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S증권 슈퍼 매치
S증권 슈퍼 매치가 시작되는 당일.
잠실 실내체육관의 관중석은 아직 선수들이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팬들로 인해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찼다.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이 되었다고 하더니 정말 이번 경기가 받고 있는 관심이 큰 모양이다.
“허······. 이게 이지혁의 영향력인가? 3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네. 그때는 빈자리가 훨씬 더 많아서 관전하는 우리가 민망할 정도였는데······.”
“H카드에서 주최한 대회를 말하는 거구나. 아마 페더러와 샘프라스가 초청됐었지?”
“맞아. 신, 구 황제들의 대결이라 엄청 재밌게 봤었잖아.”
“시간이 진짜 빠르긴 하네. 빅3의 시대를 대체할 유망주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그것도 제대로 된 탑랭커를 배출한 적이 없는 한국에서 말이야.”
그의 말대로 전문가들과 테니스 팬들은 레전드 선수로 추앙받는 이형석이 은퇴하고 나면 적어도 4~5년은 그랜드슬램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예측했었다.
아무래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만한 가능성을 보여주던 유망주가 한국에 없었기 때문이다.
매번 주니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얻더라도 성인만 되면 귀신같이 몰락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2년 전 테니스계의 전망은 상당히 암울했었다.
물론 그런 상황도 혜성처럼 등장한 지혁으로 인해 완벽하게 반전되었지만 말이다.
“이지혁이 한국에서 경기를 하는 게 얼마만이지? 거의 1년이 넘은 거 아닌가?”
“아마 그럴 거야. 작년에 부산 챌린저, 서울 챌린저를 끝으로 국내 대회 참가를 중단했으니까.”
“2년 차에 ATP랭킹 6위라···. 앞으로 ATP250 이상의 대회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지혁의 공식 경기를 보는 건 힘들겠네. 나는 저 괴물 같은 녀석이 100등밖으로 밀려나는 모습이 전혀 상상이 안 돼.”
“그래도 최근 테니스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서 오늘 같은 이벤트 매치가 자주 열릴 거야. 대기업들이 이지혁 같은 대형 광고판을 가만히 냅두겠어? 20~30위대의 니시코리조차도 엄청 바쁘게 움직이는데?”
“정말 네 말처럼 되면 좋겠네. 솔직히 해외로 나가서 대회를 보는 건 너무 부담되거든.”
와아아아아!
그때 실내체육관 바깥에서 거대한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찢어지는 비명이 드문드문 섞여서 들리는 것을 보면 누가 등장했는지 너무나 뻔했다.
아무리 페더러의 세계적인 인지도가 훨씬 더 높다고 해도 이번 대회가 주최되는 국가는 한국이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왔다! 과연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한 선수의 실력은 얼마나 대단할까? 제발 짧게라도 제대로 플레이해줬으면 좋겠네.”“몇 게임 정도는 본래 실력을 발휘하겠지. 자국 팬들이 만 명이 넘게 몰린 상황에서 그냥 넘어가겠어?”
“그럼 다행이고. 후···. 빨리 시작해라.”
그렇게 두 사람은 경기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올드 팬들에게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부딪치는 광경을 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지혁 선수, 어제 말했듯이 오늘 경기는 쉬엄쉬엄해도 됩니다. 어차피 S증권 측에서도 비시즌기인 걸 이해한다고 말했거든요.”
매니지먼트 직원은 잠실 실내체육관 내부로 지혁과 동행하면서 전달 사항을 알려주었다.
이미 계약을 할 때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어차피 슈퍼 매치에서 승리를 해도 얻을 수 있는 유형의 보상이 아무것도 없는데 쓸데없이 체력을 낭비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보통 이런 이벤트는 구색을 맞춰가며 적당한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면 되었다.
“상황을 봐가면서 적당히 할게요. 그나저나 페더러가 슈퍼 매치를 흔쾌히 승낙을 한 건 의외네요. 분명 비시즌기에 찾는 기업들이 많았을 텐데요. S증권이 그를 섭외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겠어요.”
“아뇨. 생각하시는 것보다 간단했다고 들었습니다.”
“······?”
예상과 다른 답변이 듣자마자 의아한 얼굴로 옆을 바라보는 지혁.
매니지먼트 직원은 그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줬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모양이다.
“페더러 측이 이지혁 선수를 상대로 섭외했다는 소식을 듣고 계약을 일사천리로 진행했어요. 그 덕분에 까다로운 조건을 각오하고 있던 S증권의 입장에서 걱정을 크게 덜었던 일이었죠.”
“아.”
지혁은 마침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했다.
‘롤랑 가로스의 준결승을 아직도 의식하고 있었구나.’
경기가 끝날을 때 워낙 대범하게 행동을 해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이러면 이번 슈퍼 매치의 분위기가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준비를 철저하게 해왔을 테니.
“훗. 재밌겠네요. 적어도 싱거운 경기를 하진 않겠어요.”
무려 6개월 만에 정상급 선수와 진심으로 부딪칠 수 있다는 생각에 잔잔한 미소를 짓는 지혁.
그렇게 조금 더 걷자 마침내 경기장의 입구가 눈에 보였다.
여기부터는 선수 혼자 입장해야 되는 곳이라 다른 사람들과 동행을 할 수 없었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저벅저벅.
기대감이 행동에 영향을 준 것일까.
지혁은 이전보다 빠른 걸음으로 코트가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와아아아아!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쏟아지는 거대한 함성.
1만 석에 가까운 관중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인 터라 어느 대회에 참가했을 때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손을 흔들어 주며 경기장 중앙에 서자 지혁의 실물을 처음 본 팬들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시선을 던져왔다.
