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134화 (134/241)

134화. 비시즌기

일본에서 다사다난했던 촬영을 끝내고 나서 며칠 후.

지혁은 니시코리와 훈련을 끝내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했다.

솔직히 시간이 허락한다면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매니지먼트가 중요한 계약을 보름 전에 잡아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황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일정은 일본에서 머무르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었으니 말이다.

“페더러가 직접 한국으로 방문한다고 했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

시즌이 종료될 무렵부터 나오던 얘기여서 혹시나 했는데 이게 정말로 성사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S증권이 3년 전 샘프라스와 페더러의 슈퍼 매치를 재연하기 위해 상당히 힘을 쓴 것 같았다.

아마 한국에서 지혁처럼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가 나온 만큼 가장 먼저 홍보 효과를 선점하려고 한 것이겠지.

나달을 10년이 넘도록 후원한 H자동차의 전례가 있어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슈퍼 매치까지 남은 시간은 사흘인가······. 경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려면 그때까지 컨디션을 조절해야겠네. 큰 무대에서 재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책을 저지를 수는 없으니까.”

비록 훈련 시간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겠지만 그동안 바쁘게 움직였으니 잠깐 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테니스 코칭을 한 번만 해달라는 얘기를 꽤나 많이 들었는데 이 기회에 미뤄두었던 부탁들을 전부 처리하면 되겠다.

“계속 거절하기 힘들었는데 마침 잘 됐어.”

지혁은 내일과 그다음 날 약속을 잡기로 결정하고 지인들에게 연락을 보냈다.

상대측과 일정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답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결과는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솔직히 지혁 정도 되는 거물이 공짜로 코칭을 도와준다는데 누가 거절하겠는가.

미리 잡아둔 일정도 전부 내팽개치고 오는 게 누가 봐도 옳은 선택이었다.

***

약속을 잡고 나서 하루 뒤.

지혁은 날이 어둑해진 저녁쯤 공용 코트에 도착했다.

지난 일 년 간 적잖은 친분이 쌓인 지연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카데미의 쾌적한 시설을 놔두고 굳이 이곳을 약속 장소로 고른 이유는 교육생들 탓이 매우 컸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고 했지.”

직접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아카데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지연은 만약 방문한 게 알려진다면 코칭이 불가능할 수준으로 난리가 날 거라고 말했었다.

자처해서 호랑이 굴에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 차라리 평범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이곳이 나을 것이다.

설마 이런 곳에 지혁 같은 스타가 방문할 줄 누가 예상이나 하겠는가.

가끔 이 장소를 이용했지만 어두운 시야를 뚫고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덜컹.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야외 테니스 코트장으로 들어서는 지혁.

그러자 짝을 맞추어 단식, 복식경기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관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늦은 시간을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그 사이 많이 변화한 모습이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지금 국내에서 테니스의 인기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상황은 만약 지혁이 원래 역사대로 차근차근 랭킹과 실력을 쌓아갔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2010년대 후반에 혜성처럼 등장한 정민이 그랜드슬램에서 4강까지 진출하고 나서도 이만한 관심을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 아니, 오빠!”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지혁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뭔가 깨달은 듯 멈칫하는 지연.

예약한 코트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지혁이 변장한 모습으로 찾아왔음에도 금방 정체를 알아차렸다.

고개를 휙휙 돌리며 주변의 반응을 살피는 게 괜히 눈치 없이 말을 내뱉었다가 팬들의 방해로 약속이 무산될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테니스를 하느라 정신이 팔렸기에 이 정도로 정체가 들통나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휴우······.”

“그 사이 프로에 데뷔했더라? WTA랭킹을 얻은 걸 축하해.”

시간이 지나도 잠잠한 상황에 지연이 안도한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자 지혁은 첫인사로 무사히 데뷔전을 치른 것을 축하해줬다.

테니스 선수에게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로 프로 대회인 서키트 예선전을 통과한 건 칭찬받아야 마땅한 업적이었다.

대학 소속의 선수들도 랭킹 포인트가 0점인 상태로 몇 년을 훌쩍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신인이 WTA포인트를 얻었으니 앞으로 국내 테니스계에서 그녀를 주목하는 기업과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물론 이건 최소한의 커트라인을 넘은 거라서 전 세계를 범위로 두면 보잘 것 없는 성적이긴 했다.

‘기왕 참가한 김에 우승을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처음부터 그게 가능한 선수는 극히 일부니까.’

서키트는 실업팀 대회처럼 국내 선수 한정이 아니라 쟁쟁한 해외 프로들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라서 데뷔하자마자 우승을 하는 건 극도로 어려웠다.

국내에서 아무리 독보적인 실력을 보여준다고 해도 세계 무대로 나가면 쭉정이가 되는 일은 너무나 허다했으니.

“데뷔전이라 긴장을 많이 했는데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오빠가 저번에 도와준 것도 큰 도움을 되었고요.”

“네가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지. 거기서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목표를 잡아봐. 너라면 투어급 선수로 성장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할 거야. 내가 보증할게.”

“아······. 정말요?”

현세대 선수들 중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지혁이 확신 어린 말을 하자 얼굴이 빠르게 환해지는 지연.

