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리벤지 매치
[게임 델 포트로 2-2.]
3세트가 넘어갔을 때부터 예견됐듯이 지혁은 경기의 주도권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아마 이번에 출전한 대회가 롤랑 가로스가 아니었다면 승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지혁이 차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랜드슬램은 가장 높은 위상을 가진 대회였기에 델 포트로는 본래 기량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초인적인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큰 무대나 달려있는 게 많은 경기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바브린카도 가끔씩 말도 안 되는 실력을 발휘하며 빅3를 8강 근처에서 침몰시키는 킹 슬레이어 역할을 하지 않는가.
지혁은 재수 없게도 그런 경우에 제대로 걸려버렸다.
‘박 코치님의 분석이 절반만 맞았구나. 이 정도면 재활은 거의 완벽한 수준이야.’
왼손의 활용도가 가장 높은 백핸드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걸 보면 육체적인 문제는 절대 아니었다.
부상이 남아있는 몸으로 지금 같은 위력과 컨트롤을 보여주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델 포트로보다 기술적인 완성도가 몇 단계 더 높은 지혁조차 다친 상태에서 재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손목은 자주 부상을 당하는 어깨나 무릎과 다르게 샷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부위였다.
탕!! 탕!! 탕!!
리버스 포핸드로 탑스핀 스트로크를 계속해서 보내는 지혁.
백핸드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그 집요한 공격은 마침내 델 포트로에게서 빈틈을 만들어냈다.
[아웃!]
그의 스트로크가 사이드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것이다.
부상의 트라우마를 의식한 결과였다.
아마 손목에서 고통이 조금씩 느껴지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든 것 같았다.
유리 몸으로 유명한 그에게 다시 부상이 재발하게 된다면 최소한 한 시즌은 날아가버릴 테니 충분히 걱정할 법도 했다.
아아아···.
지혁은 관중석에서 들리는 아쉬운 탄식 소리를 배경음처럼 흘려넘기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지겨운 상대를 무너트리고 경기에서 승리할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일단 수면 아래에서 잠자고 있던 트라우마가 표면으로 나오기 시작했으니 이제 조금만 자극을 줘도 전략의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살짝 밀어주기만 해도 도미노처럼 연쇄효과가 날 게 뻔하니 델 포트로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건 시간문제였다.
‘초반에는 멀쩡하던데 체력이 많이 떨어지니까 더 이상 숨길 여력이 없나 보네.’
그렇게 돌파구를 찾아내자 경기의 진행 속도는 기괴할 정도로 빨리 지나갔다.
스트로크에 중대한 하자가 생겼는데 지혁의 공세를 버텨내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관중들은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자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경기가 이상한데······. 방금까지 팽팽한 경기였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델 포트로에게 우리가 모르는 문제가 생긴 건가?”
“뭔가 변수가 생긴 것은 확실해. 백핸드 에러 숫자가 단순한 실수로 보기엔 너무 많아.”
“그러면 8강은 여기서 끝나겠구나. 나름 명경기여서 좋았는데 마무리가 이렇게 되니 많이 아쉽네···.”
“델 포트로는 맨날 이게 문제야. 거의 2m에 가까운 덩치로 어울리지 않게 유리 몸이라니. 스트레칭이나 내구성 개선이 심각해.”
“골든 보이가 시즌 아웃을 당할 수준의 부상에서 오히려 실력이 상승한 상태로 돌아온 것과 비교되는 모습이네. 역시 다음 세대의 최강자는 그밖에 없겠어. 경쟁자라 할만한 선수들이 전부 치명적인 결함을 적어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게임 리. 5-2.]
7번째 게임이 끝나자 휴식을 위해 벤치로 돌아가는 선수들.
경기가 이쯤 되니 관중들은 이미 결판이 났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제 한 게임만 더 따내면 승리하는 상황이라서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여기서 역전할 가능성은 델 포트로가 아니라 어떤 선수를 데려오더라도 0%에 가까웠다.
‘직접 상대를 해보니까 어째서 델 포트로가 최고의 자질을 가지고도 비운의 천재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건지 알겠네.’
출력이 비상식적으로 높은 탓에 저 거구를 가지고도 버티질 못한다.
아마 나달이나 조코비치 같은 철인이었다면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현대 테니스의 시스템을 생각하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듯했다.
아마 그는 기존의 역사대로 2009년에 ATP랭킹 3위를 찍은 게 커리어 최고 성적이 될 것이다.
계속 경력이 쌓일수록 몸 상태는 더 나빠지기만 할 테니 말이다.
아무리 피지컬 트레이닝과 주의를 하더라도 인간의 몸은 소모품이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내구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태생부터 인자강인 빅3들조차 시즌 중에 항상 자잘한 부상을 달고 살지 않았는가.
[레디.]
그렇게 지혁은 체어의 신호를 듣고 마지막이 될 게 분명한 게임을 하기 위해 코트로 올라갔다.
***
[게임 세트. 매치 리.]
와아아아아!
결국 경기에서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트 초반과 비교하면 상당히 허무한 결말이었다.
[베이스라인을 공략하는 떨어지는 포핸드 위너! 네! 들어갔습니다! 마침내 경기가 마무리됐어요! 롤랑 가로스 준결승에 진출하는 선수는 골든 보이입니다!]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은 경기였습니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이런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하죠. 컨디션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선수의 실력에 포함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괜히 빅4들이 다른 대회에서 완급 조절을 하는 게 아니죠. 기복이 심해서 중간에 탈락하는 게 아닙니다.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부 이유가 있어요.]
