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리벤지 매치
우와아아아!
운동장을 넘어서 산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야구공.
촬영장의 사람들은 첫 투구부터 엄청난 장면이 나오자 입을 크게 벌리며 커다란 탄성을 내뱉었다.
지혁이 설마 야구에서도 이런 엄청난 재능 보일 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야구 레전드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지혁 선수가 어마어마한 홈런을 쳤습니다! 분명 야구를 처음 해본다고 들었는데 믿기지 않는 타격 실력이에요! 역시 스포츠에 관한 재능은 타고났네요.”
“좌타석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생각이 있었군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스윙이었습니다.”
“와! 한국 최고의 타자가 이렇게 인정하다니 대단하네요! 우연으로 잘 맞은 게 아니었나 봐요.”
“형, 이지혁 선수를 나중에 야구 특집을 할 때 다시 섭외해도 되겠어요. 테니스 특집이 끝나면 야구 특집도 언젠가는 할 거잖아요?”
“응? 뭐라는 거야? 이번 출연도 엄청 어렵게 성사됐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어? 오늘 촬영도 기적이었다고.”
“아, 그렇긴 하지······.”
그렇게 찬사와 이런저런 잡담이 이어지길 잠시.
지혁은 출연진들의 멘트가 좀처럼 끊어지지 않자 어깨를 으쓱하며 대화에 끼어 들었다.
“여기까지 할까요?”
“아! 이지혁 선수! 잠, 잠시만요! 아직 남아있는 투구가 있으니까 그것도 마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코너는 곧바로 진행될 거예요.”
PD는 지혁의 말을 듣고 지금이 촬영 중인 것도 까먹은 것인지 다급한 어조로 끼어 들었다.
혹시라도 좋은 장면을 찍은 기회를 놓칠까 염려한 모양이다.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가 타자 역할을 해주는 이벤트를 놓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야구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만큼 홍보 기사로 써먹을 가치가 충분했다.
요즘 테니스가 급부상하면서 야구가 위치를 위협받고 있긴 했지만 아직 두 스포츠의 인프라를 비교하는 건 어려웠다.
딱!! 딱!! 딱!! 딱!!
지혁의 타격은 투수가 치기 좋게 던져준 덕분에 대부분 펜스를 넘어가는 홈런이 나왔다.
좌타석 한정으로 어지간한 프로 못지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 정도 활약이면 체면치례는 넘치도록 했다.
아마 방송이 나갈 때쯤이면 지혁이 야구 선수를 했더라도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겠지.
그렇게 지혁은 몇 달 만에 출연한 예능 나들이를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며 마지막 코너를 무사히 마쳤다.
***
호주 오픈이 끝나고 몇 개월.
지혁은 방송 출연이 끝나자 예정대로 마스터즈 대회에 참가하는데 집중했다.
전 세계 곳곳으로 투어를 다니다 보니 테니스와 관련되지 않은 일에 신경을 분산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일 코치로 출연한 예능의 시청률은 당연히 엄청난 이슈를 끌며 초대박이 났다.
지금까지 지혁이 직접 테니스를 알려 주는 프로그램이 없었던 만큼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제대로 자극한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야구로 홈런을 쏘아낸 명장면도 큰 역할을 했다.
‘그 이후로 야구 관련 채널에서 섭외가 엄청 많이 왔다고 했지.’
자신의 인기에 어떻게든 탑승해보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출연료와 격이 맞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전부 거절했지만 말이다.
[이지혁]
근력: 80 민첩: 80 체력: 80 신장: 188cm▲
서브(A+), 포핸드(A+), 백핸드(A+), 풋워크(A+), 외모(A), 트릭샷(A), 찰나(A)
[1,120포인트]
‘음···. 이제 어디 가서 실력으로 꿀리는 일은 없겠구나.’
지혁은 지난 몇 달 동안 고생한 결과물을 보자 저절로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클레이 코트의 나달과 후반기의 조코비치를 걱정했는데 지금 실력이면 승리를 장담하긴 힘들어도 충분히 맞상대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지혁, 연습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롤랑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생각할 게 많겠지. 우리하고 사는 세계가 다른 녀석이잖아.”
“하긴 나달이랑 조코비치가 칼을 갈고 있다는 소문이 탑랭커들 사이에서 파다하긴 했지.”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을 때, 주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랜드슬램을 대비하기 위해 모인 데이비드와 니시코리였다.
세 사람은 랭킹이 상당히 들쑥날쑥한 편이었지만 아카데미를 접점으로 이렇게 모이게 되었다.
솔직히 서로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서열이 워낙 확실하다 보니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세 사람은 만약 본선에서 만나도 이기는 쪽이 정해져 있었기에 아무런 부담 없이 서로의 훈련 파트너를 할 수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어떤 전략을 쓸까 고민하는 중이었어요. 생각할 부분이 꽤 많거든요.”
“응? 네가 고민할 게 있다고? 너는 유력한 우승 후보잖아.”
“그래. 이제 실력도 빅4에 들어갔고 말이야. 만약 내가 같은 상황이었더라면 자신만만할 것 같은데. 또래에 마땅한 적수도 없고 한창 잘 나갈 때니까.”
지혁은 주변의 의아한 반응에 부정하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요즘 여러 대회에서 제법 승승장구하긴 했지만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에게 승리를 장담할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빅3는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기량이 성장하고 있어서 완벽하게 우세를 점하는 건 아직 한참 멀었다.
“대회에서 우승할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아서요. 최근 마스터즈에서 몇 번 패배하기도 했고요.”
