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호주 오픈
[게임 세트. 매치 페더러 6-4, 7-5.]
결국 S증권이 주최한 슈퍼 매치는 페더러의 압승으로 결론이 났다.
지혁이 2세트 후반에 나름대로 활약을 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판을 되돌리긴 힘들었던 것이다.
이건 경기 마지막 부분에서 적당한 수준으로 경기를 유지한 영향이 컸다.
굳이 출혈을 감수하며 3세트까지 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페더러의 기량은 이미 충분할 만큼 파악했다.
짝짝짝짝짝.
커다란 박수 세례를 받으며 네트 앞으로 걸어가는 두 선수.
비록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지만 오늘 경기는 그저 이벤트성에 불과한 터라 지혁과 페더러의 분위기는 그리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좋은 경기였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멀리까지 온 보람이 있던 걸.”
페더러는 경기가 꽤나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이 모습을 보면 시간을 내어 한국에 방문한 목적을 이룬 모양이다.
“후···.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더 힘드네요. 오늘 경기도 압도당했으니 말이에요. 반년 넘게 실전을 치르지 못한 게 치명적이었던 것 같아요.”
“확실히 이전에 비해 날카로운 느낌이 줄어들긴 했지. 그래도 금방 원래 실력으로 돌아올 자신이 있잖아?”
“물론 그렇지만 호주 오픈이 얼마 남지 않아서요.”
지혁은 길었던 공백의 대가를 그랜드슬램에서 지불할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지금 상태에서 상위 랭커들을 만났을 때 어떤 고초를 겪을지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아마 1월 초에 열리는 ATP250 정도면 충분할 거야. 전초전을 치르기 위해 참가하는 탑랭커들이 꽤 많으니까 실전 감각을 회복하는 용도로 딱이네.”
“상금이나 규모는 작지만 몸풀기로는 괜찮겠네요. 페더러는 이번에도 도하 오픈에 나가는 거죠?”“그래. 나달도 마찬가지야.”
“저는 브리즈번 오픈이 낫겠네요. 본 경기는 호주 오픈에서 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두 사람이 이후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진행자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코트 쪽으로 다가왔다.
만 명에 달하는 관중들을 뒤에 두고 언제까지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에 자연스레 대화도 중단되었다.
어차피 슈퍼 매치는 단순히 경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곳 말고도 다른 장소로 같이 이동하게 될 거라 거기서 남은 대화를 이어가면 될 것이다.
***
페더러와의 슈퍼 매치가 종료되고 비시즌기의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아무래도 지혁이 활발하게 외부 활동을 하며 부지런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1월 초에 브리즈번 오픈에 참가하는 등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지만 그 덕분에 수확은 아주 쏠쏠했다.
작년에 비해 크게 늘어난 재산뿐만이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어플의 포인트를 목표치까지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시작되는구나. 그런데 호주 오픈은 엄청 오랜만에 참가하는 기분이네. 1년 전에 이곳에서 메이저 대회에 데뷔했는데.”
첫 출전에서 4강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얻어서 당시 상당한 이슈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그것조차도 롤랑 가로스 우승을 하고 난 이후의 반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준비는 완벽해. 만전의 상태에서 빅3와 다시 붙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
ATP250급 대회인 브리즈번 오픈은 어떻게든 우승을 차지했지만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가 도하 오픈에 참가한 터라 테니스 팬들 사이에서 전반적인 의견은 무혈입성을 했다는 평이 주류였다.
애초에 지혁을 제외하고 상위 탑시드를 받은 선수들이 5, 8, 9, 16, 20위밖에 되지 않아서 위협적인 상대가 되긴 힘들었다.
[이지혁]
근력: 80▲ 민첩: 80▲ 체력: 80▲ 신장: 188cm▲
서브(A), 포핸드(A+), 백핸드(A+), 풋워크(A), 외모(A-), 트릭샷(A-), 찰나(A)
[15,321포인트]
“3, 4라운드 쯤에서 서브가 A+로 상승하겠구나. 원래 한참 전에 도달했어야 할 등급인데······.”
워낙 사건이 많이 일어나서 시기가 상당히 미루어졌다.
그래도 앞으로 부상만 당하지 않으면 이번처럼 성장에 정체가 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현재 기량을 냉정하게 따져보면 오히려 가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
“남은 시간 동안 준비한 전략이나 점검하고 있자. 결국 마지막 라운드까지 진출하는 멤버는 정해져 있으니까.”
언제나 그랬듯이 준결승전과 결승전은 빅3와 앤디 머레이급 선수들이 올라올 것이다.
지혁은 랭킹이 낮은 상대들에게 시간을 투자하면서 신경을 분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도 간단하게 승리할 수 있는데 굳이 심력을 소모하는 건 낭비였다.
그럴 바엔 차라리 페더러나 나달의 경기를 분석하는 게 훨씬 나았다.
***
며칠 후, 호주 오픈의 예선전이 모두 끝나자 드디어 본선 경기가 시작됐다.
지혁은 1라운드를 치르기 위해서 경기장에서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웅성웅성.
그 와중에 관중석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7개월 만에 복귀한 천재에 대해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와! 빈자리가 하나도 없네. 보통 첫 라운드는 좌석이 남지 않아?”“내가 티켓을 구해줘서 모르는구나. 이번 경기를 예매하는데 경쟁률이 얼마나 치열했는데. 골든 보이의 인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거야. 오늘은 리의 복귀전이잖아.”
