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호주 오픈
데이비드는 남은 경기마저 무력하게 스코어를 내어주었다.
자포자기한 상태로 지혁에게 승리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너무 심했나?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하긴 연속으로 베이글을 당했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어떤 선수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테니 말이다.
이때까지 지혁을 일방적인 응원을 보내던 관중들도 그런 사정을 아는지 경기장의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언더독의 심정을 어느 정도 공감한 모양이다.
[게임 세트. 매치 리 6-0, 6-0, 6-1.]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 오픈 2라운드의 승자가 결정되었다.
지혁은 마음만 먹으면 모든 세트를 베이글로 끝낼 수 있었음에도 마지막 세트를 느슨하게 플레이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데이비드를 굳이 몰아붙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마음이 약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 다음 경기를 생각하면 전략적인 측면에서 이 선택이 옳았다.
와아아아아!
관중들은 지혁이 1라운드에 이어 2라운드마저 1시간 만에 끝내버리자 작년에 보여줬던 활약이 떠올랐는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리! 리! 리! 리!
“와! 이 정도면 준결승까지 충분히 올라갈 수 있겠어. 골든 보이가 호주 오픈에서 사고를 치겠는데?”
“동감이야. 내가 보기엔 빅3의 경기들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어. 부상을 당해서 미뤄졌지만 이제 빅4라고 해도 될 것 같네.”
“이번에 준결승 이상의 성적을 달성하면 언론들도 골든 보이가 빅4에 들어갔다고 인정하겠지?”
“이 정도 실력을 가졌는데 당연하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안목이 형편없음을 인정하는 거니까.”
“아시아인이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들어가다니······. 니시코리 케이도 그렇고 테니스계에 새로운 바람이 부는 건가.”
“경기의 재미를 생각하면 우리한테야 좋지. 선수들의 실력과 플레이 스타일도 다양해질 테니 말이야.”
관중들은 많은 체력이 요구되는 5세트 경기를 뛰었음데도 여전히 멀쩡한 지혁의 모습을 보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지 예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그랜드슬램에서 한 번 우승을 한 이상 두 번을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관중들의 뜨거운 시선은 지혁이 승자 인터뷰를 마치고 경기장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
호주 오픈 2라운드, 64강을 가볍게 통과한 지혁은 8강까지 아주 순조롭게 올라갔다.
대전 상대들의 랭킹이 낮아서인지 위기감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아무래도 눈에 띄게 상승한 피지컬과 기량이 큰 역할을 했다.
“바브린카라···. 왠지 자주 만나는 느낌이네.”
지난 일 년 사이 그랜드슬램에서 무려 세 번이나 경기를 하게 되었으니 꽤나 의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상위 라운드에서 부딪치는 건 필연적이었다.
빅3들도 항상 준결승과 결승에서 부딪치는 것처럼 말이다.
“예상대로 서브의 등급이 올랐어. 냉정하게 전력을 비교하면 패배할 확률은 거의 없을 거야.”
기존의 조건으로도 승률이 80%에 가까웠는데 실력이 부쩍 상승한 지금 상태에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지혁은 오히려 걱정보다 실전에서 서브가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위력은 나름 만족스럽긴 한데 바브린카에게 얼마나 통할까.”
컨트롤이 제법 개선되었으니 아무런 효과가 없진 않을 거다.
쾅!!
반대쪽 서비스 코트에 고속 서브를 떨어트리는 지혁.
마치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한 바운드 위치에 연습 코트 근처에 마련되어 있던 관중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적잖은 숫자가 있는 걸 보니 오랜만에 대회에 복귀한 지혁의 연습은 테니스 팬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후······.”
다양한 코스로 서브를 치던 지혁은 잠시 휴식을 취할 생각인지 훈련을 멈췄다.
훈련에 온 정신을 쏟던 상황에서 집중이 풀리자 이제야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관중석에 일반인뿐만 아니라 얼굴이 익숙한 프로 선수들의 얼굴이 제법 보였던 것이다.
물론 저들 중에 8강에 진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남아있는 선수들의 명단을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라파엘 나달, 다비드 페러, 앤디 머레이, 알렉산드로 돌고폴로프, 토마스 베르디흐, 노박 조코비치, 로저 페더러, 이지혁.
이 8명의 이름은 테니스계에서 어마어마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준결승에 올라가는 건 리가 되겠네. 바브린카도 지난 반년 간 성장을 많이 했지만 아직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너무 커.”
“리벤지 매치에 집중하고 있다던데 작년의 수모를 갚아주긴 힘들겠지. 재능과 나이를 고려하면 앞으로도 원하는 결과를 얻긴 힘들 거야.”
“그러면 남은 건 준결승전의 페더러하고 결승전의 조코비치, 라파엘 나달인가? 허···. 숨이 막히는 라인업이구만. 이 두 선수를 뚫어야 우승 트로피를 차지할 수 있다니.”
“응? 다비드 페러나 머레이, 베르디흐도 있잖아. 아직 그들이 탈락한 건 아닌데.”
“마스터즈도 아니고 그랜드슬램에서 빅3가 허무하게 탈락하겠어?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건 그들일 거야.”
“음······.”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힌 탑랭커.
실제로 대부분의 메이저 대회의 우승자는 빅3가 점령하고 있었다.
작년, 재작년에 열린 8번의 그랜드슬램들 중 지혁이 참가한 롤랑과 델 포트로의 US 오픈을 제외하면 전부 페더러, 나달이 우승을 하지 않았는가.
이것도 부상 이슈와 여러 번의 기적이 겹쳐서 생긴 일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탕!!
얼마 후, 지혁은 휴식을 모두 마친 것인지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부쩍 상승한 서브 실력에 재미가 들린 건지 지혁의 표정은 상당히 밝았다.
