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첫 윔블던
지혁과 니시코리가 연습 경기를 시작하고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연신 놀란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천재적인 센스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괜히 두 선수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천재라고 극찬을 받는 게 아니다.
퉁!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베이스라인을 정확하게 때리는 로브.
네트 앞으로 불러들이자마자 나온 그 절묘한 샷에 니시코리는 혀를 차며 라켓을 늘어트렸다.
쫓아가긴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이 바운드된 위치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짝짝짝짝짝.
관중석의 팬들은 연습 중에 멋진 장면이 나오자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지연과 남자 연예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와! 방금 봤어요? 엄청 멋있는 위닝샷이었어요. 로브를 저렇게 정교하게 칠 수 있다니 역시 이지혁 선수예요. 이걸 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너무 좋아요.””잘 모르겠지만 신기하긴 했어. 그런데 어째 봤던 경기보다 더 재밌는데? 나만 그런 건가?”
“아마 니시코리의 랭킹이 이때까지 상대한 선수들보다 훨씬 높아서 그럴 거예요. 이전 얼마 전에 경기한 선수도 30위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저 일본 선수가 그렇게 잘하는 선수야?”
“네. 니시코리는 랭킹이 무려 16위거든요. 이 정도면 아무리 랭킹 2위의 이지혁 선수라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수준이 절대 아니에요.”
지연의 설명에 출연진과 촬영팀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니시코리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물이라는 걸 깨달아서다.
사실 한국 사람들만 잘 모를 뿐이지 이미 니시코리는 연간 수백억을 벌어들이는 정상급 스포츠 스타였다.
어린 나이부터 투어급 경기에서 우승하는 등 테니스 팬들에게 출중한 재능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혁에겐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규격 외의 인물과 비교하는 건 애초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랠리를 몇 분 더 지속하다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벤치로 들어오는 두 선수.
그러자 코치들이 빠르게 다가와 수건과 물을 건네줬다.
“여전히 무서운 실력이네. 너랑 경기를 하면 저절로 겸손해지는 느낌이야. 내가 어디 가서 비슷한 또래 선수에게 밀린 적이 없는데 말이야. 이건 그랜드슬램 최연소 우승 기록을 갈아치운 너라서 가능한 거겠지.”
“니시코리 케이치고 너무 겸손한 말 아닌가요? 게다가 방금 랠리는 진짜 실력도 아니었잖아요. 최근 성적도 상당히 좋았고요.”
지혁은 엄살 부리는 니시코리의 모습에 속지 않았다.
그의 하늘 높은 자신감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지금처럼 약한 척을 해도 실전에 들어가면 놀라운 경기력으로 부딪쳐 올 것이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방심을 유도해도 니시코리 정도 되는 실력자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짧으면 1~2년, 길어도 3년 안에 ATP랭킹 5위 안으로 들어올 천재를 얕보면 어떤 대가를 치를지 너무나 뻔했으니 말이다.
“···8강에서 만나는 선수가 아마 다비드 페러였지?”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지혁의 말에 묘한 표정으로 말을 돌리는 니시코리.
지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지만 그냥 넘어가 주었다.
어차피 꼬투리를 잡아봤자 얻을 것도 없었다.
“맞아요. 꽤 어려운 상대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어요. 이전 경기들처럼 간단하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요.”
“무려 랭킹 7위의 선수니까 그렇겠지. 별명도 인간계 수문장이잖아. 나이도 너보다 11살이나 많은 베테랑 선수고.”
“그래도 니시코리보다는 상황이 나아요. 조코비치랑 경기가 예정되어 있잖아요?”
“하아······.”
조코비치의 이름이 나오자 니시코리에게서 큰 한숨이 나왔다.
최근 무결점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무시무시한 노박 조코치비의 실력은 탑랭커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나달도 자신의 무대인 롤랑 가로스에서 그를 이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때 6시간의 사투를 하지 않았다면 지혁이 우승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클레이 대회들이 대부분 지나갔으니 앞으로는 조코비치의 시간이 될 확률이 높았다.
“솔직히 어떻게 하면 조코비치를 이길 수 있을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너도 호주 오픈에서 경기를 해봤잖아?”
“뭐, 다시 붙으면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긴 해요.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어서 돌아왔으니까요.”
“작년이었다면 그나마 희망이 있었을 텐데······.”
니시코리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동안 아쉬운 소리를 했다.
이번엔 정말 진심이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
지혁은 뛰어난 실력의 파트너 덕분에 경기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다비드 페러를 대비하기에 충분할 듯했다.
그렇게 훈련이 거의 끝나갈 때쯤, 관중석에서 놀란 기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별명을 말하는 팬들 덕분에 무슨 일인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코비치가 왔다고?”
“······.”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움직임을 멈추는 지혁과 니시코리.
그들은 입구 쪽으로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그러자 조코치비가 코트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니시코리는 다음 경기에서 상대해야 하는 거물 선수의 등장에 긴장을 했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리, 훈련을 하고 있었구나. 연습 코트에서 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행운이네.”
