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비시즌기
화려한 퍼포먼스를 발휘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은 지혁.
쉽게 결판이 날 법도 했지만 정작 경기는 누가 우세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스코어가 비슷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승패에 집착하지 않고 순수하게 랠리를 즐기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 버렸다.
퉁!
막상막하의 경기를 하고 있음에도 모든 찬사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니시코리는 기본기를 고집하던 것을 집어치우고 지혁처럼 파격적인 플레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분명 트릭샷은 평소에 쓰지 않는 기술인 걸로 아는데 타고난 재능 덕분인지 스트로크는 어떻게든 라인 안으로 들어왔다.
이걸 보면 니시코리도 지혁의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져서 그렇지 어마어마한 천재였다.
어떤 선수가 이렇게 난이도 높은 기술을 연습도 없이 단 한 번 만에 성공시키겠는가.
그라서 가능한 일이었지 아마 다른 탑랭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높은 확률로 에러를 저질렀을 것이다.
“프로들의 경기는 차원이 다르구나······.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이네. 뭐, 이게 당연한 거겠지만 말이야.”
“랠리를 끊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만 해도 엄청 어려워 보여요. 그런데 아직도 여력을 남겨두고 있는 거겠죠?”
“그렇겠지. 그게 아니라면 경기가 대등하게 유지되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선수들 쪽으로 뜨거운 시선을 보내며 확신하는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 출연진.
그가 추측한 것처럼 지혁과 니시코리는 적당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완급 조절을 하고 있었다.
탕!! 탕!! 탕!!
그렇게 실내 코트에서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명승부가 펼쳐졌다.
굳이 승패를 나눌 필요가 없었기에 경기의 최종적인 결과는 무승부가 되었다.
확실하지 않은 결말이 나오자 PD는 이걸 기뻐해야 할지 긴가민가한 표정을 보이며 고민했다.
니시코리가 처참하게 패배하여 체면을 구기지 않은 건 희소식이었지만 지혁이 쐐기를 박는 하이라이트 부분이 날아갔으니 솔직히 어떤 게 이득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쁜 건 아니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지금까지 찍은 것만 해도 충분히 엄청난 수확이야. 잘만하면 다른 곳에서 분량을 더 뽑을 수도 있고.”
“PD님, 그러면 다음 코너를 준비할까요?”
“그래. 선수들 휴식하는데 방해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하고. 괜히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도록 해. 갑자기 사인을 해달 라거나 하지 말라는 뜻이야.”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해서 행동할게요.”
거듭 강조하는 선배 PD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자신의 할 일을 하러 가는 서브 PD.
잠시 후, 여러 가지 지시를 듣게 된 스태프들은 지혁과 니시코리가 땀을 식히자 슬쩍 눈치를 보며 주변을 정리했다.
여기서 지혁이 이탈해버리면 그들의 입장이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공식 섭외도 아니고 개인적인 친분도 없으니 여기서 촬영을 중단한다고 해도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무료 봉사를 넘칠 만큼 해줬으니 배은망덕하게 나가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지혁, 계속 협조해줄 거야? 넌 출연료도 받지 않으니까 이제 내키지 않으면 원래 있던 곳에서 구경해도 돼.”
은근슬쩍 합류하는 분위기가 되자 니시코리는 지혁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배려심이 깊은 행동이지만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지혁이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모르는 척 가만있는 것은 전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아직까진 재미있으니까 조금 더 참여하려고요. 지루해지면 감독한테 말하고 나갈 거라서 괜찮아요.”
“그래?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면 상관없겠지. 어차피 내가 사전에 전달받은 내용에 의하면 특별히 이상한 요구는 없었어.”
그렇게 지혁이 승낙이 떨어지자 두 선수는 촬영팀과 출연진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방송을 녹화했다.
사람들이 워낙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터라 솔직히 일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런 일이라면 가끔씩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스트레스와 시간적인 부담도 적은데 보상은 상당할 게 분명하니 이만한 일도 없었다.
어플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자원봉사를 하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진짜 실속을 챙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지혁이었다.
***
연습 경기를 하고 대략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촬영은 마침내 준비했던 마지막 코너를 끝으로 종료되었다.
재미 삼아 중간부터 합류한 지혁도 그 소식을 듣고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슬슬 지루해지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코트도 비워질 참이니 방해를 받지 않고 평소처럼 훈련도 할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철수할 준비를 하는 촬영팀들.
메인 PD와 서브 PD는 감사 인사를 하려고 빠르게 달려왔지만 지혁은 그들을 적당히 상대해주다가 돌려보냈다.
어차피 앞으로 재회할 일도 없을 거라 굳이 인맥 관리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만약 일본 방송에 다시 출연한다고 해도 이들보다 훨씬 높은 인물들과 얘기를 나눌 테니 말이다.
