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리벤지 매치
어느새 4세트로 접어든 결승전.
선수들이 접전을 벌이다 보니 경기를 시작한 게 벌써 2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체력 저하를 숨기려고 해도 겉으로 티가 날 지점이다.
그 때문에 지혁과 나달의 실력은 경기 초반에 비해 전반적으로 떨어진 게 한눈에 보였다.
탕!!
지혁의 리버스 포핸드에 반원을 그리며 네트를 넘어가는 탑스핀 스트로크.
나달은 그 공격을 똑같은 기술로 받아냈다.
아무래도 그는 포핸드 대결에서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쿵!!
“윽···.”
평범한 샷과 다르게 타점이 높아서인지 무릎과 팔에 걸리는 부하가 만만치 않다.
물론 그건 나달도 마찬가지겠지만 숙련도 차이가 나서 랠리에서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건 지혁이었다.
‘아직도 포핸드에서 밀리는구나······.’
최근 포인트를 많이 투자해서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빅3의 주력 기술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한참 먼 모양이다.
아마 등급이 한 단계 더 오르면 지금의 고민도 해결될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드르르륵. 퉁!
지혁은 랠리를 지속하며 점점 코트 뒤로 물러나는 나달에게 기습적으로 슬라이스를 보냈다.
정직하게 붙으면 불리하게 되는 건 자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네트 앞으로 불러들이면 기본기가 아닌 센스와 순발력, 컨트롤의 중요도가 더 높아진다.
그리고 그런 돌발상황에서 지혁은 모든 탑랭커들 중에서 최고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게다가 풋워크 거리가 늘어나면 체력적인 부분에서도 이득을 볼 수도 있다.
‘빈틈이 보이면 찰나로 끝내 버리자.’
작은 허점이 포착되자 주변의 시야가 느려졌다.
천천히 네트를 넘어오는 공은 바운드가 되기 전에 다시 반대편 코트로 되돌아갔다.
엄청난 속도의 백핸드 발리였다.
[서티 피프틴.]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슈퍼 플레이가 성공했음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베이스라인으로 돌아가는 지혁.
서브를 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여분의 테니스공을 꺼내 바닥에 튕기자 관중들은 뒤늦게 박수를 보냈다.
[백핸드 발리가 나달의 옆을 꿰뚫습니다! 완벽한 패싱샷이었어요.]
[허···. 정말 역전이 나올 수도 있겠는데요? 골든 보이의 경기력이 갑자기 수직상승했어요. 다른 선수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1, 2세트와 차원이 다른 실력이에요.]
[네. 나달에게 밀리던 모습이 완전히 잊혀지는 활약이었습니다.]
지혁은 어렵지 않게 서비스게임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한 과정이었다.
[게임 리 3-1.]
‘저항이 너무 적은데?’
아무리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더라도 방금 패배는 나달답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 압박에 무너질 정도면 그는 지금 같은 명성을 절대 쌓지 못했을 것이다.
‘······설마 4세트를 버리려고 마음먹은 건가.’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지쳐있는 체력을 최대한 회복하고 그나마 온전한 상태로 부딪치는 게 그나마 승률이 더 높을 테니 말이다.
지혁도 장기전을 바라보며 1, 2세트를 버리지 않았는가.
***
[세트 리.]
결국 나달의 압승으로 끝날 것 같았던 경기는 지혁의 활약으로 동점까지 오고 말았다.
패패승승승의 역스윕이 만들어질 전조가 보이자 시청자들의 반응을 난리가 났다.
롤랑 가로스 2연패가 가지는 의미가 절대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잔디나 하드 코트에서 강점을 보이는 지혁이 클레이 코트에서 우승한다면 다른 대회에서 어떤 성적을 얻을지 너무나 뻔했다.
분명 수많은 메이저 대회를 휩쓰는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ㅡ 이지혁이 4세트 이겼다!!! 역전승 각 제대로 뜸!! 이번에 우승하면 그랜드슬램 3회 우승 아니냐?
