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첫 윔블던
다비드 페러와 8강전을 하고 하루 뒤.
지혁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단 쿼터의 나머지 경기가 자신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기 때문이다.
“설마 송가가 준결승에 올라올 줄이야······.”
윔블던에서 페더러가 같은 빅4가 아닌 선수에게 패배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덕분에 전문가들과 테니스 팬들도 지금 상황에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이번 대회에서 가장 큰 반전이네.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야.”
“확실히 페더러 대신 송가를 상대하는 게 더 낫지. 무게감이 차원이 다르니까.”
“너무 얕보지는 마. 폼이 역대급으로 좋아서 생각보다 까다로울 거야.”
“글쎄. 나는 지혁이가 패배할 것 같은 느낌이 전혀 안 드는데.”
“하긴 시즌 도중에 실력이 상승하는 괴물인데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만약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이런 선수가 있다는 걸 아직도 믿지 않았을 걸.”
경기 하이라이트 장면이 나오는 TV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누는 코치들.
그들의 전반적인 의견은 페더러의 중도탈락이 호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혁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1년 전이었다면 송가는 상대하기 힘든 선수였겠지만 지금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준결승이 가장 어려운 고비였는데 다행이네요.”
“이번에도 대진운이 좋아. 결승에 누가 올라오던 우승할 가능성이 충분해.”
“마지막 상대는 나달 아니면 조코비치죠? ”
“아무래도 조코비치가 될 확률이 높지. 잔디 코트에서 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건 그니까. 아무튼 네가 상성상 무조건 우위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뜻밖의 호재로 인해 코치들 사이에서는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러다가 정말 사상 최초로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거 아니야?”
캘린더 그랜드슬램은 한 해에 호주 오픈, 롤랑 가로스, 윔블던 US 오픈에서 모두 우승하는 것을 뜻한다.
황제라고 불리는 페더러조차 아직 달성하지 못한 대업적.
올해 지혁이 보여준 활약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이때까지 페더러와 나달이 3회 우승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윔블던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그런 걸 생각하긴 이르죠. 지금은 준결승전부터 생각해요.”
“음···. 네 말이 맞아. 그럼 송가에 대한 자료를 가져올게.”
호들갑을 떨던 코치는 지혁의 일침을 듣고 다른 코치들과 빠르게 짐을 뒤졌다.
미리 준비했던 자료들이 전부 페더러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 동안 쓸만한 전략을 새로 짜려면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간만에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놓칠 수는 없었다.
***
윔블던 준결승.
지혁은 스타디움의 중앙에서 송가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관중석의 중간 열에는 한국의 다큐멘터리 출연진들이 보였다.
그들이 런던에서 체류한지도 벌써 10일을 훌쩍 넘었다.
제작비가 제법 많이 들었겠지만 정작 PD는 촬영이 알찼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지혁의 이름이면 시청률은 보장된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와···. 결국 준결승까지 올라왔네요.”
“16강이나 8강에서 탈락하면 촬영이 꼬일 뻔했는데 한숨 덜었어. 윔블던은 이지혁 선수가 처음 출전하는 대회라 걱정을 많이 했거든.”
“천재는 어디서든 적응을 잘하나 봐요. 낯선 환경에도 금방 익숙해지네요.”
윔블던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지혁이 윔블던에서 재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솔직히 메이저 대회 출전 경력이 적은 신인과 아시아와 선수들이 잔디 코트에서 약세를 보이는 건 정말 흔한 일이었다.
하드와 클레이 대회에 집중하고 잔디 대회는 버리는 탑랭커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테니스 종목의 특성상 코트 재질이 달라지면 선수들의 기량 변화가 엄청났다.
만약 지혁이 과거 10년 가까이 프로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는데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송가.]
쾅!!
얼마 후, 송가의 서브로 시작된 경기.
상대는 강력한 샷을 치는 걸로 유명한 선수라서 공은 무서운 기세로 코트에 내려 꽂혔다.
빅 서버라고 해도 믿을 만한 고속 서브였다.
타다다다! 퉁!
지혁은 코트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공을 쫓아가며 간신히 라켓에 맞출 수 있었다.
아직 몸이 완벽하게 풀리지 않아서 시작부터 에이스를 당할 뻔했다.
‘잔디 코트라서 처리하기 더 까다롭네. 나한테도 유리한 조건이지만 은근히 성가시단 말이야.’
바닥이 미끄러워서 바운드 높이가 체감될 정도로 너무 낮았다.
그 덕분에 스트로크 템포도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승부가 워낙 빨리 결정돼서 적어도 롤랑 가로스처럼 체력 저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탕!! 탕!! 탕!!
1세트 초반은 힘과 힘의 대결로 흘러갔다.
살벌한 임팩트 소리가 스타디움을 가득 채우자 관중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윔블던 하위 라운드에서 보던 경기와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임 송가 3-2.]
일진일퇴를 하며 스코어를 쌓아가는 경기.
선수들이 휴식 시간을 맞아 벤치로 들어가자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이 이어졌다.
“준결승이라 그런지 느낌이 다르네요. 며칠 전에 봤던 16강, 8강이랑 비교가 너무 돼요.”
“나도 런던에서 봤던 경기들 중에 오늘이 최고야. 스케줄 때문에 다시 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앞으로 방송으로 종종 챙겨봐야겠는 걸.”
