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호주 오픈
호주오픈 2라운드 당일.
지혁과 데이비드의 랭킹과 커리어 차이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차이가 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기가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결과가 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랭킹 100위권 밖의 선수가 현재 8위를 유지하고 있는 지혁을 이기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지혁은 최소한 5위 안에 들어갔을 것을 생각하면 두 선수의 전력은 이미 비대칭이었다.
짝짝짝짝짝.
“음. 도착했나 보네.”
지혁은 관중석에서 들리는 박수 소리에 드디어 데이비드가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인지도가 떨어지는 탓 인지 팬들의 호응이 그리 크진 않았다.
본진인 미국이었다면 거물 유망주로 큰 관심을 받으면서 분위기가 괜찮았을 테지만 이곳은 전혀 연고가 없는 호주였으니 말이다.
데이비드는 메이저 대회 본선에 처음으로 출전한 게 긴장이 되는지 긴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굳어있는 표정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리, 먼저 와 있었구나.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이야.”
“아카데미에서 헤어질 때 호주 오픈에서 만나자고 했었잖아.”
“진짜 그 말대로 될 줄은 몰랐지···.”
“그래서 그랜드슬램에 데뷔한 소감은 어때? 1라운드에서 상당히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던데 말이야.”
“확실히 챌린저와 차원이 다르더라. 이때까지 상대해왔던 선수들이랑 수준 차이가 극명해. 나보다 부족한 선수가 한 명도 없더라고. 사실 첫 번째 경기도 운이 많이 따라줘서 승리한 거야.”
데이비드는 대회에 참가했을 때마다 항상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곤 했었다.
하지만 세계에서 이름과 명성이 알려진 주류 선수들을 옆에 두고 비교하니 그저 평범한 선수로 전락해버렸다.
아무래도 랭킹 50위 안에 들어가는 탑랭커들은 모두 데이비드와 비슷하거나 더 화려한 유망주 시절을 보내고 베테랑 선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 경기는 잘 부탁할게. 골든 보이하고 공식전이라. 분명히 날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많을 거야. 넌 아카데미의 스타나 다름없으니까.”
“미안하지만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어.”
“그건 내가 원하는 바야.”
각오를 다지는 그 모습에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 오픈 2라운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1세트 첫 번째 서비스게임.
데이비드는 먼저 서브권을 얻어내고 한창 공격에 집중하고 있었다.
190의 거대한 체구 덕분인지 서브와 스트로크는 탑랭커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상위에 들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랭커들에 비해 컨트롤이 미숙한 편이었지만 위력만 받쳐주면 자연스레 약점도 보안이 되었다.
“하앗!”
탕!!
강력한 포핸드를 코트 가장자리에 떨어트리는 데이비드.
지혁은 라켓에 걸리는 묵직한 무게감에 상대가 어떻게 1라운드를 통과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노련함은 부족해도 힘과 탄탄한 체력을 강점으로 내세워 랭킹 60위 대의 선수를 찍어 누른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신인이라는 점도 의외성을 발휘했을 테고 말이다.
[포티 러브.]
파상적인 공세에 연달아 실점을 허용하는 지혁.
그 활약에 관중들은 놀란 반응을 감추지 못했다.
무명의 신인이 이미 자신의 실력을 증면한 지혁과 동등한 실력을 발휘하는 게 상당히 충격적인 모양이다.
“골든 보이한테 전혀 밀리지 않잖아? 물론 이기는 건 힘들 테지만 서비스게임을 지켜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실력이야. 1라운드에서 랭킹이 더 높은 선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리에게 패배했으니까.”
“데이비드 해리슨이라고 했지? 미국의 유망주라고 하더니 앞으로 활약을 기대해봐도 되겠네.”
“아마 올해 학교를 막 졸업했을 거야. 나이를 생각하면 대형 유망주지.”
탕!!
‘생각보다 잘하는데? 역시 실전이라 각오가 다른 건가.’
지혁은 역동작을 노린 다운 더 라인을 받아내면서 데이비드에 대한 평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득점을 한 번도 하지 못한 건 공격보다 상대의 실력을 탐색하려고 한 영향이 컸다.
‘공격은 이만하면 됐으니 수비는 얼마나 능숙한지 시험해볼까.’
타다다다!
갑자기 풋워크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며 한층 강력해진 지혁의 스트로크가 네트를 넘어갔다.
그 변화에 데이비드도 나름 대처를 하기 위해 바운드 위치까지 달려갔지만 타구를 걷어내는 자세가 이전에 비해 완전하지 않았다.
탕!
줄어든 속도와 어설퍼 보이는 코스로 날아오는 공.
지혁 같은 정상급 선수가 이런 실수를 놓칠 리 없었다.
[포티 피프틴.]
데이비드가 있는 코트의 반대편 위치에 떨어지는 포핸드 크로스샷.
물리적으로 절대 받을 수 없는 그 공격에 그는 쫓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마 똑같은 스트로크가 풋워크가 빠르기로 유명한 지혁에게 떨어졌어도 받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방금 전의 크로스샷은 그만큼 빌드업과 완성도가 완벽했다.
[포티 서티.]
[포티 올. 듀스.]
경기의 첫 득점을 올린 지혁은 그 이후부터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경기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조금의 빈틈도 보여주지 않고 차근차근 포인트를 쌓아나가는 그 모습은 마치 완성형의 올라운더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듯했다.
[게임 리 1-0.]
결국 역스윕이 만들어진 첫 번째 서비스게임.
