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리벤지 매치
오후 1시에 시작한 나달과 조코비치의 경기는 어느새 오후 6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랜드슬램에서 보통 이 정도면 매치 두 번은 소화할 시간이었지만 TV에서는 여전히 스트로크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준결승의 승자가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와아아···.
경기가 길어도 너무 길어서일까. 관중들도 지친 기색이었다.
그 영향인지 응원과 박수 소리도 꽤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까지 쌓아 놓은 커리어와 국적으로 인해 나달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 조코비치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클레이에서 나달을 상대로 5세트까지 오다니 조코비치도 장난이 아니네. 작년과 차원이 달라졌어.”
“이거 잘만하면 지혁이한테 괜찮은 상황이 만들어질 것 같은데?”
전략 회의를 마치고 몇 시간 전에 합류한 코치진들은 지혁의 근처에 앉아서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기를 보는 눈은 다양할수록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임 조코비치 5-5 듀스!]
“하하하. 지혁아, 우승을 거저먹을 수도 있겠어. 6시간 경기를 하고 결승에 올라오면 상대가 누구더라도 본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거야.”
“네. 기대했던 것 이상이네요. 먼저 페더러부터 이겨야 되겠지만 말이에요.”
“그래도 베이스라이너가 유리한 코트에서 나달이랑 조코비치를 상대하는 것보다 낫지. 여러 조건들이 너에게 유리하니까 방심만 하지 않으면 결승 진출도 얼마든지 가능해. 승률을 낮게 잡아도 60% 이상이니까.”
듀스에 들어간 5세트는 마지막이라 그런지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선수들이 워낙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며 서비스게임을 사수했던 탓이다.
그렇게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경기는 13-11까지 가는 초장기전 끝에 마무리되었다.
최종적으로 대결에서 승리를 차지한 건 기존의 강자, 라파엘 나달이었다.
롤랑 가로스 4연패를 달성한 그도 자신의 주무대인 클레이 코트에서 이런 경기를 하는 건 오랜만인지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어렵게 얻은 승리가 더욱 값지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결국 최상의 시나리오는 허락되지 않구나. 뭐, 이것도 나쁘지 않아.”
“나달이 올라왔으니까 미리 준비해 놓은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없겠네.”
“지혁아, 절대 체력을 하루 만에 회복할 수 없으니까 무조건 경기를 길게 물고 늘어져.”
“아마 전환점은 3세트가 될 거야. 그랜드슬램 승수를 하나 더 늘릴 절호의 기회야.”
코치들은 우승이 눈앞에서 잡히는 느낌이 조금씩 들자 바쁘게 움직이면서 서포팅을 했다.
이렇게 좋은 판이 깔렸는데 슈퍼 매치에서 초인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지혁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아마 결승까지 올라가기만 한다면 50:50까지 구도가 맞춰질 것이다.
***
결승 진출자가 확정되고 하루 뒤.
지혁은 예정대로 페더러와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대회에서 꽤 많이 마주쳐봤기에 상대가 황제임에도 크게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이걸 보면 역시 어떤 일이든 경험치가 쌓이면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세트 리.]
‘8강에서 델 포트로를 상대해서 그런가 할만하네.’
실전 감각이 절정까지 올라있는 상태에서 체력까지 받쳐주게 되니 안 그래도 높던 경기력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솔직히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훨씬 난이도가 높은 대진표가 만들어져서 불만이 많았는데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다.
반면 페더러는 쉬운 선수들을 3-0으로 줄줄이 격파하고 온 부작용인지 경기력이 영 신통치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금방 고쳐지겠지만 덕분에 초반 경기에서 큰 이득을 얻었다.
ㅡ 와 ㅋㅋㅋㅋ 고생한 보람이 있네. 이번 경기도 무난하게 이기겠는데?
ㅡ 이지혁이 준결승에서 탈락할 분위기가 아니긴 했지. 이러다가 진짜 나달하고 리벤지 매치 성사되겠다.
ㅡ 나달도 롤랑 가로스 5연패 저지당하고 나서 이를 갈고 나왔을 텐데 무섭네 ㄷㄷ
ㅡ 5연패? 2009년은 페더러가 우승했잖아?
ㅡ 부상으로 부진한 시즌은 제외하고 봐야지. 나달이 기량을 100% 발휘하면 누가 이길 수 있겠냐고 ㅋㅋㅋ
ㅡ 지혁이 이제 페더러 정도는 가볍게 제압하네 ;; 퓨처스에서 활동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만큼 컸누···.
ㅡ 미친 이지혁 퓨스처 뛸 때 봤다고??? 관중도 100명 이하고 영상도 하나도 안 남아 있어서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운 엄청 좋네. 부럽다 ㅠㅠ
ㅡ 쟤 전국체전에 참가한 학생이거나 관계자인 모양이네. 이지혁 그때도 지금처럼 잘했냐? 그랜드슬램에서 활약하는 거 보면 저 괴물이 고등학생이랑 붙는 모습이 전혀 상상이 안 되는데 ;;
ㅡ ㅇㅇ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함. 당시 막 고등학교 입학한 이지혁이 한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던 3학년 2명을 베이글로 찢어버림. 걔들 국내 주니어 랭킹 1, 2위이라서 ATP랭킹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압살해버려서 한동안 엄청 떠들썩했었지.
