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호주 오픈
[페더러! 6-6. 듀스!]
[리! 7-6. 어드벤티지 리.]
“음······.”
지혁은 2세트를 여기서 마무리지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상황은 생각처럼 간단하게 풀리지 않았다.
‘실수를 한 건 없는데···. 오히려 경기 내용 자체는 최상이었어.’
그나마 다행인 건 위닝샷을 한 번씩 주고받아서 어드벤티지를 가져갔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조차 놓쳤으면 답이 안 나왔을 테니 말이다.
[결국 타이브레이크가 듀스에 돌입하는군요. 골든 보이의 회심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어요.]
[이건 페더러가 잘한 겁니다. 리의 슈퍼 플레이를 온몸을 던져서 막아냈으니까요. 덕분에 위험한 상황에서 한숨 돌리긴 했네요.]
[그래도 6-5에서 7-6이 된 것뿐이라 아직 위기가 완전히 지나간 건 아닙니다. 만약 다음 서비스 차례에서 한 포인트라도 빼앗기면 2세트는 리에게 돌아갈 겁니다.]
페더러는 일단 타이브레이크의 스코어를 원점으로 되돌리는데 집중했다.
진지한 표정을 보면 2세트를 내어줄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사실 이번 세트에 들인 공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탕!! 탕!! 탕!!
그렇게 두 선수가 승부를 내지 못한 채 랠리를 지속하길 몇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코트에서 사람들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페더러의 백핸드가 네트 상단에 아슬아슬하게 걸려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활약과 어울리지 않는 허무한 결과였다.
‘여기서 득점을 한다고? 방금 전 다운 더 라인은 위너가 들어갈 만한 샷이 아니었는데?’
아아아······.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결과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안타까운 신음을 흘리는 관중들.
페더러는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화를 이기지 못하겠는지 라켓을 코트 바닥에 집어던졌다.
라켓은 소재가 가진 탄성 덕분에 웬만하면 쉽게 파손되지 않는데 얼마나 강하게 내려친 건지 멀리서도 찌그러진 게 한눈에 보였다.
[세트 리.]
결국 2세트는 단 한 번의 에러로 인해 지혁의 승리로 돌아갔다.
[아! 페더러가 세트 포인트에서 네트를 저질렀네요. 어이없는 실점에 화가 잔뜩 난 것 같습니다.]
[사실 저런 장면은 자주 나오는 편이죠. 결정적인 순간에 에러를 범한 게 문제였지만 말이에요.]
[이러면 경기가 어떻게 되는 거죠? 방금까지만 해도 저희는 페더러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는데요.]
[세트 스코어가 1-1이 되어서 당장 누구의 손을 들어주기 힘듭니다. 실력은 페더러 쪽이 미세하게 더 앞서지만 분위기가 골든 보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해설들은 흥분한 어조로 앞으로의 경기 전망에 대해 떠들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3세트가 다시 시작했다.
벌써 휴식 시간 120초가 전부 지나가버린 것이다.
***
2세트를 어렵게 얻어낸 지혁은 페더러를 속전속결로 이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본능적으로 경기가 초장기전이 될 거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지경까지 와서 체력을 아끼며 다음 경기를 대비한다는 것은 욕심이었다.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야 그나마 자그마한 승산이라도 보일 테니 말이다.
[세트 리.]
짝짝짝짝짝짝.
관중들은 경기가 결국 5세트까지 도달하자 선수들의 끈질긴 집념에 박수를 보냈다.
그랜드슬램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혈투가 벌어진 덕분에 경기가 시작한 지 3시간을 훌쩍 넘겼음에도 팬들의 눈빛은 여전히 초롱초롱했다.
