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광저우 아시안 게임.
광저우 아시안 게임, 테니스 단식 준결승전 당일.
1라운드를 더블 베이글로 승리한 지혁은 이후의 경기도 순조롭게 돌파했다.
그 과정에서 대표팀의 동료 선수들도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얻었다.
총 8팀 중 남녀 혼합 복식, 남성 복식 두 팀이 결승 진출을 확정 지은 것이다.
한국에서 처음 출발할 때 전문가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였다.
솔직히 지혁을 제외하면 특별하게 기대할만한 선수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잘 만하면 이번에 금메달 3개를 추가할 수 있겠는데?’
전체적인 상황이 긍정적인 만큼 지혁은 이번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사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지금과 똑같은 멤버로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를 따냈으니까 그저 감만으로 넘겨짚는 건 절대 아니었다.
‘남아있는 선수들의 랭킹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니까 결과를 바꾸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참가자들 간의 격차가 고만고만한 만큼 아마 지혁이 결승전이 시작되기 직전, 은메달로 아시안 게임을 마무리하는 남녀혼합팀의 훈련을 직접 도와준다면 승률이 꽤 많이 상승할 것이다.
‘일단 계획대로 일이 풀리려면 나부터 우승을 확정시켜야 해. 괜히 방심하다가 졸전을 펼치면 그것보다 망신은 없지.’
오늘 경기에서 상대할 선수는 우즈베키스탄의 테니스 영웅, 데니스 이스토민이었다.
그는 현재 ATP랭킹이 41위를 달성한 수준급의 탑랭커라서 이때까지 설렁설렁 상대했던 다른 참가자들과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여유를 부리면서 승리를 따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분명 나중에 30위 초반까지 올라갔던 선수였지? 전성기의 이스토민이라. 오랜만에 제대로 된 경기를 할 수 있겠네.’
비록 니시코리와 비교하면 한 끗 떨어지는 선수였지만 그래도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세 번째 순위에 들어가는 탑랭커였다.
그러니 손에 땀을 쥐는 접전이 벌어질 상황을 각오하고 경기에 들어가야 될 것 같았다.
***
준결승 시간에 맞춰 경기장에 도착한 지혁.
선수들끼리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탓에 경기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빠르게 시작되었다.
어차피 경쟁 상대라서 사전에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 거라 크게 상관은 없었다.
오늘 경기에서 한 명이 탈락할 게 뻔한데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쓰고 가식을 떠는 것도 이상했으니 말이다.
[이제 시작하는군요, 이지혁 선수 움직임이 평소처럼 가벼운 걸 보니 오늘도 컨디션이 괜찮은가 봅니다. 지난 경기에서도 그랬지만 부상을 완벽하게 극복한 모습이에요.]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사실상 전부 회복된 게 확실하죠. 상대 선수는 우즈베키스탄의 데니스 이스토민이네요. 이름이 생소한 선수인데 랭킹이 무려 41위입니다. 그랜드슬램에서 볼 법한 거물이에요.]
[사실 이번 대회가 올림픽이었으면 저 정도 랭킹은 쉽게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시안 게임이라서 유독 뛰어난 실력자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지혁 선수에게 승리를 따낼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닙니다.]
[하긴 이스토민을 같은 시기에 개최되는 파리 마스터즈에 갖다 놓으면 무게감이 크게 떨어지긴 하죠.]
승패를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경기를 해설하는 해설자들.
그들은 지루했던 아시안 게임에서 드디어 볼만한 경기가 나왔다는 생각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ATP랭킹이 300위조차 되지 못하는 기준 이하의 선수들이 했던 경기를 포장하느라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이글도 한, 두 번이지 모든 경기가 2-0로 끝나버리는데 이런 일방적인 결과가 팬들에게 재밌게 느껴질 리 없었다.
중계 시청률이 서서히 하락하는 시점에서 이스토민과 니시코리의 경기가 순차적으로 잡힌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게임 이스토민 1-1.]
의도치 않게 응원을 받으며 경기를 치르는 이스토민.