사실 그녀는 프로의 벽에 부딪치고 내심 자신의 잠재력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또래 주니어 선수들 중에 항상 선두를 달리던 그녀도 나이 제한이 없는 프로 무대에 올라서니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열심히만 한다면 다음 아시안 게임은 네가 한국 대표로 나가게 될 거야. 그러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랭킹을 최대한 올려놔. 만약 정체기가 오면 오늘처럼 내가 다시 도와줄게.”

“네!”

그렇게 지혁은 격려의 말을 이어가다가 이내 코트로 손짓을 했다.

지연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정확하게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탕!

곧이어 두 사람의 연습 경기가 시작되었다.

국내 여자 테니스 유망주들 중 손에 꼽히는 선수의 실력과 센스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종종 지도를 해줬던 닉 볼리티에리의 여자 장학생들과 거의 비슷한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자 선수에 비하면 한계가 뚜렷했다.

‘높게 잡아도 남자 실업팀 최하위권에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아직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마 지연은 국내 랭킹이 하위에 속한 남자 선수들과 붙어도 높은 확률로 패배할 것이다.

스포츠에서 남녀성별의 차이가 절대적이라는 걸 여기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드르륵. 퉁!

백핸드 쪽으로 떨어지는 스트로크를 슬라이스로 간신히 걷어내는 지연.

그 대처에 지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운 더 라인으로 공격을 되돌려줬다.

쿵!!

변명의 여지없이 깔끔하게 들어가는 위닝샷.

속도나 파워가 그다지 강한 것도 아님에도 지연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칫.”

받을 수 있는 공격을 놓쳤다고 생각했는지 혀를 차는 소리가 반대편 코트 방향에서 들려온다.

지금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의 결점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탕! 탕! 탕!

그렇게 지혁이 힘과 풋워크 속도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주길 이십여분.

연습 경기는 베이글로 종료되어 버렸다.

단순히 피지컬 차이라고 변명하기엔 세부적인 경기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하아···. 하아···.”

고작 1세트 만에 녹초가 되어버린 건지 반대편 코트에서 숨을 헐떡이는 들려왔다.

지연은 지금 상황이이해가 되지 않는 듯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물론 지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뭔가···뭔가 달라요. 마치 약점을 정확하게 공략당한 느낌이에요.”

“내가 말해주는 것보다 네가 직접 알아내는 게 나을 거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연습 경기를 하면서 맞춰 봐,”

“그러면 지금 바로 다시 해요!”

“지쳐 보이니까 5분만 휴식하고.”

“······네.”

지혁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간신히 억지를 부리려는 충동을 참아내는 지연.

단시간에 해결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가 눈앞에 닥치자 생각할 거리가 많은지 대화는 뚝 끊겼다.

“저기 봐. 학생들치고 꽤 잘하는 거 같은데? 주니어 선수들인가?”“아마 그렇겠지? 저번에 본 퓨처스 대회는 저것보다 훨씬 스트로크가 빨랐잖아. 쟤들은 서브 속도도 대략 160~170km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프로라고 하기엔 실력이 한참 부족하지.”

“그래도 선출이라 그런지 아마추어들하고 다르긴 하네.”

“실력이 뛰어난 유망주들은 기업에게 후원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유명한 얘들은 아닐 거야. 개인 코트를 놔두고 쓸데없이 여기서 훈련을 할 리 없잖아.”

공용 테니스장은 갑자기 나타난 실력자들에게 관심이 부쩍 쏠렸다.

최근 취미로 입문하는 사람이 많이 늘었어도 뛰어난 기량을 가진 플레이어는 정말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테니스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숙련 기간이 상당히 길었기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초심자의 입장에서 테니스공이 번개처럼 날아드는데 제대로 대응하는 게 가능하겠는가.

“오! 다시 시작하려나 본데?”

“이번에는 자세히 보자. 방금 전엔 띄엄띄엄 봐서 경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제대로 못 봤잖아.”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테니스를 하는 것보다 구경을 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코트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 모습에 지혁은 모자를 더욱 깊숙이 눌러썼다.

“오빠, 괜찮겠어요?”

“어. 어두워서 몰라보는 거 같아.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데 구경하라고 냅두자.”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담담하게 답하는 지혁.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 주변의 반응을 보면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물론 230km가 넘는 압도적인 서브를 보여준다면 당장이라도 정체가 알려지게 될 것이다.

아시아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선수는 지혁을 제외하면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 상황을 걱정할 필요는 단 1%도 없었다.

‘지연이 정도면 주니어 선수의 피지컬으로 이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얼굴이 노출되는 상황만 조심하면 될 거야.’

지혁은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2세트를 다시 시작했다.

당장 어렵게 잡은 약속이 파기되면 모든 손해를 보는 것은 지연이었기에 그녀도 잠자코 그 의견에 따랐다.

휙!

공이 허공으로 토스되고 부드럽게 만들어지는 지혁의 왕관 자세.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힘이 응축된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헙하고 숨을 들이켰다.

탕!

하지만 정작 결과물이 형편없자 자신들이 왜 그랬을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하는 아마추어라면 이 정도 속도의 서브는 얼마든지 칠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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