“하긴 상대 선수를 보고 온 건 아닐 테니 네 말이 맞겠네. 랭킹 93위는 그랜드슬램에서 가장 아래에 속하니까.”
“무엇보다 이번 1라운드는 주목할만한 관전 포인트가 많아. 만약 골든 보이가 부상을 완전히 회복해서 돌아왔다면 작년 윔블던이나 US오픈보다 변수가 훨씬 많이 늘어날 거야.”
“설마 작년에 나달하고 했던 명경기를 다시 볼 수 있는 건가.”
“결승까지 올라가게 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롤랑의 결승전이 다시 재연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어느 관중은 잔뜩 기대한 표정을 지은 채 코트 위로 시선을 보냈다.
비록 지혁이 커다란 부상을 당한 경기였지만 내용 자체는 정말 엄청났기 때문이다.
최근 그랜드슬램들 중 최고의 명경기로 꼽혔으니 이건 그들만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탕! 탕!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장에서는 랠리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선수들이 본 경기에 들어가기 전 간단하게 점검을 시작한 것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곧이어 체어 엠파이어가 경기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주자 지혁은 공을 넘겨받고 베이스라인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서브를 넣을 위치를 점검하고 있으니 상대 선수의 긴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표정이 어둡고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모양이다.
이길 확률이 한 자리 숫자에 가까우니 의욕이 생기지 않을 법도 했다.
패배가 확정된 싸움을 누가 하고 싶겠는가.
그랜드슬램에서 특정한 사유 없이 기권을 하는 게 금지된 게 아니었더라면 지혁은 진작에 기권을 받아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쾅!!
[게임 세트. 매치 리. 6-2, 6-0, 6-0]
경기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3-0으로 끝났다.
그 압도적인 결과에 관중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토록 원했던 골든 보이의 귀환이 완벽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느끼기에 작년보다 실력이 더 상승한 것처럼 느껴졌다.
전광판에 찍혀있는 230km의 숫자가 그 증거였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잖아! 작년보다 더 대단한 실력이야!”
“4강까지 올라갔을 때 볼만하겠는데 이번에도 이변이 일어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나달하고 붙으면 어떻게 될까?”
“나달? 아무리 그래도 그는 힘들지. 작년 한 해는 그가 완벽하게 지배했잖아. 윔블던, US오픈이랑 마스터즈도 전부 우승을 했었고. 만약 롤랑이 아니었다면 3관왕을 달성했을 거야.”
“아니, 클레이 코트에서도 기적을 만들어냈는데 하드 코트에서 못하겠어? 그 당시와 비교하면 오히려 지금 조건이 더 좋아.”
아직 1라운드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나달과의 대결을 주제로 갑론을박하는 관중들.
지혁은 고작 1경기를 한 것뿐이지만 테니스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력한 우승 후보로 떠올랐다.
***
1라운드 경기를 하고 다음날.
지혁은 무슨 이유에서 인지 대진표를 보며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주 오픈에서 진짜 만나게 될 줄 몰랐는데······.”
확률이 2%도 되지 않아서 내심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지만 말이다.
“데이비드 해리슨. 닉 볼리티에리의 수석을 호주 오픈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두 달 만의 재회인가. 1라운드를 통과하다니 제법인 걸.”
전문가들이 사전 평가를 했을 때 승률이 20%도 되지 않았으니 데이비드도 자신의 행운에 크게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선수가 그랜드슬램 2라운드에 진출하는 일은 꽤나 대사건이었다.
“아카데미는 난리가 났겠구나······.”
자신들하고 수업을 듣던 녀석이 메이저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으니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을지 뻔했다.
매번 수석을 차지하던 데이비드의 실력이 탑랭커들에게도 먹힌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겠지.
자신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고 더 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테니 이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선배로서 어떤 교훈을 줘야 할까.”
만약 관계가 없는 선수였다면 처참하게 눌러버리면 끝날 일이었다.하지만 제법 친분이 있는데다가 데이비드의 재능도 최상에 들어가는 편이라 꽤 신경이 쓰였다.
지혁은 오래 지나지 않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역시 미래를 생각하면 이 방법이 가장 좋겠지.”
데이비드는 빅3급 선수들의 전력을 경험해본 적이 없을 테니 이번 기회에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가혹하게 느껴져도 앞으로 상위 랭킹으로 올라올수록 괴물들이 즐비한 터라 미리 예방주사를 맞아 놓는 게 나았다.
그 과정에서 예상보다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도 휴식일이 넉넉하게 남아 있으니 다음 라운드에 큰 영향을 끼치진 않을 거다.
“얼마나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아카데미에서 보여줬던 실력 그대로라면 재미가 없을 텐데. 그래도 연습과 실전은 엄청 차이가 크니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겠지.
지혁은 미래에 미국을 대표하는 데이비드가 얼마나 좋은 모습을 보일지 내심 기대되었다.
이미 상대가 어느 위치까지 도달하게 될지 알고 있었기에 적어도 이번 일이 쓸모없지는 않았다.
“나달하고 페더러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네. 같은 무대에 유망주가 올라오면 이런 기분이 드는구나.”
비록 육체 나이가 18살에 불과했지만 정신적인 나이는 20대 후반인 터라 더 공감이 잘되는 것 같았다.
지혁은 앞으로 데이비드말고도 다른 천재 유망주들 만날 생각에 들뜬 기분이 들었다.
몇 년만 기다리면 뉴 제네레이션이라 불리는 다음 세대의 선수들이 데뷔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