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비시즌기
미션이 후반부에 들어섰을 무렵.
완벽할 거라 생각했던 지혁도 조금씩 에러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표적지가 손바닥보다 작아지다 보니 바운드 위치가 아슬아슬하게 벗어났기 때문이다.
후반부의 난이도가 워낙 높은 편이라 이건 어느 정도 예측했던 상황이었다.
230km가 넘는 서브를 포스트잇 크기의 종이 위에 정확하게 떨어트리는 건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어려웠으니 말이다.
‘쯧. 이대로 진행되면 80% 중반 정도가 나오겠네. 예상보다 잘 나오긴 했지만 딱히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야.’
만약 페더러가 똑같은 조건으로 이 미션을 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텐데.
이런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건 아직 서브를 개선할 점이 많다는 뜻이었다.
“아앗!”
‘······큰 일날 뻔했네. 일단 당분간 포인트가 모자라서 방법이 없으니 집중하자. 괜히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까.’
지혁은 자칫 실수를 저지를 뻔하자 정신을 차리고 잡생각을 몰아냈다.
80점을 마지노선으로 지키려면 더 이상 여유를 부리긴 힘들었다.
앞자리 숫자에 따라 느껴지는 바가 완전히 달라지니 안일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쿵!!
와아아아!
다시 한번 표적지 위를 강타하는 지혁의 고속 서브.
사람들은 호쾌한 그 광경에 질리지도 않는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정작 당사자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데 그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하긴 니시코리가 50%의 정확도를 보여줬으니 상대적으로 비교가 많이 되긴 했다.
지혁이 예상하고 있는 최종 성적이 80%여서 그렇지 지금 당장은 90% 중후반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시도는 전부 성공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완전 괴물이구만······. 외부에서 들리는 소문들이 너무 터무니없어서 과장된 부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과소평가된 거였어. 니시코리가 이런 선수와 라이벌이라니 언론이 무리수를 많이 두었구나.”
“저는 조만간 승리를 한 번 정도 따내거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골든 보이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 모습을 보고 나니 가망성이 거의 없을 것 같네요. 저런 경지의 선수를 이길 수 있는 건 빅3가 아니면 불가능할 거예요.”
“확실히 시청률은 보장되긴 하겠어. 그런데 일본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상돼서 걱정돼. 이게 방송으로 나가면 라이벌이라는 소리가 싹 사라질 테니 말이야.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 테니스계는 이런 상황을 절대 바라지 않겠지.”
“그렇다고 이 명장면을 쓰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최대한 편집의 힘을 빌려 니시코리를 부각시키면 될 거예요. 전문가들까지 속일 수 없겠지만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얌전히 입을 다물겠죠.”
메인 PD와 서브 PD는 서로 쑥덕거리며 방송의 방향을 의논했다.
그 와중에도 코트에서 시선을 한 번도 떼지 않는 걸 보면 지혁이 어지간히 매력적인가 보다.
그들뿐만 아니라 단순히 출연만 해주더라도 엄청난 시청률이 보장되는 보물을 본다면 어떤 방송인이라도 비슷한 감정을 가질 것이다.
인지도, 실력, 외모 삼박자가 완벽하게 갖춰진 이 정도 스타를 어딜 가서 대체할 수 있겠는가.
괜히 지혁의 섭외비용이 수십억이 넘는 살벌한 비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쾅!!
마지막 서브를 성공하고 마침내 미션을 종료하는 지혁.
혹시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까 조심하던 해설자들과 출연진들은 그제야 참고 있던 흥분을 터트리며 코트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골든 보이, 무려 85점입니다! 과연 그랜드슬램 우승자다운 실력이었습니다! 이제 빅3가 아니라 빅4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리상! 대단해요!”
“맞아요! 공이 너무 빨라서 무서웠지만 그래도 엄청 멋있었어요!”
처음으로 정상급 선수의 실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잔뜩 매료된 표정을 한 채 테니스가 이렇게 박진감 넘칠 줄 몰랐다고 떠들었다.
아마 오늘 경험으로 인해 ATP 대회에 취미를 붙일 사람도 제법 나올 것이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왔다가 지혁의 경기를 보고 열렬한 팬이 된 수많은 이들처럼 말이다.
이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을 봤으니 적어도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질 일은 없었다.
그렇게 프로그램의 진행이 마비된 상태로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난 후.
지혁은 다시 여성 출연자들의 지도를 맡게 되었다.
원래 참여도가 괜찮았지만 직접 시범을 보여주고 나니 피드백은 더욱 적극적으로 돌아왔다.
믿기지 않는 실력으로 인해 테니스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커졌기 때문이다.
***
지혁과 니시코리는 지도를 받았던 출연진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별해 짧은 경기까지 해주며 방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원래 적당히 하다가 빠지려고 했지만 한 명도 기분 나쁘게 하는 일 없이 순수한 팬의 입장으로 다가오는 터라 서비스를 제대로 해주었다.
아마 절반이 넘는 출연진들이 아이돌, 배우, 연예인 등의 예쁜 여자들이라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선수들도 사람인 터라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게 너무나 당연했으니 말이다.
“10-0! 아! 아쉽네요. 결국 한 점도 따내지 못했습니다. 연예인팀의 완벽한 패배입니다.”
“휴······. 저도 10년 이상 테니스를 배워서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역시 골든 보이에게는 안 되는군요. 세계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는 확실히 달라요.”