다 이긴 게임에서 브레이크를 당한 데이비드는 지혁과 자신의 엄청난 격차를 느낀 것인지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마 두 달 전 아카데미에서 당한 허무한 패배가 기억난 것일지도 모른다.
“아······. 한 포인트만 더 따내면 이길 수도 있었는데. 역시 골든 보이가 진지하게 나오면 힘들구나.”
“2라운드에서 예기치 못한 기적이 일어날 일은 없겠어. 하긴 리가 데뷔한 것도 1년밖에 안 됐는데 동급의 천재가 다시 나올 리 없지.”
“그냥 상식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선수인 것 같아. 이제 골든 보이의 서브 차례인데 코트 커버력은 어떤 수준일까. 그래도 공격력 하나만큼은 꽤 괜찮았는데 말이야.”
[서브 리.]
선수들이 서로 코트를 교체하고 나서 다시 시작된 경기.
지혁은 바닥에 공을 튕기면서 슬쩍 코트 반대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직 포기한 건 아닌가 보네.’
방금 전에 당한 브레이크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텐데 기세가 여전히 살아있다.
자포자기하며 손을 놔버리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경기도 없으니 잘된 일이다.
휙!
왼손에 쥐고 있는 공을 하늘 위로 던지는 지혁.
특유의 왕관 자세가 만들어지길 잠시, 곧이어 쾅!!하는 거대한 굉음이 들렸다.
[피프틴 러브.]
[SERVE SPEED: 225km/h]
우와아아아!
어마어마한 강서브가 에이스를 따내자 관중석에서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들려온다.
190cm의 데이비드도 나름 서브가 빨랐지만 220km 이상의 속도는 정말 선택받은 몇몇 선수들만이 가능한 수치였다.
아마 서비스 라인 안으로 이런 서브를 넣을 수만 있다고 해도 랭킹 100위 안에 가볍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쾅!!
[SERVE SPEED: 227km/h]
쾅!!
[SERVE SPEED: 228km/h]
“하앗!”
결국 지혁은 고작 4번의 서브만으로 서비스게임을 끝내버렸다.
그 엄청난 실력 행사에 관중석에 앉아있던 테니스 프로들과 전문가들은 자신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새 실력이 더 늘어서 왔구만······.”
“골든 보이가 복귀하고 나면 그랜드슬램의 판도가 바뀔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저건 너무하잖아. 저 괴물을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이제 믿을 건 지구력뿐이야. 부상을 완벽하게 회복했어도 아직 지구전은 부담이 될 테니까.”
“그것도 어느 정도 실력이 비슷해야 가능한 수단이지 어지간한 선수들은 버티는 전략을 시도조차 하지 못할 거야.”
아직 경기가 두 번의 게임밖에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경기장은 이미 가망이 없다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이후의 경기는 그들의 생각과 거의 흡사하게 돌아갔다.
[세트 리 1-0.]
6-0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끝난 1세트.
그 결과에 관중들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 진짜 엄청난 실력이네. 1라운드에서 보여준 경기랑 완전히 딴판인데? 베이글이라니. 상대 선수가 불쌍하네.”
“그런데 골든 보이가 상대 선수랑 무슨 원수라도 진 건가? 갑자기 무슨 심경인지 모르겠네. 저 정도로 열심히 뛸 상대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겠지. 애초에 천재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실력 발휘를 해주면 우리 입장에서 좋긴 하지만 경기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끝날 것 같아서 많이 아쉽네. 이러다가 경기를 시작한 지 1시간쯤에 끝나겠어.”
“저 선수랑 수준이 맞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16강 이상으로 올라가면 랭킹이 높아지니 오늘은 이 정도로 참을 수밖에.”
***
경기의 전체적인 상황은 2세트에 들어가고 나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지혁이 데이비드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그림이 계속해서 이어진 것이다.
[게임 리. 5-0.]
단 한 게임도 허용하지 않는 압도적인 경기 내용에 데이비드를 보는 관중들의 눈빛은 슬슬 연민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랜드슬램에 처음으로 데뷔하는 어린 유망주가 너무 심한 꼴을 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데이비드의 나이는 지혁보다 1살 더 많았지만 애초에 지혁은 상식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허억···, 허억···.”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땀을 후두둑 흘리는 데이비드.
벤치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인 그의 모습은 꽤나 처량해 보였다.
‘이게 리의 진정한 실력인가···.’
데이비드는 절망적인 상황을 뒤집을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자 부정적인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만약 그가 이때까지 선수 활동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웠다면 순순히 지금 결과를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12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다시 인생을 반복한다고 해도 더 많은 노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범접할 수 없는 재능에 부딪치고 나니 모든 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결국 정상의 자리는 이런 괴물들이 차지하겠지.’
패배감에 젖은 생각이지만 현재 테니스계의 상황을 보면 그렇게 말도 아니었다.
랭킹 1위의 라파엘 나달, 2위의 로저 페더러, 3위의 노박 조코비치.
누구 하나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그랜드슬램 우승을 하지 못한 선수가 없다.
심지어 랭킹 4위를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는 앤디 머레이조차 아주 어린 나이부터 수많은 트로피들을 수집했었다.
[레디.]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체어 엠파이어는 무심한 목소리로 휴식 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후우···.”
한숨을 크게 내쉬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데이비드.
축 처진 그의 어깨는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었다.
경기를 도와주는 볼 키즈는 서브에 사용하기 위한 공을 전달해주면서 걱정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무래도 천재에게 압도당하는 상황을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것 같았다.
사실 데이비드 정도면 미국 내에서 첫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망주였지만 경기에서 지혁을 마주하게 되니 그저 평범한 범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