“저······. 리상.”
니시코리와 멀뚱히 서서 사람들이 철수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어눌하긴 하지만 출연진들 중에 이 정도라도 회화가 가능한 사람은 한 명뿐이라 그 정체는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미션을 부탁했던 사람일 거야. 이름이······카논이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자그마한 체구와 청순한 외모의 카논이 바로 옆에서 지혁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반적인 분위기와 표정을 보면 무슨 용건을 가지고 접근한 건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상당히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예인이 그 대상인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 지혁을 만나러 온 거예요? 훗. 너도 제법인데? 하긴 너 정도되는 녀석이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것도 이상하지. 오히려 지금까지 너무 조용한 게 말이 안 됐어.”
“저는 지금 당장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있거든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동하면서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죠. 인기에 취해 방탕하게 행동했다면 롤랑 가로스 우승도 하지 못했을 걸요.”
“글쎄. 수도승처럼 사는 것보다 적당히 타협하는 게 나을 걸. 항상 팽팽한 활처럼 당겨져 있으면 버티기 힘들 테니까. 10년이 넘는 프로 생활을 무사히 버티려면 안정을 찾는 게 가장 우선이야.”
“페더러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지만 대부분은 그저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더라고요. 좋은 결과를 얻는 것보다 방종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선수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니시코리도 얼마 전 슬럼프의 원인이······.”
서로의 인생관이 크게 달라서인지 티격태격하며 다투는 두 선수.
장난 삼아 언쟁을 하는 거라 분위기는 심각하지 않고 가벼웠다.
니시코리는 자신이 점점 밀리는 것 같자 화재를 급하게 전환했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 얘기가 나오면 무조건 수세에 처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지척에 여자 친구도 있는 상황에서 옛 애인을 언급하게 되면 당장 뒷감당을 하기 힘들었다.
“잠깐만, 용기를 내서 너를 찾아온 숙녀를 계속 방치할 거야? 그런 말을 하는 것보다 일단 이 일부터 처리해야지.”
지혁은 상대의 잔꾀를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말대로 카논을 이대로 가만히 세워둘 수 없었기에 고개를 돌려 용건을 물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치자 카논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근처에서 구경을 하는 니시코리는 볼이 발갛게 변한 모습이 귀여운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거죠?”
“네···네! 그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리상하고 친해지고······싶어서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횡설수설하는 카논.
그녀는 처음부터 말을 더듬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대강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전부 전해졌다.
‘관계가 좋게 풀린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너무 뻔하니까 거절하는 게 맞겠지.’
당장 비시즌기만 끝나면 무조건 일본에서 떠나게 될 텐데 괜히 여지를 주는 것도 이상했다.
생각을 정리한 지혁은 결국 에둘러서 카논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예전 같았으면 상대의 감정을 신경쓰지 않고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요즘 좋은 일만 있다 보니 성격이 많이 유하게 변했다.
“···네.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죄송···해요.”
카논은 설마 거절을 당할 줄 몰랐다는 듯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하긴 차이는 상황이 절대 어울리지 않는 외모이긴 하다.
창피한지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가듯이 사라지는 카논.
그러자 주위에서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있던 사람들이 다양한 감정을 표출했다.
특종을 놓쳤다는 아쉬움, 자신이 대쉬를 먼저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모든 것을 가진 사람에게 느끼는 질투심 등.
만약 아무 생각도 없이 승낙을 했다가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줬을까.
적어도 지금보다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진짜로 거절할 줄이야······. 너도 진짜 어지간한 녀석이구나.”
“지금은 한 곳에 집중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잖아요. 당분간 다른 곳에 한눈 팔 생각은 없어요. 저는 유망주의 저주에 걸리기 싫거든요.”
“나는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 다 된 밥상을 엎어버릴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니시코리는 마치 자신이 이번 일의 당사자인 것처럼 아깝다는 반응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건 상황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스태프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와······. 카논이 완벽하게 차였어. 그래도 일본에서 알아주는 아이돌의 센터인데 대단하네.”
“앞으로 돌부처라고 불러야겠는 걸. 나라면 절대 저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을 거야. 저런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여자를 어떻게 밀어내겠어.”
“잘만하면 일본을 뒤흔들 특종이 될 수 있었는데 아쉽네······.”
“그런데 카논을 아무렇지 않게 거절할 정도면 골든 보이가 만나는 여자는 대체 얼마나 대단하다는 거지?”
“상대가 탑배우라고 해도 전혀 밀리지 않으니까 최소한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스태프들은 지혁이 지금 연애에 관심이 없고 테니스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와도 만날 수 있는데 금욕적으로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명 스포츠 선수들이 슈퍼 모델 여자친구를 두고 있는 경우가 정말 많았으니 그들의 의심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과 다르게 지혁은 정말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