“음···. 아무리 너라고 해도 항상 이길 수는 없으니까 그건 당연하지.”
“맞아. 메이저 대회에서 트로피들을 전부 독식할 생각이야? 양심이 있으면 우리한테도 조금은 양보해달라고.”
니시코리와 데이비드는 지혁의 말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해냈다.
그들은 어떤 시대에 등장했어도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을 빅4와 같은 세대에 태어난 죄로 갖은 고초를 겪고 있었다.
덕분에 그동안 더 높은 성적과 랭킹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번번이 좌절됐었다.
게다가 현재 테니스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분명 향후 5년 간 지금의 구도가 변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나저나 롤랑의 승산을 어느 정도로 잡고 있어? 네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 리는 없고 분명 방법을 마련해 놨을 텐데.”
“나달이 멀쩡하게 버티고 있으니 높게 잡아도 절반이죠. 요즘 조코비치의 성적이 가장 좋긴 해도 클레이의 황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니까요.”
“이미 승리한 경험이 있는데 너무 엄살 부리는 거 아니야?”
“작년은 운이 많이 따라준 경기였어요. 똑같은 결과를 얻을 거라 장담하기 힘들어요.”
“하긴 대결이 말도 안 되게 치열하긴 했지. 나라면 절대 6시간에 가까운 경기 시간을 연속으로 견디지 못했을 거야. 중간에 나가떨어졌을 거라고.”
나달의 이름이 나오자 납득했다는 분위기가 서서히 퍼졌다.
아무래도 흙신에게 범접할 만한 선수가 없었던 탓이다.
“최대한 대진을 피해가길 비는 수밖에 없겠네. 괜히 그를 만나면 답이 없으니까.”
“난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어. 이기진 못해도 체력을 최대한 깎아 놓을 거야. 그래야 다음에 만났을 때 만만하게 보지 않을 테니까.”
“글쎄. 직접 한 번이라도 직접 상대해보면 그 생각도 바뀔 걸. 빅4에 들어가는 선수들은 사람이 아니거든. 그들이 괜히 신으로 불리는 게 아니야.”
니시코리는 아직 메이저 경력이 적은 데이비드를 귀엽다는 듯이 보여 시간이 지나면 자신과 같아질 거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탑랭커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때까지 지혁을 제외하면 모든 선수들이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슬럼프를 맞닥뜨렸으니 말이다.
***
롤랑 본선이 시작하기 이틀 전.
지혁은 오랜만에 다른 파트너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개인 훈련을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숨겨놓은 전략이 세어나갈까 경계한 것이다.
아무리 니시코리와 데이비드와 친분이 있더라고 해도 대회에서 경쟁하는 입장이다 보니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탕!!
물 흐르는 듯한 풋워크를 보여주며 스트로크를 넘기는 지혁.
그 놀라운 퍼포먼스에 코치진들은 휘유!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입이 귀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부정적인 반응은 아닌 것 같았다.
“하하하. 작년 파리에서 보여줬던 실력보다 더 낫잖아?”
“그때도 역대급이라고 난리였는데 우리 지혁이는 항상 기대를 뛰어넘는단 말이야.”
“지난 일주일 동안 이걸 숨기느라 고생을 했겠어. 다른 선수들한테 들키진 않았겠지?”
“너무 감쪽같아서 몰랐을 거야. 그렇게 연기를 했는데 누가 알 수 있겠어. 사정을 몰랐다면 전담 코치인 나라도 속았을 거야.”
“지금 실력으로 어떤 활약을 할지 벌써 기다려지네. 팬들이 얼마나 놀랄까.”
지혁은 아슬아슬한 위치로 떨어지는 공들을 코트 좌우를 왕복하며 대략 30분 가량 받아냈다.
비록 중간중간 휴식을 취했지만 활동량이 상당했던 탓에 호흡이 많이 거칠어졌다.
쿵!! 통. 통. 통.
마지막 스트로크를 라인 안에 집어넣고 움직임이 멈추는 코트.
연신 감탄을 하며 관전을 하던 코치들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박수를 보냈다.
“지혁아, 이번에도 최소 준결승은 따놓은 당상인데? 작년보다 움직임이 더 좋아.”
“한 달 전 마스터즈에서 실력을 숨긴 게 탁월한 선택이었어. 당장 다른 빅4를 만나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야.”
지혁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내심 자신의 실력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군더더기를 따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풋워크의 등급이 오른 덕분에 수비에서 아쉬웠던 점이 많이 보완됐어.’
그래도 나달이나 조코비치와 비교하면 미세하게 부족하다.
지금 같은 경지에 올랐는데도 차이가 나는 걸 보면 그들의 코트 커버력은 적어도 지혁보다 등급이 한 단계 더 높은 듯했다.
역시 우주 방어라는 호칭은 거저 얻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과거와 비교하면 엄청 성장했는데 아직도 따라잡지 못했다니······. 도대체 과거에는 얼마나 차이가 났다는 걸까.’
새삼 빅3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같은 프로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수준 차이가 이렇게나 심하다니.
“본선에 들어가서도 지금처럼만 하자. 그러면 큰 문제없이 상위 라운드에 진출할 거야.”
“새로운 준비한 기술이랑 전략도 있으니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되네.”
“다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코치들의 말처럼 지혁은 이번 대회에서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건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탓이다.
애초에 전략이 밝혀지면 거기에 대한 공략법으로 인해 효용이 급격하게 떨어지지 않는가.
만약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된다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경기를 치르는 도중에 대응하긴 아주 힘들 테니 지혁은 적어도 이번 대회에서 최소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