그렇게 호주 오픈 8강이 시작되기 하루 전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
[그랜드슬램 복귀전에서 파죽지세로 올라가는 이지혁, 과연 최종 성적은 어디까지 일까?]
[치명적인 부상도 천재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4강 진출은 따놓은 당상이라 장담해.]
[바브린카만 이겨내면 황제, 로저 페더러와 한 달도 되지 않아 슈퍼 매치의 복수전이 성사된다.]
[해외의 유명 해설진들과 레전드 선수들이 이지혁의 플레이에 대해 극찬을 쏟아낸 이유. 반년이 넘는 공백을 가졌음에도 더 강해진 비법은 고강도 트레이닝이라 예측돼.]
[16강전을 치른 랭킹 35위의 로빈 하스, “골든 보이는 완성형에 가까운 올라운더 플레이어다. 내가 느끼기엔 페더러와 비교해도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아직 미성년자인 걸 생각하면 몇 년 뒤의 그랜드슬램은 그가 지배하게 될 것.”]
8강전 당일.
지혁의 경기는 언제나 그랬듯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항상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줬던 터라 중계 경기의 시청률이 이번에도 고공행진을 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ㅡ 8강에 올라오니까 슬슬 쓸만한 선수들이 나오네. 이때까지 너무 양학해서 긴장감이 없긴 했지. 물론 워낙 잘해줘서 재미없던 건 아니었지만 ㅋㅋㅋ
ㅡ 그런데 이지혁이 말도 안 되는 괴물이라서 그런 거지 정작 16강까지 경기했던 상대들 이름 보면 만만한 선수들 없음 ;; 아시아 오면 바로 초토화 가능할 걸.
ㅡ 오늘도 3-떡이겠지? 바브린카 랭킹 아직도 17위던데 이 정도면 로빈 하스랑 거의 비슷한 수준 아닌가?”
ㅡ ㄴㄴ 요즘 바브린카 성적이랑 8강까지 했던 경기보면 그런 소리 못함. 내가 보기엔 대기만성형인 것 같다. 한방이 있는 선수임.
ㅡ 이지혁보다 8살이나 많은 선수한테 대기만성형?? ㅋㅋㅋㅋ 그냥 탑10 전후로 깔짝거리는 게 한계다. 로저 페더러 후계자라고 하는 소리 있던데 그거 전부 거품임
ㅡ ㅇㅈ 커리어 하이가 17위 따리를 이지혁한테 은근슬쩍 비비는 건 선 넘었지. 제발 주제 파악 좀 하라고 ㅋㅋㅋ
ㅡ 바브린카는 니시코리 선에서 정리됨 ㅅㄱ
8강전은 하위 라운드와 팬들의 주목도가 달라서인지 경기장의 수준도 완전히 달라졌다.
지혁이 작년 호주 오픈 4강전에서 경기를 했던 15,000석의 로브 레이버 아레나 스타디움 배정받았던 것이다.
바브린카의 인지도로 이런 곳을 얻었을 리 없으니 이건 지혁 덕분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와아아아아!
선수들이 시간에 맞춰 입장하자 사람들의 함성으로 인해 흔들리는 스타디움.
그 압도적인 규모에 큰 무대 경험이 많은 지혁과 바브린카조차 긴장으로 표정이 굳었다.
두 사람은 응원 소리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코트가 자리 잡고 있는 스타디움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후···. 반가워. 리.”
“네. 반년만이네요.”
“너라면 부상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내 생각대로 완벽하게 복귀전을 치렀더라. 실력도 훨씬 더 늘었고.”
“바브린카도 그동안 랭킹이 많이 올랐던데요. 지난 시즌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어요. 이름 있는 전문가들이 성장 가능성을 높게 잡아줬죠?”
“언제까지 20위대에 머무르고 있을 순 없으니까. 너하고 페더러를 이기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어.”
“음···. 제가 경험한 당신이라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보니 긴장된 분위기도 조금 풀어졌다.
“본 경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슬슬 시작해볼까? 남은 대화는 경기가 끝나고 하면 되니까.”
“뭐, 그러죠. 저도 원하는 바예요.”
지혁은 시계를 가리키며 말하는 바브린카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최상의 상태로 경기에 임하려면 사전 랠리를 어느 정도 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몸풀기는 충분할 정도로 했지만 상대 선수와 스트로크를 주고받으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혼자 훈련하는 보다 월등히 많았다.
탕!! 탕!! 탕!!
그렇게 본경기에 전에 가볍게 랠리를 하는 두 선수.
랭킹이 만만치 않아서인지 다른 탑랭커들에 비해 느린 속도에도 스트로크들이 상당히 위력적으로 느껴졌다.
‘확실히 수준이 다르긴 하구나. 16강까지 상대했던 선수들이 장난처럼 느껴지네.’
경기 센스와 스트로크 코스 선택, 컨트롤, 심리전 등 만만하게 볼 구석이 하나도 없다.
‘예전에도 수비하나 만큼은 알아주는 베이스라이너였는데 왠지 이번 호주 오픈에 무기를 하나 가지고 온 것 같단 말이야.’
결정력이 유일한 약점이었던 바브린카가 쓸만한 기술을 장착했다면 분명 8강전 경기가 쉽게 풀리진 않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지혁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페더러를 상대하기 전에 전초전이라 생각하면 되겠어.’
아무리 바브린카의 실력이 부쩍 늘었어도 황제보다 더 잘할 리는 없다.
그러니 무뎌진 실전 감각을 회복한다는 생각으로 이번 경기에 임하면 될 것이다.
마침 서브의 등급도 상승했으니 공격력을 시험해볼 무대로 이만한 무대가 없었다.
수비에 강점을 가진 바브린카에게 통한다면 상위 랭커들에게도 충분히 먹힌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