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광저우 아시안 게임.
[이지혁, 아시안 게임 결승 진출 확정! 병역문제가 해결되기까지 이제 한 걸음.]
[마지막 상대는 전문가들이 이미 예상한 대로 니시코리 케이로 정해졌다.]
[한국이 테니스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할 확률은 90% 이상으로 알려져.]
[부상을 극복하고 완벽하게 부활한 골든 보이, 그의 향후 행보가 앞으로 기대된다.]
[내일 결승전 경기를 끝으로 끝나는 이지혁의 2010년 시즌.]
[S증권이 한국에서 역대급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팬들이 추측하기로 2007년에 있었던 페더러, 샘프라스의 대결이 재연될 수도 있다고 말해.]
지혁은 ATP랭킹 41위의 데니스 이스토민을 2-0으로 대파하고 준결승전을 아주 가볍게 통과했다.
애초에 두 선수의 랭킹 차이를 생각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탑10 안에도 들지 못하는 탑랭커가 빅3급 선수를 이기는 상황이 나올 리 없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내일이면 아시안 게임도 끝이구나.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갔어.”
비록 참가 선수들의 실력이 부족해서 아쉬운 면이 많았지만 그래도 얻은 수확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번 대회에서 얻은 이득은 병역 면제, 인기, 상승한 몸 값, 어플의 포인트 등으로 아주 다양했다.
아마 이 정도면 다음 시즌을 시작하기 전까지 신체 능력을 한계까지 상승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빅3들이나 정상급 선수들에 비해 체력이나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이제 그럴 일은 없겠네. 잘만 하면 오히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겠어.”
물론 현재 지혁이 가진 피지컬이 부족한 편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메이저 대회에서 상대하고 있는 경쟁자들은 수만 명이 넘는 프로들 중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괴물들인 만큼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의 경기만 보더라도 이들의 유지력은 인간의 한계를 한참이나 넘어섰다.
“그나저나 니시코리와 재경기라. 랭킹이 많이 올랐던데 그동안 얼마나 실력이 늘었을까?”
지혁은 간만에 긴장할 만한 실력자와 붙게 된다는 생각에 들뜬 기분이 들었다.
이스토민과 한 경기도 나름 괜찮았지만 중반 이후로 너무 싱거워져서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량이 한창 물이 오른 니시코리라면 분명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것이다.
그렇게 내일 있을 경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기쁜 마음으로 상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에서 알람이 들려왔다.
“벌써 시간이 됐나?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슬슬 가봐야겠네.”
테니스 장비가 든 가방을 챙겨 훈련장으로 향하는 지혁.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혁아! 여기야!”
“자리를 잡아 뒀으니까 이쪽으로 오면 돼.”
훈련장에 들어가자마자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그들의 정체는 아시안 게임에서 결승까지 진출한 대표팀의 선수들이었다.
지혁은 은메달을 따게 되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얼마 전, 연습 경기를 해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리고 그 제안은 너무나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ATP랭킹 6위가 도움을 주겠다는데 상식적으로 어떤 선수가 거부를 하겠는가.
“정말 와줬구나! 이렇게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
“그런데 너도 바쁘지 않아? 방해가 될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취소해도 괜찮아.”
“아니에요. 경기 파트너를 해주면 저한테도 도움이 되는 걸요. 서로 한테 좋은 일이니까 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그렇게 지혁과 대표팀 선수들은 결승전에서 이기기 위해 약속했던 훈련을 시작했다.
***
아시안 게임 결승전 당일, 광저우의 테니스 경기장.
인지도가 대단한 두 스타들의 첫 공식 경기가 성사돼서 일까.
관중석은 빈자리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선수들이 입장하기만을 기대하며 코트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한, 중, 일 팬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얼마 후, 지혁과 니시코리가 마침내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아아!
팬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는 두 사람이 코트 중앙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역시 니시코리가 결승에 올라왔네요. 하긴 다른 선수가 이 자리에 있는 상황은 처음부터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나마 이스토민이라면 가능성이 조금 있지만 그는 저와 대진이 붙었으니까요.”
“음. 나를 꽤 높게 평가해주는구나. 너하고 비교하면 내가 많이 부족한 건 알고 있어. 저번 자선 경기에서도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금메달을 그냥 내줄 생각은 없어.”
니시코리는 불과 3개월 전에 친선 경기를 했던 경험 덕분에 결승전에서 승산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이길 확률이 낮은 대결이지만 은근히 승부욕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지혁을 따라잡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실제로 지난 시간 동안 절치부심하면서 나름 괜찮은 성적을 얻었으니 연기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어제 경기는 잘 봤어. 그런데 고작 몇 개월 만에 실력이 또 늘었더라. 언론은 닉에게 코칭을 받은 효과라고 하던데 정말로 그 말이 맞는 거야?”
“음······. 영향이 없는 건 아니겠죠. 니시코리도 6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보냈잖아요. 닉의 능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아무리 훌륭한 코치라도 고작 반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그 정도 성장을 만들어내는 건 힘들지. 그건 네가 특별해서 가능한 일이었을 거야.”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긴가민가한 반응을 보이는 니시코리.