ㅡ 역시 아마추어일 때부터 차원이 다른 재능러였구나. 상워 랭커들도 못 이기는 선수를 고등학생 사이에 풀어놓은 격이니 얘들도 불쌍하네. 저걸 어떻게 이기냐고 ㅋㅋㅋ
시청자들은 지혁이 경기의 주도권을 잡자 긴장감 떨어진 건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결승에 진출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혁은 그 기대에 부응하듯이 스코어를 아주 빠르게 쌓아갔다.
[세트 리.]
[세트 페더러.]
비록 중간에 세트를 패배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그것도 숨을 고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어준 경기였다.
여러 좋은 조건들과 페더러의 부진이 겹치자 결승에 진출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지혁은 경기에서 승리하며 투자 대비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
[롤랑 가로스 결승전은 이지혁과 나달의 리벤지 매치로 결정돼. 흙신, 나달은 1년 전의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도 복잡한 변수로 인해 승부의 방향을 예측하지 못해.]
[다시 한번 페더러에게 승리한 이지혁, 팬들이 선정한 하반기 시즌에서 조코비치를 제치고 최강자로 뽑혀.]
[라파엘 나달, “작년에 당했던 걸 그대로 되갚아주겠다. 체력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데 나는 멀쩡하다.”]
[이지혁, “이번에는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 우승? 이미 해본 일이라 내가 따로 자격을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준비는 완벽해.”]
롤랑 가로스 결승이 시작되기 전에 주어진 하루의 여유 시간.
지혁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연습 코트에서 다양한 스트로크를 시험하고 있었다.
쓸데없이 많은 체력을 소모할 생각은 없었기에 니시코리나 데이비드를 경기 파트너로 초청하진 않았다.
그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지혁]
근력: 80 민첩: 80 체력: 80 신장: 188cm▲
서브(A+), 포핸드(A+), 백핸드(A+), 풋워크(A+), 외모(A), 트릭샷(A), 찰나(A)
[포인트: 621]
‘이제 그랜드슬램에서 우승을 하더라도 주력 기술의 등급을 올리지 못하는구나. 요구되는 포인트의 양이 차원이 달라졌어.’
분명 결승까지 진출하면서 모인 막대한 포인트를 전부 투자했는데 겉으로 보이는 수치는 변한 게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혁의 실력이 그대로인 건 아니었다.
포핸드의 숙련도가 코치들도 알아차릴 만큼 눈에 띄게 증가했으니 말이다.
지혁에게도 체감이 될 정도니 아마 마지막 경기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A+에서 다음 등급으로 넘어가면 과연 어떻게 될까. 단위가 바뀔 때마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야.’
물론 그때가 되면 다른 기술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지금도 페나조와 붙었을 때 거의 비슷한 전적이 나오는데 여기서 실력이 더 상승하면 제대로 된 적수가 남아있을까?
‘음···.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지혁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다가 일단 신경을 끄기로 했다.
급한 일도 아닌데 부족한 시간을 쓰며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쿵!!
채찍처럼 휘어져서 베이스라인을 가격하는 리버스 포핸드.
한층 날카로워진 그 스트로크에 코치들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오늘따라 포핸드가 정말 좋은데?”
“지금의 좋은 컨디션을 그대로 유지해서 내일 경기에 들어가자. 그러면 나달을 꺾고 우승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야.”
그렇게 1시간가량 연습 코트를 사용하던 지혁과 코치들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건지 훈련을 종료했다.
점검 결과 모든 부분이 완벽했기에 출구를 떠나는 그들의 얼굴에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
결승전 당일.
지혁은 오랜만에 재회하게 된 나달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마스터즈에서 지나가면서 얼굴을 본 적은 몇 있었지만 경기를 하는 건 정확하게 1년 만이다.
‘1년 전에도 똑같은 경기장이었지.’
여기서 생애 최초로 그랜드슬램 우승을 달성하고 큰 부상을 당해서 잊을 수가 없었다.
아마 10년, 20년이 지나도 각인된 기억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재회의 장소로 좋은데? 리, 오늘 경기는 기대해도 좋을 거야.”
“하하···. 여기가 롤랑이라서 무서운 말이네요. 가능하면 윔블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똑같은 조건이니 여기가 더 좋지. 게다가 윔블던에서도 마지막까지 남는다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잔디는 페더러의 무대인데 자신만만하네요. 거긴 저 같은 빅 서버가 유리한 코트인데 말이에요.”
“나름 방향을 찾았거든. 너랑 조코비치가 무섭게 추격을 하는 게 나라고 가만있을 수는 없지.”
나달은 페더러밖에 없던 경쟁 선수가 갑자기 두 명이나 늘어나자 기존의 역사보다 더 빠르게 실력이 성장하는 것 같았다.
변수는 지혁의 등장밖에 없었지만 나비 효과로 인해 영향을 받은 선수는 이미 엄청나게 많아졌다.
니시코리, 데이비드, 라이언, 정민, 요시오카, 조코비치, 페더러, 나달, 머레이 등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선수들도 무서운 속도로 기량을 쌓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요? 조코비치하고 엄청난 장기전을 했잖아요.”“멀쩡하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음···. 그런가요? 6시간은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닌데 신기하네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전부 알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는 지혁.
나달은 괜히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평정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경기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수면 아래에서는 벌써 탐색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두 선수는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과 랭킹, 경쟁하는 타이틀마저 같았으니 이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실력마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막상막하인데 어떻게 상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