그는 제법 훌륭한 서브 실력을 발휘하며 1세트 초반의 서비스게임을 무리 없이 막아냈다.
관중들은 대부분 지혁을 응원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스코어가 1-1이 되자 커다란 환호성을 질렀다.
승부가 쉽게 나지 않고 스트로크가 제법 길게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드디어 지혁의 진정한 실력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이스토민이 188cm의 장신이라서 그런지 이지혁 선수의 코트 커버력을 뚫는 서브를 자주 성공시키네요. 스트로크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공격력만큼은 일품인 것 같습니다. 200km가 넘는 속도를 아주 편안하게 뽑아내요.]
[과연 ATP랭킹 41위를 거저 얻은 게 아니습니다. 이때까지 아시안 게임에서 보던 참가자들과 수준이 다릅니다. 이게 탑랭커의 실력이죠.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줘야 합니다.]
탕!! 탕!! 탕!!
그렇게 경기장은 지혁과 이스토민의 랠리로 인해 시끄러운 임팩트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관중들과 TV로 중계 경기를 보고 있던 팬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경험했던 국가 대표들과 다르게 미친 듯한 속도로 코트를 왕복하는 타구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멍하니 입을 벌리며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아시아 한정이 아니라 세계권에서 활동하는 주류 선수들의 기량은 정말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에서 마땅히 경쟁자가 없다고 말하며 무쌍을 찍는 선수들도 메이저 대회에 나오면 가장 하위권에 처박히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쾅!!
[게임 리 3-2.]
[SERVE SPEED: 232km/h]
5게임 마지막 포인트를 남겨둔 상황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전력을 다한 고속 서브를 꺼내 든 지혁.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비스라인 위로 에이스가 들어가자 이스토민은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리턴이 쉽지 않을 거라 판단이 선 것 같았다.
팬들은 위닝샷을 한 번씩 반복하면서 답답하게 진행되던 경기가 갑자기 시원하게 해결되자 드디어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될 거라 생각했는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ㅡ 고속 서브 나왔다!!!! 이지혁이 슬슬 본래 실력을 발휘하려나 본데? 이제 상대가 얼마나 버틸지가 관건이네 ㅋㅋㅋ 이번에는 제발 길게 가줬으면 좋겠다.
ㅡ 232km 돌았냐고 ㄷㄷㄷㄷ 기계 고장 난 거 아님?? 어떻게 부상당하고 난 뒤에 속도가 더 올랐냐고
ㅡ 솔직히 중국산이라 에러일 가능성도 있음 ㅋㅋ 조금만 더 기다려 봐. 다시 떨어질 수도 있잖아.
ㅡ 라켓 바꾸는 모습은 안 보였는데 230km를 넘었다고? 그새 피지컬이 상승한 건가?
ㅡ 음. 키는 그대로 일 걸. 이스토민 옆에 섰을 때 거의 비슷비슷했잖아. 아마 트레이닝을 빡세게 받아서 이전보다 힘이 쌔졌거나 자세를 교정한 거 같은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네.
ㅡ 그러고 보니 닉 아카데미에서 코칭을 받았다고 했지? 성능 확실하구만 ㅋㅋㅋㅋ 3개월 만에 저 정도 변화라니 역시 레전드 코치네.
ㅡ 거기 안 그래도 입학 경쟁률 엄청 빡쌨는데 이제 더 심해지겠네 ;; 이번 세대 최고의 천재가 보증 수표를 찍어줬잖아.
ㅡ ㅇㅇ 원래 국제 대회에서 입상 경력 없으면 간당간당했는데 앞으로 더 심해질 예정임. 한국에서도 닉 아카데미 유학가려고 준비하는 유망주들 엄청 늘었다. 뭐, 정작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한 이지혁은 국내파지만 말이야 ㅋㅋㅋㅋ
ㅡ ??? 어렸을 때 조기 유학 다녀온 거 아니었냐? 한국 시스템에서 저런 괴물이 만들어졌다고? 설마 테니스 협회가 다른 일은 못해도 유망주 발굴은 엄청 잘한 거냐??? 요즘 돌아가는 꼴 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
ㅡ ㄴㄴ 그냥 다른 빅3들이 메이저 대회에 등장할 때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임. 내가 알기로 이지혁 프로 데뷔할 때까지 주니어 대회 원정 비용 한 푼도 지원 못 받았음.