“리상! 저희하고 경기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평생 자랑하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벤트성 경기가 끝나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출연진들.
지혁은 여러 가지 핸디캡을 가지고 대결에 임했지만 단 한 번도 곤란한 상황에 처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아마추어 대회조차 우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프로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물 선수에게 위닝샷을 넣는 게 가능하겠는가.
이건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애매한 실력들이라 몸을 풀다만 느낌이네. 일반인 중에서 나름 괜찮긴 해도 잘 쳐줘 봐야 중수 수준에 불과해.’
아무리 성인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 실력은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중등부 선수들보다 밑인 수준이었다.
그렇게 지혁이 너무 허무하게 끝났다는 느낌을 받고 있을 때, 니시코리는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건지 재미있는 제안을 걸어왔다.
장난기가 담긴 표정을 보면 아무래도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의견인 것 같았다.
이럴 때마다 그와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지혁, 마침 오늘 훈련도 하지 못했으니까 너만 괜찮다면 이분들에게 좋은 경험을 시켜줄까?”
의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출연진과 촬영팀들.
딱히 뭔가 말하지 않았지만 무언의 기대감으로 인해 피부가 따끔따끔할 지경이었다.
여기서 거절의 말을 꺼낸다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너무나 뻔했다.
분명 여기저기서 크게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겠지.
‘니시코리와 대결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해. 그런데 나한테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마침 제대로 된 경기를 하고 싶었던 지혁은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혹시 마음이 변할까 싶어 빠르게 코트를 비워줬다.
‘너무 진지하게 하진 말자. 적당히 힘을 빼도 충분히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경기가 나올 거야.’
전력을 다하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적당히 완급조절을 하면 될 것이다.
여기서 죽자 살자 달려들어서 니시코리를 깔아뭉갠다고 해도 얻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 행동은 서로에게 손해만 되고 감정만 상하게 될 테니 말이다.
탕!!
니시코리는 양해를 구하고 먼저 서비스게임을 가져갔다.
당장 철저하게 규칙을 적용하지 않는 걸 보면 그도 지혁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흥으로만 즐길 생각인가 보네. 나도 상황에 맞춰서 적당히 하면 되겠어. 기왕 재미로 하는 김에 실력을 비슷하게 조정하면 더 괜찮겠지?’
지혁은 생각을 정리하고 서비스라인으로 떨어지는 공을 가볍게 걷어내었다.
일단 간단하게 랠리를 주고받다 보면 감을 더 정확하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탕!! 탕!! 탕!!
힘을 적당히 조절했다고 하더라도 최정상급 프로들이라 스트로크들은 출연진을 상대할 때와 차원이 다른 속도로 쭉쭉 뻗어나갔다.
인간의 반사신경으로 받는 게 거의 불가능할 수준으로 공이 코트 좌우로 반복하자 사람들은 벌써부터 눈이 어지러운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서로 위닝샷에 고집하지 않았던 터라 랠리의 횟수는 어느새 20번을 넘어가 버렸다.
‘이쯤이면 대충 적응했겠지?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오랜만에 사용하는 거라 얼마나 통할지 모르겠네.’
퉁!
베이스라인 끝에 떨어지는 포핸드를 등 뒤로 넘긴 라켓으로 받아내는 지혁.
묘기와도 같은 트릭샷에 니시코리는 스텝이 엉켰는지 한 발 늦게 타구를 쫓아갔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공격에 나섰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 크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지혁이 위닝샷을 노렸으면 더욱 위력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와! 방금 뭘 한 거야? 엄청 신기한 자세로 공을 친 것 같은데 저런 방법도 있었어?”
“내가 기억하기로 아마 트릭샷일 걸. 엄청난 숙련도가 요구되는 기술이라 감각이 뛰어난 선수들만 가능한 걸로 알고 있어.”
“허······, 실제 경기에서 저런 게 가능하다고? 컨트롤이 얼만큼 대단해야 저럴 수 있을까.”
단순히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것 같은 니시코리의 스트로크를 지혁이 예상하지 못한 샷으로 연달아서 받아내자 신기다거나 멋있다는 말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건 전문가인 지혁과 니시코리의 코치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트릭샷에 지혁이 가지고 있는 재능의 크기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테니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더 많은 만큼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말도 안 돼! 저기서 저런 방법으로 대처한다고?”
“도대체 기량 차이가 얼마나 난다는 거지······. 두 사람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격차가 더 클 수도 있겠어.”
“공식 경기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걸 보면 주무기는 아닐 것 같은데.”
“당연하지. 번거롭게 하는 것보다 그냥 다운 더 라인이나 크로스샷이 훨씬 편한데 누가 저런 짓을 고집하겠어. 트릭샷은 멋을 제외하면 효율이 극히 떨어지는 기술이야.”
“저런 짓이 가능하다는 자체가 중요하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상위 랭커에게 먹힐 만한 트릭샷을 사용할 수 있는 건 극소수잖아. 아마 탑100 중에서도 4~5명 밖에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골든 보이는 만날 때마다 매번 우리를 놀라게 하는 녀석이네. 정말 양파 같은 녀석이야. 대체 숨기고 있는 게 얼마나 되는 걸까.”
“테니스 팬의 입장에서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우리가 저런 괴물을 공략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걸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답이 나오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