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광저우 아시안 게임.
지혁이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후.
훈련에 집중하던 대표팀은 드디어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광저우로 출발하기로 했다.
무려 40개 종목이 넘는 스포츠 경기가 한 번에 개최되어서일까.
공항에는 다른 종목의 국가 대표 선수들이 출국하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생소한 얼굴임에도 그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지혁과 똑같은 태극기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바밧! 파바밧!
기자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은 인기 있는 종목이나 이름이 알려진 선수들이 보이면 카메라를 찍었다.
그런데 끝내 따라가지 않고 한자리에서 가만히 대기하는 것을 보면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왔다! 저기 이지혁이야!”
“어디!?”
“빨리 사진 찍어!”
“이지혁 선수! 부상은 완전히 회복되신 게 맞습니까!?”
“반년 만에 출전하는 공식 대회인데 각오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이번 아시안 게임으로 병역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향후 행보를 간단하게라도 말씀해주세요!”
지혁이 20명 남짓한 테니스 대표팀 사이에 섞여서 마침내 공항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크게 소리치며 다급하게 달려오는 기자들.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그 숫자는 순식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역시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건 국내 스포츠 선수들 중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지혁이었던 모양이다.
아마 이런 상황은 광저우 현지에 도착하더라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는 메인 스포츠에서 절대적인 명성을 가진 아시아 선수는 지혁이 유일했으니 말이다.
괜히 거대 기업들이 지혁과 계약을 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게 아니었다.
“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진짜 인기가 장난이 아니구나. 여기서 쉽게 빠져나가는 건 힘들겠어.”
“어차피 공항에서 이렇게 될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잖아. 우리도 관심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나쁜 상황은 아니야.”
“하긴 옆에 붙어만 있어도 팬들에게 얼굴을 많이 알릴 수 있겠지. 확실히 지혁이가 가진 영향력이 크긴 하네. 이렇게 많은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건 생전 처음 보거든.”
“만약 금메달을 따게 된다면 괜찮은 기업의 스폰을 받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야. 이때까지 실업팀의 지원이 부족해서 ATP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매번 적자를 봤잖아. 이번 아시안 게임은 정말 걸려있는 게 많으니까 무조건 좋은 결과를 내자.”
선수들은 처음으로 겪는 커다란 관심이 굉장히 부담스러웠지만 앞으로 프로 활동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되자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물론 그들에게 관심을 보내는 기자들은 전체 중 극히 일부밖에 없었다.
지혁이 아닌 다른 선수들은 인지도가 없는 터라 그저 겉절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옆에 붙어있어서 인지 아주 가끔씩 질문이 들어왔다.
“이제 들어가 봐야 해. 인터뷰는 여기서 끝내고 들어가자.”
대표팀은 비행기 시간이 다 될 때까지 기자들에게 붙잡혀 있다가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연신 아쉬운 소리가 들렸지만 저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비행기를 연착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지혁이 출국 수속을 받고 안 쪽으로 모습을 감추자 소란스럽던 공항은 마침내 조용해졌다.
광저우 바이윈 국제공항.
선수단이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예상대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팬들이 지혁의 방문을 반겼다.
본진인 한국을 훨씬 뛰어넘는 광경에 대표팀은 놀란 반응을 보였다.
설마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지혁의 인기가 이 정도로 대단할지 몰랐던 것 같았다.
친절하게 한글로 적힌 플랜카드가 여기저기서 보이자 선수들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눈길이 갔다.
“황태자? 저거 지혁이를 말하는 거겠지? 엄청 요란한 별명이네. 뭐, 어울리긴 한다만.”
“아마 페더러의 별명이 황제라서 그런 것 같은데. 게다가 일본 팬들도 테니스의 왕자라는 별명을 붙여줬잖아.”
“와······. 뉴스에서나 보던 상황이 우리한테 직접 벌어지다니, 정말 실력만 제대로 받쳐주면 어디를 가더라도 인정을 받는구나.”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천재에게 이런 대접은 당연하지. 고등학생이 그랜드슬램 우승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는데 푸대접을 받는 게 이상한 거야.”
대표팀 선수들은 자신들을 환대하는 게 아닌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저절로 들뜬 표정이 되었다.
같은 국적을 가진 지혁이 찬사를 받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상황의 주인공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롤랑 가로스 이후, 어디를 가던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겪다 보니 이제 이런 일은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골든 보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중국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공항을 벗어나는 지혁.
차를 타고 뒤따라 오는 악성 팬들까지 있었지만 다행히 숙소는 아시안 게임 참가자들만 입장할 수 있는 선수촌이라 곤란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공안이 입구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데 일반인들에 불과한 사람들이 어떻게 들어오겠는가.
***
광저우 선수촌에 도착하고 며칠.
지혁은 아시안 게임이 시작되기 전까지 편하게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정작 실상은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와 별다를 게 없었다.
그의 정체를 알아본 다른 나라의 선수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 끝도 없이 몰려들어서였다.
이번 아시안 게임 참가자의 숫자가 12,000명을 넘는 걸 고려하면 처음부터 예정되어있던 일이었다.