ㅡ 아 ㅋㅋㅋ 그럼 그렇지 협회가 일 잘하는 줄 오해할 뻔했자너 ㅋㅋㅋ
시청자들이 장난삼아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의 전망과 테니스 협회에 대해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지혁은 서서히 이스토민에게서 주도권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고작 서브 하나만 원래 실력을 발휘했음에도 팽팽하던 스코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앗!”
쾅!!
[게임 리 5-2.]
거대한 기합소리와 함께 T존을 공략하는 서브.
1세트의 승부를 거의 결정짓는 에이스가 라인 안으로 들어가자 이스토민의 이마에서 땀이 후두둑 떨어졌다.
불과 10분이 이 약간 넘는 시간 만에 그의 몰골은 상당히 초췌하게 변해있었다.
수비 능력을 한참이나 벗어난 타구를 따라가느라 몸을 아끼지 않고 슬라이딩을 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달려가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코트에서 넘어지는 사고도 몇 번이나 일어나서 자연스레 옷은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아! 이스토민의 라켓이 허공을 가르네요. 풋워크가 반 발자국이 늦었습니다. 230km의 서브를 받으려면 임팩트가 시작되는 동시에 출발해야 돼요. 사전에 예측하지 않고 반사 신경만으로 따라가는 건 어지간히 다리가 빠른 선수가 아니라면 극히 힘듭니다.]
[끝까지 포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나 보네요. 승산이 거의 없음에도 끝까지 도전하는 집념을 응원해주고 싶습니다.]
[이지혁 선수가 너무 강합니다. ATP랭킹 41위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있어요. 대체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 걸까요. 몇 달 사이에 더욱 강해져서 돌아왔어요.]
[정말 무서운 잠재력입니다. 이제 탑10급의 최상위 랭커쯤은 되어야 그의 진정한 실력을 볼 수 있겠습니다.]
‘리턴 능력은 여기까지가 최대인 건가? 짧은 시간 내에 적응하는 건 힘든가 보네.’
우세한 상황을 계속 유지하면서 무언가 곰곰이 고민하는 지혁.
그러는 사이 어느새 경기의 스코어는 세트 포인트까지 오고 말았다.
[사이드라인을 공략하는 백핸드 다운 더 라인! 결국 1세트는 이지혁 선수에게 돌아갑니다. 일방적인 경기였어요.]
[6-2라는 스코어를 보면 남은 세트에서도 희망은 없을 것 같네요. 역시 언더독의 기적은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휴식을 하기 위해 벤치로 돌아가는 선수들의 표정을 보니 누가 승자인지 이미 뻔합니다. 이스토민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요.]
[준결승에서 패배할 거라는 걸 깨달은 거겠죠. 직접 경기를 하고 있는 당사자인 만큼 저희보다 더 자세하게 느끼고 있을 겁니다. 역량 차이가 얼마나 나고 있는지 말이에요.]
[부디 좌절하지 말고 후반까지 최선을 다해줬으면 좋겠네요. 오랜만에 보는 수준 높은 랠리가 여기서 끝나면 아쉬울 것 같거든요.]
[그런데 결승전도 이렇지 않겠죠?]
[설마 상대가 일본의 천재로 유명한 니시코리인데 그러겠어요. 그도 저번 친선 경기의 패배로 인해 절치부심한 만큼 이번에는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 랭킹도 20위 대에 진입했잖아요.]
[라이벌 매치가 어떻게 진행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두 선수가 공식 경기에서 붙는 건 이번이 처음이죠?]
[맞습니다. 아마 향후 10년 간, 아시아에서 개최되는 모든 대회들은 두 선수의 대결로 우승자가 결정될 겁니다. 오늘은 그 서막이라고 보시면 돼요. 첫 승리를 누가 가져가게 될지 저도 정말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