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광저우 아시안 게임.
적막한 침묵이 실내 코트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
고영민 감독은 얼떨떨한 표정을 풀고 옆에 있던 코치에게 다급한 어조로 서브 속도를 물었다.
평소 냉정한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만큼 지혁이 상상을 뛰어넘는 실력을 보여줬다는 뜻이겠지만 말이다.
“2···234km입니다. 감독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스피드건에 찍힌 숫자를 말해주는 코치.
선수들은 두 사람의 대화에 은근히 집중하고 있었기에 코치의 말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미쳤구만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하잖아.”
고영민 감독이 간신히 입을 떼자마자 코트 주변에서 ’후우‘하고 들리는 한숨 소리.
실제 경기에서 극히 보기 힘든 고속 서브에 선수단은 크게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비록 그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프로들이긴 했지만 고작 챌린저 대회에 참가하는 수준이라 이 정도 속도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의 수석 장학생, 데이비드가 한국의 국가 대표들보다 ATP랭킹이 훨씬 높은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게 명성이 자자한 이지혁의 실력인가? 역시 그랜드슬램 우승자는 수준이 다르긴 하구나. 우리 같은 실업팀 선수들과 비교가 안 돼.”
“세계 무대에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녀석인데 당연하지. 애초에 우리랑 노는 물이 틀리잖아.”
“그런데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저 무지막지한 서브도 그렇고 진짜 놀라운 재능이네.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실력이야. 나는 저 나이에 주니어 대회를 전전하면서 프로에 데뷔조차 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도중에 은퇴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최소 10년은 이지혁이 테니스계를 지배하겠어. 부디 국내에 눈길을 돌리지 않길 바래야지. 저런 괴물을 우리가 상대하는 게 가능할 리 없으니까.”
“어차피 그런 최악의 상황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세계 랭킹 6위가 뭐가 아쉽다고 상금이 천만 원도 되지 않는 자잘한 대회에 나오겠어. 롤랑 가로스의 상금만 하더라도 16억인데.”
보통 테니스 선수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시기가 20대 중반인 터라 대표팀의 나이대는 대부분 지혁보다 8상 이상 많았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지혁의 압도적인 기량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은지 아무런 편견 없이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솔직히 이 정도 실력을 직접 경험했는데 어떻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테니스에 인생의 모든 것이 맞춰져 있는 그들에게 지혁은 숭배의 대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코트 주변에서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마침 지혁도 선수들을 한 명씩 살펴보고 있었다.
‘아는 얼굴들이 제법 많구나. 실업팀의 터줏대감들이 전부 모였어.’
과거 프로 선수로 데뷔했을 당시 저들과 국내에서 얼마나 많이 부딪쳤던가.
비록 지금은 전부 사라진 과거였지만 워낙 인상적인 경험이라 아직도 그 당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선수들의 숫자는 지혁을 포함해 총 12명.
단식, 복식, 혼합 복식으로 남녀 각각 6명이라 제법 대인원이었다.
‘S증권의 이대희 선수도 결국 발탁됐네. 하긴 랭킹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지.’
얼마 전에 스치듯이 확인하기로 이대희의 ATP랭킹은 304위, 국내 랭킹은 3위였다.
그러니 아시안 게임처럼 중요한 대회에서 불참할 리 없었다.
5~6년 후라면 한국 테니스의 부흥기를 이끌 5대 유망주가 혜성처럼 등장하며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마땅한 대체 자원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럼 권동현 선수까지 합치면 S증권 실업팀에서만 총 2명이 뽑힌 건가? 군면제가 걸려있어서 다른 선수들도 필사적이었을 텐데 불리한 조건을 전부 극복하고 뽑히다니 이건 꽤 의외인데.’
앞선 대희의 경우와 다르게 동현은 지혁을 제외하면 선수단에서 가장 어린 21살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대표팀에 포함된 걸 보면 그 사이 랭킹이 엄청나게 상승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분명 경쟁률이 높은 저 자리를 지금처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쿵!!
“음······. 이만하면 되겠지. 지혁아, 이제 잠깐 쉬었다가 대표팀 훈련에 합류하면 돼. 코치들이 시간이 되면 알려줄 거다.”
“네. 알겠습니다.”
고영민 감독에게 임시로 기량을 점검받는 상황이 끝나자 마침내 주어진 자유 시간.
지혁은 대략 20분간 격렬하게 움직였음에도 아직 체력이 한참 남아돌았기에 앉아서 휴식을 하기보다 앞으로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될 대표팀 선수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단식 출전이라 이들과 사이가 틀어져도 본 경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냉담하게 행동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국가 대항전에서 계속 얼굴을 볼 텐데 계속 어색하게 지낼 수도 없었다.
‘먼저 익숙한 두 사람부터 인사하면 되겠지. 원래 여기 있는 11명의 선수들과 대부분 아는 사이였는데 다시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니······. 조금 허무하긴 하네.’
지혁은 초기화된 관계에 머리가 아픈 듯 속으로 한숨을 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이대희 선수, 권동현 선수 저번에 말했던 대로 정말 대표팀에 합류하셨네요.”
“······아! 여기 발탁되기 위해 몇 달간 열심히 분발했지. 다른 선수들에게 따라 잡히지 않느라 정말 골치가 아팠어.”