ㅡ ㄷㄷㄷㄷ 이제 비교할 만한 재능이 없는 듯. 브레이크 없이 계속 승승장구하네 ;;
ㅡ 지금 기세면 커리어 그랜드슬램도 가능하겠는데? 윔블던, US 오픈 우승하면 4개 대회 전부 우승 트로피 얻는 거잖아.
ㅡ 그 정도는 거의 확실하지. 저번처럼 갑자기 부상당하지 않는 이상 통산 10회 우승도 가능할 걸?
ㅡ ㅇㅈ 지금까지 보여준 활약들을 생각하면 최소 페더러급 거물 선수 나오는 거 확실함.
ㅡ 와 ;;; 한국에서 제2의 황제가 나온다고? 솔직히 아시아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ㅡ 지금 19살이니까 최소 10년은 장기 집권할 수 있겠다 ㅋㅋㅋ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데이비스컵 엄청 든든하네
ㅡ 90년대생 선수들 진짜 불쌍하다 ㅋㅋ 저런 괴물이랑 어떻게 경쟁하냐고 ㅋㅋㅋㅋ
ㅡ 그 4명 내버려 두고 남은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지 애초에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이지혁 이 지옥 같은 라인업 뚫고 우승할 수 있는 선수가 없다. 이 4명은 다른 선수들이랑 차원이 다른 클래스임.
ㅡ ㅇㅇ 유명한 테니스 전문가들도 넘사벽 수준이라 최소 5년 동안은 빅4 체제 유지될 거라 했음.
지혁과 나달은 마지막 세트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모든 전력을 쏟으며 경기에 집중했다.
여기까지 와서 힘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
짧으면 30분, 길면 1시간이 지나면 모든 영광은 한 선수에게 돌아갈 테니 말이다.
탕!! 탕!! 탕!!
나달은 이전 세트에서 완급 조절을 하며 체력을 회복한 효과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갑자기 코트 커버력이 장난이 아닌데······. 어디를 공략해야 위닝샷을 넣을 수 있을까’
여러 코스로 스트로크를 보내도 좀처럼 뚫릴 기미가 없다.
상황을 지켜보다가 실낱같은 기회를 잡아채는 지혁.
상대의 허점을 완벽하게 찌르는 크로스샷이 오른쪽 사이드라인에 떨어졌지만 지혁의 귀에는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들렸다.
나달이 초인적인 능력으로 위닝샷을 막아낸 것이다.
그건 오늘 경기에서 지혁이 보여준 슈퍼 플레이에 전혀 밀리지 않는 명장면이었다.
“!!”
관중들은 그 엄청난 광경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놀란 신음이 선수들의 집중에 방해될까 걱정해서였다.
그렇게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경기에 집중하길 잠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랠리의 승자가 마침내 나왔다.
쿵!!
[게임 리 1-0.]
길었던 랠리를 마무리한 건 지혁의 잭나이프였다.
부상이나 에러를 저지를 확률이 높은 고난이도 기술이라 다른 선수들이 그리 선호하지 샷이었지만 컨트롤에 자신있는 선수라면 결정타로 써먹기 딱 좋았다.
괴물 같은 코트 커버력을 가진 저 나달도 한 박자 빠른 스트로크에 헛스윙을 하지 않았는가.
점프를 하며 내려찍는 자세를 하느라 다리가 조금 욱신거렸지만 이 정도 통증이면 충분히 참을만했다.
만약 여기서 랠리가 더 길어졌으면 이것 대신 심장이랑 허벅지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서 골든 보이가 먼저 기세를 가져갑니다. 나달이 브레이크의 문턱까지 도달했지만 결국 한 걸음이 모자랐어요.]
[만약 포티 올이 돼서 듀스에 들어갔다면 리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잭나이프로 위기를 잘 넘겼어요.]
