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비시즌기
“하아······.”
2세트가 끝나자마자 깊게 한숨을 내쉬는 지연.
그녀는 길지 않은 경기였지만 지혁이 노골적으로 약점을 공략한 플레이에 무언가 깨달은 게 있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제는 이걸 극복할 수 있느냐인데. 타고난 재능이 받쳐주지 않으면 시간이 꽤 많이 걸릴 거야. 베테랑인 여자 선수들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으니까.’
그래도 상위 랭커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관문이라 조금이라도 어릴 때 짚고 넘어가는 게 좋았다.
국내 실업팀 대회에서 머무르는 내수용 선수가 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다.
지연이 과거에는 대중에게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초라한 커리어를 밟았어도 이번만큼은 지혁이 있어서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
그렇게 지연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고 있을 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경기를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지혁과 지연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새 숫자가 늘어난 걸 보면 새로 온 사람들도 몇 명 섞여있는 것 같았다.
“어때?”
“선수가 확실 해. 단순히 취미로 하는 수준은 절대 아니야. 전체적인 실력을 보면 대충 고등부 중간 정도 될 것 같네.”
“주니어 랭킹이 얼마나 될까? 방금 전 경기는 제법 괜찮았는데 말이야.”
“글쎄. 네가 기대하는 것보다 별로 높진 않을 걸? 기본기가 뛰어나긴 해도 특별한 모습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으니까. 만약 우리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두 사람을 간단하게 이겼을 거야.”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친구의 말을 듣고 뭔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남자.
지혁에게 밀리지 않는 키를 가진 그는 보기만 해도 운동선수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실제 기량은 직접 시험해봐야겠지만 이 정도 피지컬이면 높은 확률로 고속 서브를 사용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야, 그건 당연하지. 고등부 선수들 중에서 우리하고 경기가 가능할 만한 녀석들이 얼마나 있다고. 눈여겨 볼만한 선수가 많아 봐야 5명 남짓이잖아. 나머지는 전부 쭉정이들이고.”
“쭉정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결국 프로에 데뷔하지 못하고 도태될 녀석들이니까.”
두 남자는 짧게나마 본 경기로 지혁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아마 숨겨진 진상을 알게 된다면 자신들의 발언에 오랫동안 이불킥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 아니 세계 최고 반열에 올라선 정상급 선수의 실력을 주제도 모르고 낮잡아봤으니 말이다.
지혁의 서브, 스트로크, 풋워크, 훈련, 전략 등 모든 부분이 전 세계 유망주들에게 교본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안목은 정말 형편 없었다.
그러니 국내 대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 것이겠지만.
“심심한데 쟤들하고 경기하자고 해볼까? 매번 우리끼리 훈련을 하느라 지루했잖아.”
짓궂은 표정으로 친구에게 제안을 하는 남자.
장난기가 담긴 반응을 보면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모양이다.
“또, 또 나쁜 버릇 나왔네. 주니어 선수를 괴롭혀서 뭐가 이득이라고 그래? 어차피 기량 차이 때문에 재미없을 거야. 그러니까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 멋대로 행동하다가 나중에 이상한 소문 퍼진다?”
“아니, 그냥 기분전환 삼아 하는 거지. 게다가 재들한테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이래 봬도 내가 ATP랭킹이 있는 현역 프로잖아. 아마 랭킹을 말해주면 감지덕지하며 받아들일 걸? 어쩌면 우리 이름을 알지도 모르고.”
“후······. 나는 개입하지 않을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
친구는 이럴 때 말려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남자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패배의 쓴 맛을 보게 될 상대가 내심 안쓰러웠지만 월등히 뛰어난 선수에게 패배하는 것도 나름 괜찮은 경험이 될 것이다.
솔직히 기분이 나빠서 그렇지 프로와 경기를 하는 건 꽤 많은 돈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찬스였다.
저벅저벅
그렇게 결정이 나자 남자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지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지금이 저녁 시간인 만큼 목표물이 여기서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
잠시 후, 코트를 직선으로 가로질러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한 지혁.
낯선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히 모르는 사람이었다.
‘설마 정체를 들킨 건가?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만약 불길한 예상이 맞다면 허둥지둥 공용 테니스장을 떠나야 될 것이다.
탁 트인 장소에서 정체를 들키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너무나 뻔했으니 말이다.
“안녕? 경기하는 거 잘 봤어. 너희들 고등부 선수 맞지?“”······?”
예상하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을 듣게 되자 의문이 담긴 얼굴을 하는 지혁.
하지만 이내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되자 그는 삐뚤어진 모자를 고쳐 썼다.
웬만하면 얼굴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와서 미안해. 너희들이 경기를 하는 걸 보고 승부욕이 생겨서 말이야. 나도 대명대학교 테니스 선수거든.”
남자의 입에서 대명이라는 나오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구경꾼들은 화들짝 놀란 눈빛을 보냈다.
대명대학교는 한국 테니스에 관심이 있는 팬이라면 모를 수 없는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입학했다는 것만으로 고등학생 시절 국내 랭킹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갔다는 의미였으니 자세한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대명대학교의 간판은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대명대 선수라고? 그러면 프로나 다름 없잖아. 설마 ATP랭킹까지 있는 건 아니겠지?”
