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호주 오픈
휴식을 모두 끝내고 2세트가 시작한 지 십여분.
지혁은 언제 불리한 상황에 처했냐는 듯 연신 조코비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쿵!!
[게임 리 3-0.]
정면 대결로 다시 한번 넘어가는 게임.
관중들은 기괴한 각도로 사이드라인에 떨어진 포핸드 위너에 놀란 건지 환호성을 질렀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스트로크가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성공적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골든 보이의 슈퍼 플레이가 서비스게임을 완벽하게 지켜냈습니다. 보통 이런 샷은 경기 후반에 가끔 보이는 게 전부였는데 상당히 빨리 나왔네요. 그나저나 존, 아직도 리가 이길 확률이 20% 이하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제 기세가 완전히 넘어온 것 같은데요.]
[음······. 제가 골든 보이의 역량을 너무 얕잡아봤네요. 확실히 간단한 선수가 아니에요.]
[그 말은 생각이 바뀌었다는 얘기인가요?]
메켄로는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너무나 뻔한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무래도 조코비치가 우세하다는 생각이 아직도 변하지 않았나 보다.
[저런 의외성 플레이가 경기에서 차지하는 건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순수한 실력 자체는 아직 조코비치가 훨씬 나아요. 단기전이라면 몰라도 경기의 전체적인 판도는 그대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런 것도 익숙해질 테고 말이에요.]
메켄로가 지적한 것처럼 2세트의 중반쯤이 되자 지혁의 승리 행진도 서서히 주춤하기 시작했다.
조코비치도 그냥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게임 조코비치 4-2.]
결국 간발의 차이로 브레이크의 기회를 놓쳐버린 지혁.
그 결과에 관중들도 아쉬운지 경기장에서 아···하고 아쉬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적응 속도가 무시무시하네. 벌써 찰나를 이용한 공격을 받아칠 수 있다니······. 과연 최강의 베이스라이너다운 코트 커버력이야.’
어지간한 선수라면 방금 전의 공격으로 경기의 밸런스가 무너지고도 남았을 텐데 역시 조코비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혁의 슈퍼 플레이를 직접 경험해보진 않았어도 지금의 능숙한 모습을 보면 나름 준비해온 게 있는 모양이다.
[서브 리.]
‘아직은 여유가 있으니까 일단 2세트부터 끝내 놓자.’
그렇게 휴식도 없이 다시 재개되는 경기.
상당히 빠른 템포로 공수전환이 일어났지만 조코비치 입장에서도 시간이 촉박한 건 마찬가지라 불만은 전혀 없었다.
[게임 리 5-2.]
[게임 조코비치 5-3.]
[게임 리 6-3.]
지혁은 결국 2세트를 이전 세트와 똑같은 스코어로 복수하는데 성공했다.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조코비치의 장기인 스트로크에서 승기를 보인 것이다.
그 결과에 팬들은 승산을 본 건지 상당히 흥분한 반응을 보였다.
ㅡ 이지혁이 나달보다 더 나은데? 랠리 싸움에서도 전혀 안 밀리잖아?
ㅡ 이러면 이제 빅4 서열이 이지혁>조코비치>나달>페더러인가.
ㅡ 고작 대회 한 개 가지고 벌써 설레발치냐 ㅋㅋㅋ 적어도 2~3년은 꾸준히 활약해야지. 플루크로 한 해만 반짝 활약하는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델 포트로 까먹었음?
ㅡ 그래도 이번 호주 오픈만큼은 이지혁이 유리한 건 맞는 것 같다. 만약 지금 추세로 경기가 진행된다면 이길 가능성은 충분함.
ㅡ ㅇㅇ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조코비치가 오늘 처음으로 이지혁을 상대해봐서 상황이 더 유리함. 저런 식으로 플레이하는 선수를 어디서 만나봤겠냐고 ㅋㅋㅋㅋㅋ
ㅡ 이번에도 재능으로 찍어 누르는 중이네 ㄷㄷㄷ 스트로크 컨트롤이랑 센스가 압도적으로 뛰어나서 상대적으로 기량이 부족해도 경기를 이렇게 뒤집어지네 ;;
기대를 충족시키는 지혁의 활약에 한국 팬들은 이대로 잘만하면 그랜드슬램 2회 우승도 가능할 거라고 댓글을 달았다.
자국의 선수가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퍼지자 안 그래도 높던 한국의 호주 오픈 중계방송의 시청률은 더 가파르게 치솟았다.
***
[세트 리.]
세트 스코어 2-1.
지혁은 결국 3세트마저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를 가져갔다.
이제 우승까지 사실상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정작 지혁의 표정은 무슨 걱정을 하는지 그리 좋지 않았다.
‘여기까지 어떻게든 왔긴 했는데···. 경기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단 말이야.’
이전 세트에서도 정말 위험한 상황이 나왔었다.
다행히 아직 체력이 약간이나마 남아서 아슬아슬하게 타이브레이크를 이길 수 있었지만 지쳐있는 지금 상태에서 다시 그런 플레이를 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조코비치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자신에게 승기가 넘어올 거라는 걸 아는지 스코어가 밀리는 상황에서도 표정이 너무나 여유로웠다.
[골든 보이가 환상적인 백핸드 위너로 세트를 가져갔네요. 빈틈을 정확히 노린 스트로크였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저런 위치에 타구를 떨어트리다니 경기 센스가 정말 대단합니다.]