“와. 저게 이지혁이지? 진짜 엄청 잘생겼구나···. TV보다 훨씬 나은데?”
“키도 엄청 커. 188cm라고 하던데 테니스 선수가 아니라 모델이 들어오는 줄 알았어.”
“어쩐지 스포츠 경기치고 여자 관중들이 많더라니. 그 이유가 있었네. 내가 여자라도 이지혁을 보게 되면 팬이 되겠어.”
팬들은 지혁의 외모가 기대 이상으로 출중하자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감탄했다.
어지간한 배우를 씹어먹는 외관과 운동선수 특유의 피지컬이 합쳐지자 매력적인 아우라가 저절로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트와 거리가 가까운 관중석에 앉아있는 여성 팬들의 반응이 꽤나 볼만했다.
마치 지혁의 얼굴이 뚫어질 것처럼 뜨거운 눈길을 주었으니 말이다.
툭!
잠시 후, 코트 옆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는 지혁.
‘페더러가 도착하려면 조금 기다려야 될 것 같네. 그동안 어플이나 확인하고 있으면 되겠지.’
[이지혁]
근력: 80▲ 민첩: 80▲ 체력: 77▲ 신장: 188cm▲
서브(A), 포핸드(A+), 백핸드(A+), 풋워크(A), 외모(A-), 트릭샷(A-), 찰나(A)
[41,212포인트]
“음······.”
‘지금 같은 추세라면 내년 호주 오픈까지 목표치를 달성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어.’
일본에서 촬영한 방송과 오늘 하는 슈퍼 매치,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여러 활동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포인트가 남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지혁이 벤치에 앉아서 이후의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페더러가 약속 시간을 정확히 맞춰서 경기장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짓는 것이 지혁을 오랜만에 만났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나 보다.
“리, 반년 만이네. 부상은 나았어?”
“네. 걱정해준 덕분에요. 아마 다음 시즌의 호주 오픈은 무조건 참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보다 윔블던하고 얼마 전의 US오픈은 정말 잘 봤어요.”
“글쎄. 나는 작년에 비해 별로 만족스럽지 않더라고. 우승도 모조리 내주었고 말이야.”
“확실히 나달이 이번 시즌에 엄청 잘하긴 했죠. 무릎 부상을 회복하고 나서부터 뭔가 심상치 않더라니 후반기 그랜드슬램에서 두 번 모두 우승할 줄 누가 알겠어요.”
“나달이 마스터즈를 전부 스윕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정도 예상했었잖아. 그래도 네가 시즌 아웃을 당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겠어?”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 덕분에 큰 교훈을 얻었어요. 이제 두 번 다시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려고요.”
“그래. 네 실력이라면 그랜드슬램 트로피를 한 번 들어 올리는데 집착할 필요가 없지. 앞으로도 기회가 많을 테니까. 그걸 빨리 깨달아서 다행이야.”
자신과 나달도 큰 부상을 겪고 나서 생각을 고쳐 먹었다고 말하는 페더러.
활동량이 무지막지한 테니스의 종목 특성상 프로 선수들은 항상 자잘한 부상을 달고 사는 게 일반적이었다.
거기다 20개가 넘는 메이저 대회들이 전세계에서 1년 내내 개최되어서 시즌 도중에 부상을 회복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탑랭커들이 묵묵히 경기를 뛰는 건 그저 더 높은 랭킹과 타이틀을 위해 억지로 견뎌낸 것뿐이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테니스의 선수 수명이 짧은 거겠지.
“저기···이지혁 선수. 이제 시간이···.”
지혁이 오랜만에 재회한 페더러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시계를 계속 확인하던 진행 요원이 다가와서 시간을 알렸다.
아무래도 오늘 슈퍼 매치가 방송으로 중계되어서 진행이 어긋나는 것에 각별히 민감한 모양이다.
“슬슬 시작해야 되겠네요. 저희도 코트 안으로 들어가죠.”
“좋지. 그동안 얼마나 실력이 상승했는지 궁금한 걸. 리, 너라면 가만히 정체되어 있지 않았겠지?”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지혁.
페더러는 그 모습에 역시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
S증권이 기획한 슈퍼 매치는 짤막한 랠리가 끝나고 마침내 시작되었다.
“서비스게임을 먼저 가져간 건 이지혁인가. 출발이 좋네.”
“저번 롤랑보다 서브 속도가 많이 오른 걸로 아는데 과연 빅3에게 얼마나 먹힐까? 니시코리한테는 엄청난 효과를 보여줬잖아.”
“확실히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 재미를 보긴 했지.”
지혁은 사람들의 기대를 잔뜩 받으면서 공을 허공으로 토스했다.
유려한 궤적을 그리는 그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쾅!!
서브의 속도가 일반인의 동체시력으로 쫓기에 너무 빠른 탓일까.
임팩트 이후에 공의 행방을 놓친 사람들이 꽤 많이 속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더러는 타고난 반사신경을 이용해 에이스를 무난하게 막아냈다.
240km 이상의 속도를 뽑아내는 앤디 로딕의 전성기를 경험한 빅3라서 가능한 대처였다.
‘역시 간단하지 않구나. 평범한 선수들과 완전히 달라.’
비록 에이스를 얻지 못했지만 실망할 일은 아니다.
단순히 서브 하나만으로 페더러를 이기는 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정상급 선수들의 자리는 전부 빅 서버들이 차지했을 테니 말이다.
현재 메이저 대회의 우승자들이 대부분 베이스라이너인 걸 생각하면 결국 승리는 스트로크에 달려있었다.
아무리 서비스게임을 잘 지켜내도 정작 브레이크를 따내지 못하면 모두 허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