“거기가 그렇게 유명해? 학부가 나름 괜찮긴 해도 테니스로 유명한 줄은 몰랐는데.”
“국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곳이야. 유명한 선수들을 줄줄이 배출했거든. 레전드 이형석이랑
김태석 알지? 두 선수가 이 학교에서 졸업했어.”
이형석의 이름이 나오자 우와! 하고 감탄하는 사람들.
남자는 주변의 떠들썩한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어깨를 약간 으쓱했다.
“그래서 나랑 경기를 한 번 해볼래? 지도식으로 해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하하하. 잠시만요. 일행의 의견도 물어봐야 해서요.”
지혁은 이 상황이 재밌는지 웃는 표정으로 양해를 구하고 지연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의아하다는 시선이 쏟아졌다.
“저쪽에서 경기 제안을 했는데 어떻게 할까? 네가 싫다고 하면 거절할게.”
“오빠가 편한 대로 하셔도 돼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거든요.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해요.”
흔쾌히 허락이 떨어지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공짜로 좋은 구경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아마 이번 경기의 주인공이 지혁인 걸 알게 된다면 기절할 것이다.
“그럼 잘 보고 있어. 기왕 하는 김에 너한테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네?”
“경기가 시작하면 금방 알게 될 거야.”
***
경기는 너무나 순조롭게 준비가 되었다.
서로 워밍업을 충분히 해둔 상태라서 시간이 지체될 장애물도 전혀 없었다.
그렇게 각자의 베이스라인에 도착하자 반대편 코트 쪽에서 고개를 끄덕하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경기를 시작하라는 제스쳐였다.
지혁은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첫 포인트를 시작했다.
탕!
서비스 코트 위에 정확하게 떨어지는 170km 언저리의 서브.
코스가 제법 날카로웠지만 고등부에서도 약간 애매한 속도 탓인지 리턴은 간단하게 되돌아왔다.
남자의 표정을 보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평균 이하의 위력에 프로가 위협을 느낄 리 없었다.
탕! 탕! 탕! 쿵!
[피프틴 러브.]
“와. 운도 좋지. 저게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네.”
사이드라인을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백핸드 위닝샷이 들어가자 사람들은 그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서티 러브.]
[포티 러브.]
[게임 리 1-0.]
“어···어!”
하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서비스게임이 끝나버리자 주변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기함성이 쏟아졌다.
차라리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렀으면 납득이라도 하겠는데 경기 내용은 그런 것과 완전히 달랐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시작이라서 봐준 건가?
“그냥 툭툭 치더니 끝나버렸어. 대명대 선수라고 자랑하더니 실수를 왜 이렇게 많이 하는 거야.”
“느린 스트로크도 못 받아 내는데 혹시 가짜 아니야? 프로가 고작 저런 거에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리 없잖아.”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실책에 사람들의 분위기는 약간 묘하게 변했다.
상대 선수도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직도 자신의 패착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모든 전력을 투사해도 승산이 거의 없는데 그런 짓까지 했으니 결과가 좋을 수가 없었다.
‘ATP 랭킹이 있다고 하더니 이 정도 수준이면 아무리 높아봤자 800등이겠네. 고등부와 대학에 소속된 선수들 사이에서 인정받을지 모르지만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지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번뜩이는 센스도 없고 무난한 정석만 반복되니 기울어진 상황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가는 게 이상했다.
그렇게 경기는 중반까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쿵!
[게임 리 4-0.]
“”······.“”
마치 지연과 대결했던 경기와 오버랩되는 광경에 적막해지는 테니스장.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어렴풋이 비밀을 알아차린 건지 풀어진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눈은 지혁의 플레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산이었어.”
“맞아. 분명 선수가 바뀌었는데도 변한 것 없이 똑같은 느낌이야. 이런 기괴한 상황이 나오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겠지······.”
경기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능력과 신기에 달한 라켓 컨트롤.
그 압도적인 실력이 바탕이 되어야 지금 같은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다.
“어디서 저런 유망주가 나온 거지? 엄청난 실력이야. 주니어 선수들 중에 저런 애가 있었나?”
사람들은 열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지혁을 자세히 살폈다.
확신이 가득 담긴 표정을 보면 은은하게 드러나던 천재성을 마침내 알아챈 것 같았다.
“피지컬에 비해 서브나 스트로크가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거였어. 상대 실력에 맞춰 설렁설렁하고도 이런 퍼포먼스라니. 대체 잠재력이 얼마나 대단하다는 걸까.”
“이러다가 한국에 이지혁 같은 천재가 한 명 더 나오는 거 아니야? 난 저런 천재를 보는 건 처음이야.”
술렁이는 목소리는 도저히 진정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크윽.”
경기가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서 돌아가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대명대 선수.
벌써부터 과부하에 걸릴 리 없으니 심리적인 충격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몇 살이나 어린 상대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자존심이 바닥부터 무너질 법도 했다.
같이 동행한 친구조차 경기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