ㅡ 와···. 이번 호주 오픈에서 가장 수준 높은 경기인데? 사람이 아니네 ㄷㄷㄷㄷ
ㅡ 어째서 이지혁하고 페더러가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는지 알겠네. 이런 괴물을 다른 선수들이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3-0으로 패배하는 게 당연한 거였음 ㅋㅋㅋㅋ
ㅡ 5세트는 타이브레이크 없지? 잘하면 5시간 넘을 수도 있겠네?? 결승 올라가도 컨디션 최악이겠는데?
ㅡ 작년에 4강 올라갈 때도 이런 경기 두 번인가 있었잖아. 1경기 정도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임.
ㅡ 지금 그딴 거 말해봤자 소용없으니까 일단 이기라고 ㅋㅋㅋ 어차피 4강에서 탈락하면 전부 불필요한 걱정이잖아 ㅋㅋㅋㅋ
ㅡ ㅇㅈ 페더러한테 이기는 것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김칫국물 그만 마셔라.
지혁은 마지막 세트가 시작하기 전 벤치에서 심호흡을 하며 체력을 최대한 회복하려고 애썼다.
플레이 스타일상 페더러와 공격적인 스트로크를 계속 주고받다 보니 숨이 거의 넘어갈 지경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후우···. 후우···.”
‘페더러도 멀쩡하진 않네. 내가 이 정도면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심각할 거야.’
페더러는 지혁보다 12살이나 더 많은 중년 선수이니 지구력 대결로 들어가면 강점을 가진 건 누가 될지 뻔했다.
아직 20대 중반인 나달, 조코비치에겐 통하지 않을 방법이지만 그를 한정으로 하면 장기전은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전략이다.
[레디.]
탕! 탕! 탕!
선수들이 많이 지쳤던 탓일까.
랠리는 1세트와 달리 속도와 날카로움이 상당히 무뎌 보였다.
[아, 확실히 체력이 떨어진 게 티가 나네요. 경기력 저하가 뚜렷하게 느껴져요.]
[경기가 시작한 지 무려 4시간에 근접하고 있으니 슬슬 한계에 도달할 때가 되긴 했죠.]
[그나저나 골든 보이의 체력 문제가 꽤 개선된 것 같네요. 작년만 해도 약점으로 지적받는 일이 많았는데 말이에요.]
[네. 근력 말고 다른 종류의 트레이닝도 했나 봅니다. 재활과 동시에 지구력을 늘리긴 힘들었을 텐데 정말 열심히 시간을 보낸 모양입니다.]
1-1, 2-2, 3-3, 4-4, 5-5. 6-6.
도저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끝도 없이 올라가는 5세트의 스코어.
결국 경기가 듀스에 들어가자 해설자들은 긴장감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6-6. 원래 타이브레이크에 들어가야 할 스코어지만 호주 오픈에서 마지막 세트는 타이브레이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제 8-6이나 9-7처럼 두 세트를 먼저 앞서 나가야 경기가 종료됩니다.]
[아마 엄청난 장기전이 될 것 같네요. 보통 이런 상황에서 10-10까진 금방 가니까요.]
[선수들이 버텨줄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솔직히 지금도 아슬아슬하거든요.]
해설자들이 예측한 대로 이후의 경기는 처절한 혈투가 되었다.
서로 뼈를 깎는 심정으로 듀스를 진행한 것이다.
[게임 페더러 8-7.]
[게임 리 8-8.]
그렇게 막 열다섯 번째 게임이 시작할 무렵, 갑자기 경기가 중단되었다.
웅성웅성.
의료진들이 코트로 뛰어오는 모습에 급격히 소란스러워지는 관중석.
페더러가 벤치에 앉자 걱정스러운 시선이 급격하게 쏟아졌다.
[휴······.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저 다리에 경련이 난 것뿐입니다.]
[그러면 경기가 계속 지속되겠네요. 상황이 꽤 묘하게 돌아갑니다. 승리의 여신이 골든 보이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있어요.]
[페더러의 약점이 노출됐으니 리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상이 되네요.]