[듣던 대로 시야가 정말 넓네요. 지금 당장 최고의 선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재능 하나만큼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괜히 역대급 유망주라고 하는 게 아니죠. 거의 백 년에 달하는 테니스 역사에서도 이 정도 존재감을 보여준 17살 선수는 없었습니다.]
지혁이 활약이 워낙 대단했기에 해설들은 한동안 극찬을 쏟아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지혁의 승리로 굳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탓인지 국내외 테니스 커뮤니티들도 조코비치가 관심에서 많이 멀어진 모습을 보였다.
[물론 아직 경기가 끝난 건 아닙니다. 조코비치는 이대로 무너질 선수가 절대 아니에요.]
매켄로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지혁이 그리 유리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 발언에 동료 해설과 시청자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지 질문을 쏟아냈지만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4세트가 되면 알게 될 거라는 말을 했다.
[레디.]
그렇게 해설들의 대화는 선수들이 다시 코트 위로 올라가는 모습과 함께 뚝 멈췄다.
가장 중요한 건 경기인만큼 자신들의 멘트로 시청자들의 집중을 방해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앗!”
탕!!
지혁의 서브로 시작한 경기는 3세트와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자 분위기가 조금씩 이상하게 변해갔다.
조코비치가 2시간이 훌쩍 넘는 대결로 인해 마침내 돌파구를 찾아낸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법을 꺼냈는데도 마지막까지 버티는 건 무리였나 보다.
이럴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랜드슬램은 경기 시간이 길어도 너무 길다.
만약 이번 대회가 마스터즈였다면 진작에 승리를 하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게임 조코비치 3-1.]
아아······.
와아아아아!
마침내 지혁이 브레이크를 당하는 모습을 보이자 관중석에서 한숨과 한성이 섞여서 들려왔다.
서로 응원하는 팬층이 나눠져 있는 탓에 지금과 같은 반응이 나온 모양이다.
지금까지 워낙 지혁이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조코비치의 팬들이 억눌러져 있었는데 이제 지혁에게 응원을 하던 팬들과 입장이 바뀔 것 같았다.
[게임 조코비치 4-2.]
3세트까지의 부진이 마치 거짓이라는 듯 미친 듯이 스코어를 늘려가는 조코비치.
그 모습에 지혁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갑자기 골든 보이의 경기력이 조금 하락한 것 같습니다. 스트로크의 날카로움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풋워크도 약간이지만 느려졌고요.]
[아마 이전 경기의 여파일 겁니다. 페더러와 초장기전을 벌인 끝에 승리했으니까요.]
[그건 조코비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분명 두 선수의 조건은 비슷할 텐데요.]
[조코비치 쪽이 괴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말도 믿을 수 없는 체력을 가지고 있어요. 나달과 했던 경기에서도 무시무시한 활동량을 자랑했잖습니까.]
[골든 보이도 체력이 부족한 선수가 아닐 텐데······. 꽤나 의외의 상황이네요.]
[뭐, 모든 건 상대적인 법이니까요.]
지혁은 어플로 체력을 올렸음에도 경기가 장기전에 들어가자 조금씩 밀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변화가 없으면 이대로 제겠어. 수비가 너무 단단해서 브레이크를 따낼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웬만하면 가지고 있는 기량 내에서 승리를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실력이 다른 빅3들에 근접했음에도 조코비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가 워낙 기본기에 충실한 베이스라이너라서 더 그런 면이 있었다.
수비보다 공격을 하는데 집중된 빅 서버나 올라운더였다면 뭔가 방법이 생겼을 텐데.
[포인트: 1,280,112]
‘······일단 급한 대로 이거라도 끌어다 쓰자.’
어차피 풋워크에 투자할 거라고 정해 놓아서 손해는 보는 것도 아니었다.
이걸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불가능해도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포인트: 0]
순식간에 사라지는 어플의 포인트.
지혁은 엄청난 정보량에 두통을 느끼는지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래도 어플의 한계가 두 번이나 풀린 터라 충분히 견딜만했다.
“후우···.”
얼마 후, 드디어 적응하는 과정이 끝난 건지 길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생소한 정보들을 살피며 조금 더 여운을 느끼고 싶었지만 주변 상황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경기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탕!! 탕!! 탕!! 탕!!
풋워크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서일까.
지혁은 스트로크 대결에서 이전처럼 밀리지 않고 대등한 대결을 펼칠 수 있었다.
[서티 러브.]
갑자기 탄탄해진 코트 커버력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코비치.
그는 제대로 확인해 볼 생각인지 일정하게 유지하던 랠리의 템포를 조금 더 올렸다.
꽤나 무리가 가는 행동인데 아직도 체력에 여유가 남아도는 모양이다.
[포티 피프틴.]
예고도 없이 갑자기 경기가 급박해지자 메켄로는 조코비치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전드 선수인 만큼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챘던 것이다.
[음······. 골든 보이의 풋워크가 더욱 효율적으로 변했습니다.]
[경기를 4세트에서 끝내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승부가 길어지면 불리한 건 누가 될지 뻔하잖아요.]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경기 중에 갑자기 리의 실력이 상승했어요.]
[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존이 착각한 거 아니에요? 이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고요.]
[저도 믿을 수 없지만 지금 경기 상황을 보면 확실합니다. 단순히 템포를 높인다고 나올 모습이 아니에요.]
[······만약, 아주 만약에 존의 말이 맞다면 경기가 역전될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지금 같은 변화가 생기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저는 조코비치가 향후 5년은 메이저 대회를 지배할 거라 예측했는데 아무래도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해야겠습니다.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리는 괴물이나 다름없어요.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그를 이길 수 있는 선수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