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S증권 슈퍼 매치
지혁이 고속 서브를 반대편 코트에 때려 넣고 있을 때.
관중석 앞자리에서는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며칠 전에 만났던 지연과 금화고의 테니스 특기생들이 멍하니 입을 벌리며 관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쾅!!
[게임 리 1-0.]
첫 번째 서비스게임을 에이스로 무사히 지켜낸 지혁.
초반부터 포티 서티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 탓에 관중들은 이제야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님, 이게 말로만 듣던 이지혁 선배님의 진짜 실력인가요? 학교에서 연습 경기를 할 때와 느낌이 너무 다른데요······.”
“맞아요! 저도 귀가 따가울 정도로 대단하다고 듣긴 했어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정말 사람이 맞는지 궁금할 지경이에요. 저 사람이 아직도 18살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선배님은 입학할 때부터 천재였어요?”
테니스부 학생들은 코트를 교체하는 동안 잠깐의 여유가 생기자 박철웅 감독을 재촉하며 질문을 빠르게 쏟아냈다.
옆자리에 다른 선배들도 있었지만 지혁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누가 뭐래도 그였기 때문이다.
“그때도 다른 학생들하고 다르긴 했어. 처음 출전하는 전국 대회에서 주니어 랭킹 1, 2위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이겨버렸으니까. 당시에 포스트 이형석이 나타났다고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몰라. 1학년이 3학년을 베이글 세트로 전부 박살 내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거든.”
“작년의 1, 2위라면 실업팀에 입단한 프로들을 말씀하시는 거죠? 와······. 이러니까 더 확실하게 체감이 되네요. 그분들이 후반기 대회의 모든 상을 휩쓸었잖아요.”
“역시 평범한 선수들하고 재능부터 달랐나 봐요. 애초에 저희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말이에요.”
학생들은 지혁에 대해 더 알아갈수록 놀라운 이야기만 나오자 감탄을 하며 찬양의 말을 늘어 놓았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갑자기 1학년 중 한 명이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장 실력이 뛰어나지만 평소에도 4차원 같은 모습을 보여줬던 학생이었다.
“지혁 선배님은 분명 3~4년 전에 비교적 평범한 선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 실력의 원천이 뭘까요? 물론 그때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망주긴 했어도 지금처럼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라 평가받진 않았잖아요.”
“3년 전이라고? 그때 지혁이가 어땠는데?”
“중학생 시절의 이지혁이라······. 재밌겠는 걸 빨리 말해 봐.”
지혁의 유년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잠자코 있던 선배들까지 대화에 하나, 둘씩 끼어들었다.
워낙 화제가 흥미로운 탓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보다 2학년 선배들이 더 잘 아실 거예요. 저는 나이가 달라서 직접 붙어본 적이 없거든요.”
충분히 납득할만한 대답이 돌아오자 모두의 시선은 2학년들에게 돌아갔다.
그 말대로 라이벌로 싸웠던 산 증인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을 추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기대하는 눈빛과 무언의 압박이 지속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이 돌아왔다.
“음······. 우리들과 비슷한 수준이긴 했지. 솔직히 신우랑 재영이가 지혁이를 꺾고 중등부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일도 많았으니까.”
“실제로 그 녀석이 금화고에 1등으로 입학하지 못했지? 다시 생각해보면 진짜 신기하긴 하네. 비시즌기와 방학을 합쳐서 5개월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는 뜻이니까.”
2학년들은 지혁과 같은 대회에서 뛴 경험이 있는 터라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량이 엄청나게 상승한 원인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다.
테니스에 모든 인생을 걸고 있는 그들이 몇 번이나 추궁했지만 항상 원론적인 답변만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냉정하게 따졌을 때, 선천적인 재능과 노력을 제외하면 특별한 비결이 없긴 했다.
그들도 10년이 넘도록 테니스에 매진하면서 결국 왕도밖에 답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지혁 선배님이 저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계기를 통해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거네요. 그러면 유년기부터 압도적인 실력을 발휘한 건 아니니 저희도 선배님처럼 그랜드슬램에 참가할 수 있는 탑랭커가 될 수 있겠죠?”“······목표가 너무 높은 게 아닐까. 국내 프로 랭킹 2위가 아직도 300위에 불과한데 말이야.”
“네가 퓨처스에 한 번이라도 참가해봤다면 그런 소리를 못할 걸. 100~200위대의 해외 선수들도 무시무시한 괴물이거든. 쟤가 가볍게 이겼다고 무시할 수 있는 선수들이 절대 아니야. 그 선수들도 대부분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천재들이라고.”
1학년들은 지혁의 사례를 듣고 자신의 잠재력에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나이가 많을수록 그런 경향이 줄어들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해도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10년, 20년 만에 한 번씩 나와야 천재라고 불리지 밥먹듯이 탑랭커를 배출했다면 한국은 진작에 테니스 강국이 되어있어야 정상이었다.
과거 최악의 인프라에서 레전드 이형석이 나타났듯이 이번에도 그저 몇백만 분의 1의 확률로 생기는 돌연변이 케이스에 불과할 것이다.
명성이 자자한 전문가들도 비슷한 의견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S증권이 주최한 슈퍼 매치가 선수들의 승패보다 팬 서비스의 성격이 더욱 커서일까.