[네. 아마 더욱 심한 지구전으로 가겠죠. 쉬운 방법을 두고 돌아갈 이유는 없으니까요.]
몇 분 후, 페더러는 의료진의 도움으로 무사히 코트로 복귀했다.
다리에 생긴 문제는 마사지를 받고 전부 해결된 것 같았다.
물론 한 번 기미가 보였으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재발할 확률이 높다.
쾅!!
메디컬 타임이 끝나고 이후의 경기는 이전과 꽤 다르게 진행되었다.
페더러가 승부를 빠르게 보려고 서두른 것에 반해 지혁은 전혀 급하지 않다는 듯 수비적인 모습만 보인 것이다.
‘이제 실수할 때까지 기다리면 돼. 굳이 모험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무너져 줄 거야.’
지혁은 위닝샷을 넣는데 집착하지 않은 덕분에 간간히 저지르던 실책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턱!
네트 중간에 걸려서 떨어지는 페더러의 스트로크.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 결과에 지혁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세트 스코어 9-8! 무려 17번째 게임 만에 브레이크가 나왔습니다.]
[길었던 준결승도 여기서 끝나려나 보네요. 다음 서비스게임은 골든 보이에게 넘어가게 되니 승부는 거의 결정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초반만 하더라도 리가 열세에 처했었는데 그 모든 걸 젊음으로 극복해냈어요. 정말 대단한 인내심입니다. 중간에 포기했으면 지금의 기회도 없었을 거예요.]
[맞습니다. 그저 지금 상황은 그저 운으로 나온 게 아니에요. 냉철한 판단력과 전략 아래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리는 승리를 가져갈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해설들은 마지막 서비스게임을 남겨두고 은근히 지혁의 손을 들어주었다.
잠시 후, 짧은 휴식을 마친 지혁이 볼 키즈에게 공을 전달받았다.
***
쿵!!
[게임 세트! 매치 리······]
와아아아아!
지혁은 5세트가 10-8로 마무리되자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를 휘청거렸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 경기를 진행했지만 솔직히 그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322분이나 되는 초장기전을 펼쳤는데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내가 이겼구나.’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지혁.
그러자 거대한 스타디움이 흔들릴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팬들이 보였다.
리! 리! 리! 리!
‘아···. 페더러한테 인사를 해야지. 까먹고 있었네.’
미약하게 경련이 일어나는 다리를 이끌고 네트 앞으로 걸어가자 비슷한 몰골의 페더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승리의 여운을 즐길 수 있도록 기다려준 것 같았다.
“하하하. 꼴이 말이 아니네.”
“훗. 페더러도요.”
비록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지만 페더러는 유쾌한 모습을 보였다.
이미 그랜드슬램에서 16번이나 우승한 전적이 있어서 다른 선수에게 질투심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경기에서 한, 두 번 패배한다고 이때까지 쌓아놓은 위상이 뒤집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슈퍼 매치랑 완전히 딴판이던데? 설마 호주 오픈에서 너에게 경기를 내줄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
“운이 많이 따라줬어요.”
“이번이 세 번째 그랜드슬램 참가지? 정말 무서운 재능이긴 하네. 4강, 우승, 결승 진출이라니. 이때까지 테니스계에서 전례가 없는 활약이야.”
“앞으로가 중요하죠. 지금 당장은 페더러와 나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혁은 겸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부상이나 다른 문제로 반짝하고 사라지는 선수가 얼마나 많던가.
그런 험난한 테니스계에서 10년 이상의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 페더러는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결승전은 아마 나달이 올라올 거야. 요즘 나달의 실력이 물이 올랐던데 이길 자신은 있어?”
“약간은요. 오늘 경기도 이겼는데 못할 건 없죠.”
가장 어려운 지점을 통과했으니 완전히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하드 코트의 조코치비를 상대했다면 나달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게 지혁은 페더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트레이너들과 곧장 호텔로 돌아갔다.
이틀 뒤까지 경기의 후유증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