덕분에 지혁은 숙소에서 외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휴······. 이제 시작하는구나. 1라운드는 인도 선수였지?”
결승까지 합치면 남은 경기는 앞으로 6경기.
참가 명단을 떠올려 보면 솔직히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챌린저에서조차 이름을 알리지 못한 수준 미달의 선수들이 대다수라니.”
안타깝지만 애초에 테니스 인프라가 거의 없다 시피한 국가들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몽골, 네팔, 이란, 인도네시아, 오만, 파키스탄, 카타르, 태국, 스리랑카에서 탑랭커가 배출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저벅저벅.
선수 대기실에서 나와 경기장에 들어서는 지혁.
거의 천 석에 달하는 관중석은 본래 텅텅 비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테니스는 철저하게 비인기 종목인 데다가 같은 시간에 다른 종목의 스포츠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데 누가 이곳에 오겠는가.
실제로 앞서 진행된 다른 선수들의 1라운드 경기는 많아봐야 40~50명 내외의 관중들만 둔 채 진행되었다.
와아아아아!
하지만 코트 위에 도착한 지혁의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은 전혀 달랐다.
오직 골든 보이의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테니스 규칙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좌석을 꽉꽉 매우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인도 국적의 선수는 이런 상황이 처음인 듯 꽤나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안 그래도 실력에서 크게 밀리는데 이제 기세까지 넘어와버렸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는 1라운드 경기.
지혁은 테니스공을 쥔 채 굳어있는 상대 선수의 상태를 살펴봤다.
‘이번 경기는 해보나 마나겠어. 괜히 길게 끌고 갈 필요는 없으니까 빨리 끝내버리자.’
마침내 서브를 하기 위해 베이스라인 위에서 서브를 준비하는 모습을 취하니 관중들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골든 보이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기대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쾅!!
[피프틴 러브.]
[SERVE SPEED 231km/h]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점수를 허용하는 인도 선수.
하위 랭킹의 선수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는 세계권 대회에서도 손에 꼽히는 지혁의 고속 서브를 받을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ATP랭킹 130위의 데이비드조차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리턴에 골치를 썩였으니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임 리 1-0.]
와아아아아!
고작 몇 분 만에 서비스게임이 끝나자 정숙을 유지하던 팬들은 눈빛을 반짝거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테니스를 모르는 사람들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지혁의 실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이 230km지 가까운 거리에서 보면 정말 살이 떨리는 속도였다.
“이게 페더러와 나달을 이긴 황태자의 실력인가······.”
“영상이랑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야. 테니스가 이렇게 매력적인 종목이었나?”“우리 중국에는 저런 선수가 왜 없는 거지? 인구나 국력을 생각하면 마땅히 대국에서 나오는 게 이치에 맞잖아. 게다가 한국은 챌린저 대회밖에 개최하지 못하는 테니스 불모지인 걸로 아는데.”
“쳇, 운도 좋지. 골든 보이 같은 불세출의 천재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말이야. 상하이 마스터즈에서 상금을 가져가는 중국 선수가 도대체 언제쯤 나오게 될까.”
관중들의 말대로 중국은 마스터즈 대회까지 개최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돈을 투자를 했음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남자 탑랭커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인구가 10억이 넘는 중국의 1위가 아직 ATP랭킹 300위조차 돌파하지 못했다는 걸 믿겠는가.
비록 리나라는 ATP랭킹 11위의 여자 테니스 선수가 유명했지만 대부분의 스포츠가 그렇듯 남자, 단식이라는 조건을 벗어나면 인기가 적은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곳에 모든 시선과 관심이 쏠리는 게 너무나 당연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지혁은 부러움이 잔뜩 담긴 시선을 받으며 경기를 순식간에 마무리지었다.
[게임 세트. 매치 리 6-0, 6-0.]
선수들의 수준 차이가 너무 났기 때문일까.
경기는 4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만에 졸속으로 끝나버렸다.
처참한 패배에 인도 선수는 혼이 나간 표정이었지만 랭킹 차이를 생각하면 이번 패배는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였다.
‘결승까지 많이 심심하겠네. 차라리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 고등부 학생들의 서열 결정전이 이것보다 훨씬 수준이 높겠는데?”
적어도 니시코리를 만나지 않는 이상 당분간 몸풀기조차 되지 않을 듯하다.
‘유럽이나 미국 팬들이 이번 아시안 게임을 보면 절대 국가 대항전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네.’
분명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에 학생들이 지켜본다고 했는데 이런 졸전을 펼쳐서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사람 같은 경기를 하려면 몇 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막대한 투자를 한 만큼 시간이 지나면 아시아 선수들의 랭킹이 올라올 테니 말이다.
‘이번에는 내가 있으니까 그 시기가 더 빨라지겠지.’
지혁은 서양인으로 가득 찬 그랜드슬램 참가자 명단이 조금이나마 변하길 바라면서 팬들이 있는 관중석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여기까지 고생해서 찾아온 만큼 조금이나마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자 팬들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건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록 중국어를 하지 못해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격렬한 반응을 보니 사인과 악수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