸드 위너로 손목 부상이 완벽하게 회복했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증명하며 경기를 마무리하는 지혁.
니시코리의 팬들은 마지막 매치 포인트가 들어가는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역전은 결과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두 선수 사이에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짝짝짝짝짝.
자선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네트 앞에서 서로의 등을 두들겨주는 모습을 보이자 관중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그렇게 뜨거운 반응이 아닌 것으로 보아 자국 선수가 패배한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마 승자가 뒤바뀌었다면 지금과 차원이 다른 반응이 나왔겠지.
일본 시청자들이 잔뜩 가라앉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같은 시각 한국의 커뮤니티는 축제 분위기나 다름없었다.
비록 공식적인 대회가 아니었지만 한일전에서 니시코리를 압살해버린 게 그들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ㅡ 완전 나라 잃은 표정이네 ㅋㅋㅋㅋ 예전부터 우리 지혁이랑 은근슬쩍 맞먹으려고 하던데 이제 수준 차이 알았으니까 그만 깝치라고 ㅋㅋㅋ
ㅡ 그런데 니시코리 만으로 20살 아닌가. 일본 최고의 천재라고 불릴 만큼 잘하긴 하네. 물론 진짜 괴물이랑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ㅋㅋ 쟤는 딱 아시아용임.
ㅡ 이제 서열정리 제대로 했으니까 어쭙잖게 깝죽거리는 일본 얘들도 없겠네. 한동안 쪽팔려서 여기 오지도 않겠는데?
ㅡ ㄴㄴ 공식 경기 아니라고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는 놈 있을 수도 있음. 통산 전적에도 빼버릴 게 뻔하다.
ㅡ ??? 누가 봐도 전력을 다 쏟아부었는데 설마 그딴 설득력 없는 말을 한다고? 능지가 딸리는 것도 아니고 자기최면을 하지 않는 이상 부끄러워서 못할 텐데···.
ㅡ 애초에 이지혁하고 니시코리 랭킹 생각하면 여태까지 라이벌이라고 묶는 것 자체가 양심 없는 짓거리였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지.
ㅡ 그냥 나둬 ㅋㅋㅋ 어차피 조만간 아시안 게임 단식에서 만날 거라서 그때 가서 놀리면 더 재밌을 듯.
ㅡ 아, 11월에 아시안 게임 있었지 오늘 경기 보니까 거기서도 무난하게 우승하겠네. 솔직히 군대 문제로 엄청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생각이었음.
ㅡ 일단 출전만 하면 무조건 금메달이니까 무조건 본방 사수해야겠는데? 퓨처스나 챌린저급 대회에 참가하는 듣보잡 선수들이랑 그랜드슬램 우승자가 붙으면 어떤 그림이 연출될지 너무 궁금하다 ㅋㅋㅋ 일단 2-0 베이글은 당연한 거고 몇 분 만에 끝날까?
ㅡ 아무리 길어봤자 1경기 당 3~40분이겠지 다른 스포츠에서 아마추어랑 프로랑 붙는 것보다 훨씬 일방적으로 흘러갈 걸. 개인 종목 특성상 양학이 나올 수밖에 없잖아.
ㅡ ㅇㅇ 아시아권 대회에 이지혁이 나온다? 격투기에 총 들고 나온 거랑 비슷한 승률 나올 듯 ㅋㅋㅋㅋ
***
니시코리는 경기가 끝나고 크게 상심한 얼굴을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멘탈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듯했다.
아무래도 베이글을 무사히 막아낸 성과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도와주는 심리적 저지선이 되어준 모양이다.
비록 6-2이라는 처참한 스코어로 3세트를 내주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0은 아니었으니 실낱같은 희망을 본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실패했네. 나는 내 실력이 이전에 비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오늘 결과를 보면 전부 착각이거나 자만심이었던 것 같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마이애미 당시보다 발전한 건 분명해요. 그저 니시코리가 성장한 만큼 저도 같이 실력이 상승한 것뿐이에요. 저도 그동안 가만히 정체하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역시 그랬던 건가. 그나마 다행이네. 아니······너를 이겨야 하는 입장에서 안 좋은 소식일지도 모르겠어. 네가 한 말은 나보다 성장 속도가 더 빠르다는 뜻이니까.”