지혁과 페더러는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전략을 고집하지 않고 경기를 지속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화려한 기술들을 아끼지 않고 쏟아냈던 것이다.
탕!
베이스라인 끝에 떨어지는 스트로크를 다리 사이로 받아내는 페더러.
지혁은 묘기와도 같은 그 트릭샷을 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비슷한 수법으로 되돌려줬다.
탕!
시간차 공격을 하기 위해 등 뒤에서 임팩트되는 포핸드.
두 사람이 마치 장난을 치듯 랠리를 이어갔지만 놀랍게도 타구의 위력은 어지간한 탑랭커들이 전력을 다한 것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실제로 관중석에 앉아있던 국내 프로들은 불안정한 자세로 스윙을 했음에도 본인들보다 샷이 훨씬 강력하게 날아가자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저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아무리 세계 무대를 제패한 선수들이라고 해도 너무하잖아.”
“라켓을 무슨 자기 몸처럼 다루네. 방금 이지혁이 친 백핸드 봤어? 사이드라인 위를 아슬아슬하게 때렸는데 저것도 의도한 거겠지?”
“비슷한 코스로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까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평범한 재능으로 흉내 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테크닉의 향연이 계속 이어지자 프로들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일반인 관중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테니스 경기를 경험하는 사람들조차 테니스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경기를 하는 지혁과 페더러가 둘째라고 하면 서러울 정도로 최고의 테크니션인 덕분이었다.
탕!! 탕!! 탕!!
이제 창의적인 랠리보다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은 것일까.
선수들의 스트로크 파워는 점차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여유를 남겨둔 것과 상반된 상황에 프로들과 안목이 있는 팬들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물들어갔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전력을 다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앗!”
커다란 기합을 내지르며 양손 백핸드를 쳐내는 지혁.
레이저처럼 일직선으로 쏘아진 스트로크가 네트를 몇 cm 차이로 넘어가자 프로들은 이번 포인트는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페더러는 귀신같은 대처로 공을 걷어냈다.
전매특허인 슬라이스를 이용해 완벽하게 공세를 저지한 것이다.
‘쯧. 여전하구나.’
이 반격 때문에 얼마나 골치를 썩였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보통 그랜드슬램에 참가할 수 있는 선수들에게 슬라이스는 반격을 당하기 딱 좋은 기술이었지만 유독 페더러만큼은 예외였다.
초강력 스트로크를 되돌려주면서도 치명적인 코스로 샷을 떨어트리고 있으니 위닝샷을 칠만한 기회를 도통 잡을 수 없었다.
드르륵. 퉁! 드르륵. 퉁!
연신 공격 일변도로 나가는 지혁과 언제 점수를 내주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위태한 수비를 이어가는 페더더.
숨통이 조이는 그 광경에 사람들은 호흡조차 까먹은 채 코트 위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 장면은 두 선수가 아니라면 절대 재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어서였다.
랠리의 횟수가 15구가 훌쩍 넘어갔을 때, 마침내 팽팽하던 균형이 어긋나는 장면이 나왔다.
모든 대결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처럼 마침내 페더러가 승리의 열쇠를 거머쥔 것이다.
[게임 페더러 3-4.]
쿵!! 하는 굉음과 함께 7게임의 승부를 마무리하는 페더러의 포핸드 위너.
현역 프로들 중 최강이라 평가받는 100점짜리 포핸드가 성공적으로 포인트를 따내자 관중들은 식은땀에 젖은 모습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인간의 한계까지 단련된 두 선수의 실력에 진정으로 감탄했기 때문이다.
“축구나 야구보다 훨씬 재밌잖아. 비싼 티켓값이 전혀 아깝지 않네. 앞으로 국내에서 하는 대회들도 찾아봐야겠어. 개인 스포츠라서 그런지 경기의 긴장감이 장난이 아니야.”
“상대 선수 이름이 로저 페더러라고 했지? 별명이 황제라고 하더니 진짜 대단하잖아?”“그랜드슬램은 이런 식으로 4~5시간 경기를 한다는 거지? 테니스는 진짜 초인들만 하는 스포츠였구나. 저 정도로 격렬하게 움직이면 체력이 좋은 사람들도 1, 2시간 안에 탈진하는 게 정상일 텐데 말이야.”
“테니스 선수들이 다른 스포츠 선수들에 비해 괜히 슬림한 게 아니었네. 무식하게 근육만 많으면 금방 나가떨어지겠어.”
관중들이 잔뜩 흥분한 어조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정작 지혁은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경기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피지컬이 상승해서 유리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 이런 상황이 나온 거지?’
분명 조건만 따져보면 경기를 압도하는 건 지혁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정작 현실은 반대로 나왔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직접 머리를 부딪치며 확인하는 수밖에.
지혁은 마음속으로 출혈을 각오하며 다음 게임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순수한 실력으로 승산이 부족해도 아껴둔 수단들을 동원하면 언제든 반전을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다.
[레디.]
잠시 후, 체어 엠파이어의 신호로 코트 위로 다시 올라가는 선수들.
페더러는 휴식을 하는 동안 지혁의 분위기가 변했다고 느낀 건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좋지 않은 징조에 간담이 서늘했지만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려면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