[아무래도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부디 US오픈이나 다음 시즌에서 약점을 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군요. 그러면 빅4와 머레이, 델 포트로를 합쳐 6파전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듣기만해도 환상적인 라인업이네요. 제발 그 바람대로 됐으면 좋겠습니다.]
지혁은 경기가 끝나자 반사적으로 델 포트로의 표정을 확인했다.
정정당당한 방식으로 상대를 이긴 게 아니다 보니 내심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비겁하다고 항의를 해봤자 탑랭커들과 전문가들이 누구의 편을 들어줄지 너무나 뻔했다.
하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음······. 걱정한 것보다 훨씬 멀쩡한 얼굴이네. 욕을 먹지는 않겠어.’
프로들 사이에서 델 포트로는 젠틀하기로 유명했다.
테니스 종목이 가진 성격상 대부분의 선수들은 신사들이었지만 그는 그중에서도 성격이 좋기로 유명했다.
두 사람은 인사를 하기 위해 네트 앞에서 재회했다.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지혁의 귀에는 어설픈 영어가 들렸다.
물론 아주 기초적인 단어라 긴 대화를 하긴 힘들 것 같았다.
“좋은 플레이였어. 남은 경기도 잘하길 바랄게.”
“운이 많이 따라줘서 간신히 이길 수 있었네요. 오늘 경기는 저한테도 쉽지 않은 대결이었어요. 다음 대회는 제대로 붙어봐요.”
델 포트로는 지혁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는 모습을 보이더니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고 경기장을 떠났다.
승자 인터뷰가 남아 있으니 패자는 일찍 자리를 비워주는 게 배려였다.
관중들도 탈락한 선수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너무 잔인하고 냉정하지만 이게 프로의 세계였다.
[천재들의 대결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하며 승리한 이지혁.]
[롤랑 가로스 4강 진출에 전문가들은 이미 예상했다는 반응.]
[이변은 없었다. 준결승에 진출한 건 역시나 빅4가 과반수를 차지해.]
[노박 조코비치vs라파엘 나달, 이지혁vs앤디 머레이. 역대급 라인업에 모든 좌석이 순식간에 매진 돼.]
[과연 이지혁은 롤랑 가로스에서 나달의 아성을 깨고 2연패를 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계산한 이지혁의 우승 확률은 30%.]
ㅡ 져도 괜찮으니까 오버하다가 다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작년에도 이기긴 했지만 그 대가로 시즌 아웃까지 당했잖아. 그럴 바엔 롤랑을 내주고 윔블던이랑 US오픈을 가져오는 게 현명한 선택임.
ㅡ 그게 무조건 맞지. 커리어 그랜드슬램 조건도 충족했는데 쓸데없이 집착할 필요 없잖아?
ㅡ 요즘 그랜드슬램 수준 진짜 미쳤네 ;; 전부 괴수들만 남았는데? 10년 전이랑 비교가 안 된다. 지금 시대에 태어난 선수들은 무슨 잘못이냐···.
ㅡ ㄹㅇ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저주받은 세대이긴 하지, 그랜드슬램까지 생고생하면서 올라왔는데 페나조이, 네 사람이 버티고 있으면 암울하긴 하겠다 ㅋㅋㅋㅋ
ㅡ 하드 코트는 조코비치, 이지혁 // 클레이는 나달 // 잔디는 페더러 이 라인업 뚫고 누가 그랜드슬램 우승하겠냐고 ㄷㄷㄷㄷ 나중에 빅4 은퇴하고 나면 최소 30~40년은 암흑기 올 듯.
ㅡ 최근에 테니스 취미를 가진 게 다행이긴 하네. 아마 10년 정도 지나면 지금이 전설처럼 전해질 걸.
***
준결승은 조코비치와 나달의 경기부터 먼저 시작했다.
이번 대결의 승자에 따라 전략의 변동이 엄청나게 되어서 지혁은 중계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조코비치가 올라오는 건데···.’
솔직히 롤랑에서 나달을 다시 만나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혈투를 다시 벌이는 건 어떤 선수도 바라지 않을 테니 말이다.
만약 이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참겠지만 데이터를 기반으로 승률을 계산해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조코비치.]
지혁이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며 복잡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체어 엠파이어의 신호로 1세트가 개시되었다.
‘각성한 조코비치는 절대 만만한 선수가 아니지. 체력적인 부분은 오히려 나달을 능가하니까.’
나달도 강철 체력을 가지고 있어서 같은 프로들에게 외계인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지만 조코비치는 그것조차 뛰어넘어 무한대의 연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선수들을 상대할 때처럼 장기전으로 재미를 보는 건 힘들 것이다.
‘오늘 경기는 아무리 짧아도 3시간이겠지? 기왕 매치가 성사된 김에 6시간쯤 했으면 좋겠네.’
준결승전의 승자가 누가 됐던 탈진한 상태로 올라오게 되면 어쨌든 승산이 올라간다.
지혁은 최대한 난전이 벌어지길 바라며 중계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게임 조코비치 1-0.]
[게임 나달 1-1.]
[게임 조코비치 2-1.]
[게임 나달 2-2.]
······.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데 역시 명성 값을 하는구나.’
처음에는 상대 선수들의 실력을 꼼꼼하게 분석을 하던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멍해졌다.
TV에서 지난 몇 개월 동안 있었던 경기들 중 최고의 대결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완성된 베이스라이너가 서로 맞부딪치자 상상도 못 했던 장면들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사실상 결승전이 벌어지자 롤랑의 시청률은 수직 상승했다.
여기서 이기는 선수가 우승을 차지할 거라는 얘기가 팬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진 모양이었다.
페더러와 지혁을 까먹은 듯한 행동이지만 크게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