커다란 재능 차이를 느끼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니시코리.
그는 전 세계를 통틀어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망주로 평가받고 있는 만큼 프로 생활을 하면서 타고난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터놓고 말하자면 항상 반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격려해주는 게 전부였다.
대부분의 유년기 시절을 보낸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조차 자신에게 견줄만한 또래의 선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세계 무대로 나와서도 거의 비슷했다.
1년 전에 하늘에서 뚝 떨어져 그랜드슬램 최연소 우승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세운 불세출의 천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지혁은 뭐라 위로를 하지 못하고 묵묵히 옆에 서 있었다.
괜히 쓸데없이 빈 말을 하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는 게 낫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다.
과거 똑같은 좌절을 수도 없이 겪어봤기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인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걸 보면 당시 받았던 스트레스가 엄청나긴 했나 보구나. 하긴 니시코리는 최종적으로 세계 랭킹 4위까지 올라가지만 나는 전성기가 끝날 무렵인 20대 중후반에도 고작 50위 대에 머물렀으니 솔직히 더 심각했지.’
단순히 산술적으로 따져봐도 니시코리가 벽을 느낄 만한 선수의 숫자는 3~5명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지혁은 최소 40명 이상이었으니 10배는 더 쓴 맛을 보는 일이 많았다.
어떤 노력을 해도 더 이상 실력이 성장하지 않고 절정에서 천천히 하락하는 경험은 정말 겪어본 사람만 알 것이다.
“코트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한데 왜 저러지? 그 사이에 관계가 나빠질 일이 있었나. 경기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제법 화기애애했잖아.”
“8연속으로 게임을 가져가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니시코리를 완벽하게 짓밟아놨는데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지. 그 정도면 하하호호하며 웃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결과가 좋지 않아도 단순히 이벤트에 불과하잖아. 그랜드슬램 상위 라운드에서 아슬아슬하게 미끄러진 것도 아닌데 너무 과몰입하는 거 아니야?”
“경기를 봤으면 너도 알겠지만 분위기가 엄청 살벌했잖아. 나는 방금 전 경기가 연습처럼 설렁설렁한 거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아.”
대화를 나누던 관중들은 니시코리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전부 동의했다.
제대로 눈이 달려 있다면 방금 전 모습이 여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만큼 기량이 출중한 선수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테니스계에서 가장 유명한 별명은 빅3가 아니고 빅4로 바뀌는 게 이치에 맞았다.
“전력을 다하고도 변명하기 힘들 정도로 완패해서 충격이 상당할 거야. 게다가 골든 보이는 케이보다 나이가 무려 4살이나 어리잖아.”
“부디 잘 극복했으면 좋겠네······. 괜히 멘탈이 깨져서 다른 곳으로 방황하는 대참사가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글쎄. 그건 지켜봐야 알겠지.”
걱정이 잔뜩 담긴 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니시코리.
그런 배려에 힘을 받은 걸일까.
그는 고개를 좌우로 강하게 몇 번 젓더니 어두웠던 표정을 전부 날려버렸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역시 정신력이 강한 녀석이란 말이야.’
과연 원래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아시아 역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선수다웠다.
‘이 정도로 단단한 정신력이 뒷받침되었기에 다른 탑랭커에 비해 빈약한 피지컬을 가지고도 랭킹 4위를 달성한 거겠지.’
그렇게 날카롭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리자 코트 주변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이크를 들고 있는 걸 보면 인터뷰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사람 같았다.
일본이란 나라가 가진 특성 탓인지 기자나 아나운서 대신 아이돌로 보이는 여성 두어 명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모양이다.
적응이 되지 않는 광경이지만 니시코리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능숙하게 이런 상황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