하지만 직접 실력으로 증명한 지혁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경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코트 위로 올라갔다.
이미 언론을 통해 지혁과 니시코리가 친하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알려졌기 때문에 그 광경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운이 좋았던 건지 서비스게임을 먼저 가져가게 된 지혁.
결승전 상대인 니시코리는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어중간한 선수들과 완전히 달랐기에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서브가 서비스코트 위로 떨어졌다.
바람을 가르는 살벌한 소리만 들어도 서브의 속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쿵!!
[포티 러브.]
아아아아아.
세 번째 포인트마저 에이스로 넘어가자 관중석에서 크게 들려오는 아쉬운 목소리.
천재 중의 천재라고 불리는 자국의 유망주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일본 팬들의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이 쏟아졌다.
설마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밀릴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US오픈과 마스터즈에서 탑10들과도 대등한 대결을 하던 선수가 설마 아무것도 못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골든 보이에게는 안 되는 건가?”
“니시코리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리턴조차 성공하지 못하다니 이건 너무 잔인한 결과잖아.”
“이러면 앞으로 있을 대회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지혁이 현역에 남아있는 동안 모든 우승은 한국이 차지하는 거야?”“그렇겠지. 아시안 게임, 올림픽, 데이비스컵 같은 국가대항전에서 그를 이길만한 아시아 선수가 없잖아. 적어도 10년은 억눌린 채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아.”
“일본에서 불세출의 천재 유망주가 나왔다고 기뻐하던 게 고작 3년 전인 걸로 기억하는데 하필이면 같은 세대에 저런 녀석이 나오다니.”
“이렇게 된 이상 랭킹이라도 높게 올려서 피해 가는 수밖에 없어. 2번 시드를 받으면 적어도 중간에 탈락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며 흥미가 식은 표정을 짓는 일본 팬들.
하지만 니시코리의 저력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괜히 그가 랭킹 4위까지 치고 올라는 선수로 꼽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빅3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잠재력을 가진 천재는 언제든지 기적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했다.
탕!!
무려 네 번의 시도 만에 지혁의 고속 서브는 리턴이 되어 돌아왔다.
그 예상을 벗어난 상황을 보고 몇몇 프로들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고작 한 장면에 불과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잠재력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골든 보이만 대단한 줄 알았는데 니시코리도 만만치 않잖아? 마린 칠리치, 델 포트로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나 봐.”
“스무 살에 29위를 찍은 녀석이 만만할 리 없지. 리가 워낙 비현실적인 활약을 하고 있어서 간과하고 있는 사람이 많긴 해도 그 녀석만 없었다면 충분히 빅3의 후계자로 언급될 사이즈의 유망주야.”
탕!! 탕!! 탕!! 탕!!
위협적인 스트로크를 받아내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지혁.
빈틈이 될만한 곳을 집요하게 노려지고 있는 중이라 위태위태한 상황은 계속해서 연출되었다.
[포티 피프틴.]
우와아아아아!
‘연구를 많이 했나 보네. 멘탈도 그렇고 전반적인 실력이 많이 늘었어.’
지혁은 어렵게 득점을 했음에도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니시코리에게 씨익하고 웃어줬다.
‘역사가 너무 변해서 성장이 정체되거나 슬럼프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일은 없겠구나.’
오히려 가만히 내버려두면 원래 달성했던 기록을 넘어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아무래도 지혁이라는 기존에 없던 자극이 니시코리의 성장에 기폭제가 된 모양이다.
‘템포를 조금 더 올려도 되겠어.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한 번 볼까.’
베이스라인에 자리를 잡으며 진지한 표정을 하자 이전과 달리 분위기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장난기가 전부 달아난 그 모습에 관중들은 뭔가 예감한 건지 침을 꿀꺽 삼켰다.
쿵!하고 떨어진 서브.
감을 완전히 잡은 니시코리에게 더 이상 에이스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전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해 보이는 경기.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승세는 한쪽으로 빠르게 기울어갔다.
[게임 리 1-0.]
“······허. 서브를 막아냈다고 생각했더니 이제 스트로크야? 산 넘어 산이구만.”
“골든 보이의 한계가 대체 어디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할만하다 싶으면 계속 달아나서 어디까지가 전력인지 짐작이 되지 않아.”
관중석에 앉아있던 프로들은 한층 날카로워진 포핸드 위너가 코트의 빈 공간을 꿰뚫자 투덜거렸다.
“오늘 경기는 반전이 일어나기 힘들겠어. 역시 롤랑 가로스 우승은 운으로 한 게 아니었구나.”
“심리적인 충격이 상당할 텐데 니시코리의 상태는 어떤 거 같아? 우리가 느낄 정도면 모를 리 없잖아.”
“아직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아. 다음 게임에서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겠지.”
“솔직히 나는 승산이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해.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맞아. 이기는 건 불가능하겠지. 골든 보이는 격이 다른 선수야. 빅3를 상대할 때처럼 경험을 쌓는다는 의의만 두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아. 괜히 희망을 가지고 있어 봤자 좌절할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