[그런데 저 급박한 상황에서 잘도 저런 샷을 시도했네요. 자칫 실수라도 하면 지불할 대가가 만만치 않은데 대단한 강심장입니다. 저 선수는 두려움이라는 게 없나요?]
[중요한 순간에서 리의 결정력은 최고잖아요. 분명 자신이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결과가 좋았잖아요.]
[저라면 저 상황에서 절대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역시 천재는 평범한 사람과 생각하는 게 완전 다르군요. 하긴 저래야 저 나이에 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는 거겠죠.]
눈을 떼기 힘든 화려한 플레이로 압박하는 지혁과 우직하게 기본기로 밀고 나가는 나달.
선수들의 집중력이 워낙 높았기 때문일까.
경기는 위닝샷을 한 번씩 주고받는 상황이 나오며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후······.”
지혁은 손목과 무릎에서 욱신거리는 고통이 느껴지자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괜히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들키면 더욱 노골적으로 취약해진 부분을 노릴 것이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참으면 돼.’
작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어서 불길한 트라우마가 머릿속을 자극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물론 위험한 상황이 오면 바로 기권을 할 생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상태는 절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게임 나달]
[게임 리]
[게임 나달.]
[게임 리.]
지혁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이를 악물어가며 세트 스코어를 쌓아갔다.
결국 나달의 탄탄한 방어를 뚫어내고 유리한 상황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아웃! 피프틴 서티.]
“어···?”
선수들이 일진일퇴를 하며 5세트 후반부에 들어왔을 때.
갑자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득점이 나왔다.
‘나달이 포핸드 에러를 두 번 연속으로 한다고? 이거 이상한데?’
바운드 위치를 보면 단순히 운이 없어서 생긴 실수가 아니다.
라인에서 저렇게 멀리 떨어진 타구가 나온 건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
의심이 담긴 시선으로 반대편 코트를 주의 깊게 살피는 지혁.
그러자 다리가 가늘게 떨리는 나달의 모습이 보였다.
경기에 집중하느라 눈치 채지 못했는데 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다.
‘······이길 수 있겠구나.’
도무지 쓰러지지 않아서 전략이 완전히 빗나갔나 싶었는데 장기전을 펼친 건 역시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저 상태로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 이제 우승도 멀지 않았다.
탕!! 탕!! 탕!!
지혁은 다시 경기가 재개되자 득점에 집착하지 않고 코트 좌우로 스트로크를 보냈다.
특별한 의도가 담긴 그 플레이에 나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부웅!
결국 사이드라인에 떨어지는 지혁의 크로스샷에 헛스윙을 하는 나달.
관중들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느꼈는지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아······. 나달의 다리가 많이 느려졌습니다. 저런 스트로크를 놓치다니요. 경기 초반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이전 경기에서 조코비치를 상대하느라 너무 무리한 게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6시간이 넘는 초장기전을 펼쳤는데 나달이라고 해도 멀쩡할 리 없죠. 전반적인 조건이 너무 좋지 않았어요.]
[롤랑 가로스의 대진이 이렇게 결승전의 승자를 결정하네요. 만약 ATP랭킹이 조금만 달랐더라도 조코비치를 상대하는 건 골든 보이가 됐을 텐데 말이에요.]
[경기가 이렇게 될 줄 아무도 몰랐으니 어쩔 수 없죠. 아쉽지만 다음 대회를 기약해야 될 것 같습니다.]
경기는 해설들의 말대로 슬슬 승자가 결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지혁이 조금씩 나달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나달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탈진한 상태에서 5세트를 뒤집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게임 세트 매치 리······.]
결국 결승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을 맺었다.
우승 트로피의 차지하게 된 건 모두의 예상대로 지혁이었다.
마침내 롤랑 가로스에서 2연패를 달성하게 되자 경기장을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함성이 쏟아졌다.
지혁은 고생 끝에 나달을 꺾은 게 실감이 나지 않는지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코트 위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