“네. 오랜만이네요. 롤랑 가로스는 많이 아쉬웠어요. 운이 조금만 따라줬다면 결승전에 올라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음······. 이번 시즌은 자신이 있었는데 내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고. 너랑 나달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나 봐. 지금보다 더 분발해야지.”
원래 역사대로라면 조코비치는 2011년에 롤랑 가로스를 제외하고 호주 오픈, 윔블던, US오픈 우승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혁의 등장으로 그의 계획을 완전히 꼬여 버렸다.
물론 성적은 조금 아쉬웠어도 실력이 부족한 건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 앞으로 조코비치는 예정대로 전설적인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그 행보는 아무리 나달과 페더러라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이쪽은?”
“니시코리 케이예요. 다음 경기에서 붙어야 하는 선수잖아요.”
“아. 그렇지.”
“······.”
전혀 안중에도 없는 그 행동에 니시코리의 표정이 굳어진다.
조코비치의 성격이 특별히 무례하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더 비참하게 다가오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압도적인 격차를 생각하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특별한 전략을 준비하지 않아도 니시코리가 이길 확률은 냉정하게 5% 아래였다.
그런 상황에서 조코치비가 더 중요도가 높은 선수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지혁도 16강 상대를 건너뛰고 8강의 다비드 페러를 대비하고 있지 않는가.
“괜찮으면 연습 경기라도 잠깐 할래? 어차피 배정받은 쿼터도 달라서 결승이 아니면 만날 일도 없잖아.”
“음···. 아마 오래 하진 못할 거예요.”
“짧아도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지혁은 조코비치의 설득에 간단히 넘어갔다.
빅3와 연습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유혹을 거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후···. 30분 정도라면 괜찮을 거예요.”
결국 지혁이 승낙의 말을 하자 조코비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일정이 바빴기에 곧바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관중석은 그 모습에 급격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무결점의 조코비치와 골든 보이가 경기를 한다는 건 그만큼 큰 사건이었다.
“겨···경기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와.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런 상황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완전 땡잡았네.”
“조코비치는 우리도 아는 선수잖아. 지금 랭킹 4위 아니야?”
“무려 빅4라고요! 그것도 요즘 엄청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실력자고요.”
“그럼 페더러, 나달이랑 동급이라는 이야기잖아. 엄청 유명한 선수네.”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온 사람들은 뜻밖의 횡재에 호들갑을 떨며 기뻐했다.
그 탓에 니시코리의 존재감이 빠르게 떨어졌지만 거기에 관심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일본인 관중들조차도 지혁과 조코비치에게 전부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탕!
연습 경기는 조코비치의 느릿한 서브로 시작했다.
아무래도 처음은 가벼운 탐색전으로 굳은 몸을 풀 생각인 것 같았다.
힘을 빼고 천천히 랠리를 주고받는 두 선수.
하지만 랭킹 2위와 4위의 실력은 그 정도로 숨겨지지 않았다.
정교한 라켓 컨트롤과 정체 모를 압박감은 관중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역시 빅4는 다르구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니시코리랑 느낌이 많이 달라.”
“아까보다 속도가 느린 것 같은데 이 숨 막히는 긴장감은 뭐지?”
“허···. 저런 코스로도 칠 수 있구나.”
그렇게 팬들이 흥분된 어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유즈키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니시코리의 손을 잡아줬다.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괴물들과 경쟁하기에는 아직 니시코리의 실력은 많이 부족했다.
“케이라면 결국 저 자리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정말 가능할까? 저 둘은 정말 규격 외야.”
“지금까지 누구보다 노력했잖아. 랭킹도 정체되는 구간 없이 꾸준히 올라가고 있으니 그랜드슬램 우승도 멀지 않았어. 케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유즈키는 니시코리의 잠재력을 진심으로 믿으며 지지해줬다.
1년 사이에 그의 랭킹이 급격하게 오른 건 이런 배경이 큰 역할을 했다.
“그래. 결국에는 쓰러트려야 하는 선수들이야.”
복잡한 생각이 드디어 정리된 건지 흔들리던 눈동자가 잔잔해지는 니시코리.
그는 조만간 메이저 대회에서 재회하게 될 경쟁자들의 경기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벌써부터 좌절하고 포기하기엔 은퇴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앞으로 최소 10년은 프로로 활동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꼭대기를 한 번쯤은 찍어봐야 되지 않겠는가.
니시코리는 평범한 선수들처럼 아무런 존재감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긴 싫었다.
단 한 번도 타고난 자질과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대로 패배를 확정 짓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탕!! 탕!! 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격렬해지는 경기.
조코비치가 템포를 올리며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팬들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호주 오픈 결승전이 다시 재연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윔블던에서도 유력한 우승자이니 사실상 이번 대회의 예고편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올해 최고의 활약을 하고 있는 건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쿵!!
“윽···.”
급격한 각도로 튀어 오르는 공.
그 공격에 지혁은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조코비치도 리비스 포핸드를 주무기로 사용해서 재밌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아무래도 몇 개월 사이 실력이 상승한 느낌이었다.
점점 부담이 가중되자 지혁도 더 이상 실력을 숨길 수 없었다.
연습 경기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진지하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