“한국에서도 대회가 있으니까 구경 가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서울에서 챌린저 대회가 매년 열리거든요. 국내 선수들도 많이 참가하고요.”
“오, 가까우니까 한 번 가봐야겠네.”
지연과 남자 개그맨은 여유 시간이 주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말을 하지 못해서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서비스게임이 다시 시작되면 강제로 침묵을 해야 하니 지금이라도 수다를 떨어야 한다.
“그런데 이지혁 선수가 이길 수 있는 거 맞지? 저쪽 선수도 실력이 상당한 것 같은데······.”
“설마요. 아직 경기 초반이라서 그렇지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휴······. 다행이네요. 기왕 런던까지 왔는데 결승전은 보고 가고 싶었거든.”
[레디.]
그렇게 90초가 지나자 관중석은 선수들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다시 조용해졌다.
아직 승부의 방향이 결정되지 않아서 집중도가 가장 높은 시점이라 불편하거나 지루해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지루한 플레이보다 공격적인 장면들이 많이 나와서 그럴 것이다.
쾅!!
모든 준비를 마친 지혁은 코트 중앙의 T존에 플랫 서브를 정확하게 때려 넣었다.
어지간한 탑랭커들이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정교한 컨트롤이었다.
거기에 속도마저 230km를 넘어 버리니 송가조차 서브를 쉽게 처리하지 못했다.
후웅!
[피프틴 러브.]
코트에서 라켓이 허공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체어 엠파이어가 에이스를 알렸다.
송가는 헛스윙을 한 게 조금 민망한지 혀를 가볍게 찼다.
아무래도 이 정도 수준의 서브는 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페더러와 한 경기는 난타전으로 간신히 이겼으니 리턴 실력이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었다.
‘내 서비스게임에서 어려울 건 없겠네. 그런데 페러더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았나 본데? 그가 패배할만한 상대가 아닌데.’
분명 송가가 뛰어난 선수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리면 그저 랭킹에 어울리는 수준이다.
솔직히 빅4와 대적할 만한 강자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윔블던 준결승에 올라온 건 실력이 아니라 운이 많이 따랐던 것 같았다.
‘나한테는 좋은 소식이지. 고생하지 않고 결승에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 적당히 완급 조절을 하다가 경기를 가져오자.’
[게임 리. 5-4.]
우와아아아아!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첫 브레이크가 나오자 박수가 쏟아졌다.
치열했던 선수들의 승부가 드디어 났기 때문이다.
사실 경기는 지혁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간 거였지만 말이다.
그런 속사정은 프로들과 일부 전문가들밖에 눈치 채지 못했다.
쿵!!
[아웃! 세트 리.]
송가는 자신의 에러로 1세트를 내어주자 분에 차는지 라켓을 부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벤치로 돌아갔다.
승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화낼 시간에 몸을 회복하고 전략을 점검하는 게 맞았다.
어두워진 송가의 얼굴을 보면 준결승의 결과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듯했지만 말이다.
[게임 리 2-2.]
[게임 리 4-3.]
[게임 리 5-3.]
[게임 세트.]
선수들의 기량 차이가 너무 현격했기에 2세트의 결과도 1세트와 비슷하게 나왔다.
아니 스코어를 보면 오히려 상황이 더 심각했다.
얼마되지 않던 송가의 팬들은 여기서 역전할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지 응원을 멈추고 깊은 침묵에 빠졌다.
“이지혁 선수가 2세트도 이겼어요! 이제 결승전에 진출하는 것도 시간문제예요!”
“저 무시무시한 송가도 결국 안 되는구나. 도대체 빅4와 일반 선수들 간의 격차가 얼마나 되는 거야?”
“그냥 종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게 편해요. 빅4는 테니스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요.”
“이러다가 만약 우승이라도 하면 우리 프로가 대박 나겠는데? 이지혁 선수의 팬들이 윔블던 우승 과정을 엄청 궁금해할 거야.”
“지금도 시청률은 보장받은 거나 다름없죠. 준우승도 이지혁 선수를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대업적이에요.”
다큐멘터리 촬영팀은 지혁의 엄청난 활약에 흥분한 얼굴로 장밋빛 미래를 점쳤다.
“역시 이지혁이야. 팬들의 기대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어.”
“앞으로도 승승장구했으면 좋겠네. 촬영을 떠나서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운 선수야.”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럴 거예요. 분명 페더러 못지않은 슈퍼 스타가 될 거라고요.”
“최근 분위기를 보면 이미 뛰어넘은 거 아니야? 런던에서 보여준 인기도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잖아.”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페더러는 단순한 테니스 선수가 아니거든요.”
아무리 지혁이라도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연봉 천억이 넘는 페더러의 인기를 고작 데뷔 3년 차 만에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이대로 몇 년만 더 지나면 황제의 자리는 교체될 게 분명했다.
모두가 인정하듯이 지금 뜨는 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지혁이었으니 말이다.
탕!!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3세트가 시작하자 지혁은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경기를 더 이상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경기 중반을 훌쩍 넘는 상태에서 송가에 대한 파악은 이미 끝났다.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패배할 만한 상대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지혁은 빠른 속도로 스코어를 쌓아갔다.
그 과정에서 송가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바꾸기에는 많이 모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