“선배는 저보다 랭킹이 높아서 훨씬 쉬웠잖아요. 저야 말로 고생이란 고생은 전부 다 했는 걸요.”
설마 지혁이 먼저 다가올지 몰랐는지 아주 잠깐 멈칫하는 두 선수.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방금 전까지 엄청난 실력을 보여준 지혁과 오랜만에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표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제 너하고 같은 무대에 설 기회를 잡았구나. 좀 더 규모가 있는 대회였으면 좋겠지만 지금 내 실력이라면 여기가 한계겠지.”
“그래도 적으로 만나지 않는 것만 해도 안심이 되네. 선배와 나는 복식으로 출전하거든.”
“하하하하. 그나저나 단식 선수들은 망했다고 봐야겠네. 아시아에서 누가 골든 보이를 상대로 이길 수 있겠어. 너를 제외하고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인 랭킹 29위의 니시코리조차 저번 자선 경기에서 큰 격차로 패배의 쓴 맛을 봤잖아. 그러니 우승은 따놓은 당상······.”
열 명 남짓한 대표팀 선수들은 자신들과 급이 다른 슈퍼 스타와 두 사람이 친해 보이자 신기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래도 서로 출전하는 대회도 다른데 어떤 방법으로 친분을 쌓았는지 궁금한 것 같았다.
재활 기간 도중에 했던 특훈은 외부로 전혀 노출되지 않았기에 이들의 관계를 모를 법도 했다.
그렇게 주변을 맴돌며 우물쭈물하길 잠시, 그들은 지혁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남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마치 스타에게 보답을 받은 팬들처럼 환한 얼굴을 했다.
우르르.
방금 전 인사로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한 건지 한꺼번에 몰려드는 선수들.
그렇게 지혁은 다시 훈련을 시작한다는 코치의 개입이 있을 때까지 인파에 묻혀 셀 수 없는 질문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덕분인지 짧은 시간 만에 어색하던 거리감도 대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대표팀 모두가 잠깐의 대화만으로 지혁이 다른 슈퍼 스타들에 비해 거만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
소란이 지나가고 얼마 후.
지혁은 코치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금씩 훈련을 시작했다.
아직 합류 첫날인 만큼 몸에 부담이 가는 움직임은 전부 배제한 채 실전 감각을 되살리는 목적의 훈련이었다.
탕!! 탕!!
하지만 워낙 실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났기에 그것만으로도 실내 코트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채찍 같은 궤적으로 스트로크가 라인 위를 때리는 광경에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선수들과 코치들은 지혁의 고속 서브 이상으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건 절대 힘만 타고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쿵!!
연속으로 열 번 정도 베이스라인 위에 스트로크가 들어가자 코치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갑자기 스트로크를 잠시 멈추었다.
지혁이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내자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과 함께 질문이 곧바로 돌아왔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긴 한데 이게 전력을 다한 게 맞아? 컨트롤이 너무 소름 끼칠 만큼 정교해서 말이야. 솔직히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정확도거든. 물론 지금도 충분히 훌륭해. 아마 이 정도 스트로크를 받을 수 있는 건 국내 선수들 중에서도 몇 명 없을 거야.”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횡설수설하는 코치의 질문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여는 지혁.
그 반응에 대표팀 선수들은 무슨 말을 듣게 될지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다.
“코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컨트롤을 높이기 위해 힘을 조금 빼고 있어요. 최근 힘이 상승하면서 밸런스가 미세하게 흔들렸거든요.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최대한 조정한다고 했지만 아직 완벽한 건 아니에요”
“허······. 그게 완성된 게 아니라고? 그럼 여기서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잖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더 무섭네.”
생전 처음 보는 위력의 스트로크조차 전력이 아니라는 지혁의 말을 듣고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는 선수들.
몇몇은 지난 세월 동안 했던 노력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자괴감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
이런 괴물이 존재하고 있는 한 프로에서 높은 랭킹을 달성하는 건 요원할 거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테니스계는 단순히 노력만으로 보답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종목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지금 빅3들도 아주 어린 나이부터 20중, 후반의 탑랭커들을 전부 무찌르고 정점에 서지 않았던가.
“워, 리버스 포핸드가 예술인데? 탑스핀 스트로크로 저기까지 할 수 있을 줄이야. 페더러의 샷을 직접 보게 되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실전에서 저런 타구를 받아낼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백핸드가 더 위력적인 것 같아. 한 손, 양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예측하기 힘든 이지선다를 걸고 있잖아. 각자 파워와 코스에 특화되어서 아마 저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동시에 두 명의 선수를 상대하는 압박감을 받을 걸.”
그렇게 선수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나눠지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의견으로 수렴했다.
‘직접 경기를 하면서 붙어보고 싶다.’
당연히 이기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얻을 것이 엄청 많아 보였기에 성장에 목마른 선수들은 계속해서 갈망하는 시선을 지혁에게 보냈다.
몇 년 동안 정체하고 있던 기량을 진짜 천재를 통해 뚫을 가능성을 미약하게나 발견한 모양이다.
오늘은 첫날인 만큼 고영민 감독이 연습 경기를 절대 허락할 리 없으니 내일 가장 먼저 약속을 잡는 사람이 임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