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휴식
[게임 세트. 매치 리.]
마지막 매치 포인트를 장식하는 건 지혁의 포핸드 위닝샷이었다.
조코비치는 경기가 종료되자 깊게 한숨을 쉬더니 지혁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패배의 여운을 어느 정도 털어버린 얼굴이었다.
윔블던 결승전을 진행하는 동안 그가 바닥에 내려쳐서 때려 부순 라켓은 무려 3개나 되었지만 평소 그의 성격은 상당히 젠틀했다.
짝짝짝짝짝.
지혁은 관중들에게 기립 박수를 받으며 네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휴······. 포핸드가 아니었다면 윔블던은 결국 조코비치가 우승했겠네. 아슬아슬했어.’
경기 도중에 실력이 급상승한 게 정말 큰 역할을 했다.
아마 다음 대회에서는 이번처럼 압도적으로 우세한 모습을 보이긴 힘들 것 같았다.
빅4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는 건 아직도 너무나 멀었다.
“리, 우승을 축하해. 넌 트로피를 들 자격이 있어.”
“고마워요. 진심으로 쉽지 않은 경기였어요.”
“이번 매치에서 무조건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너랑 경기를 해보니 그게 내 오만이라는 걸 알겠어. 훈련 강도를 더 높여야겠네. 정상의 자리를 탈환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 말이야.”
강렬한 눈빛을 보내며 말하는 조코비치.
지혁은 그가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앞으로 더욱 골치가 아파질 거라고 직감했다.
이미 최강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조코비치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으니 다음 대회는 훨씬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와아아아아!
관중들은 황금색 트로피와 은색 접시가 진행자들의 손에 들려 경기장에 나타나자 거대한 함성을 질렀다.
단순한 쇠붙이에 불과하지만 저건 모든 테니스 선수들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얻길 바라는 물건이었다.
윔블던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테니스 대회였으니 말이다.
이미 그랜드슬램을 3번이나 우승한 경험이 있는 지혁에게도 윔블던만큼은 특별했다.
그렇게 볼 키즈들과 심판, 선수들이 전부 자기 자리를 찾아가자 수상식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카메라에 잡힌 지혁의 얼굴은 오랜만에 상기되어 있었다.
다른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할 때도 지혁은 담담한 모습이었기에 방송을 보고 있던 팬들은 꽤나 놀란 반응을 보였다.
***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 이지혁, 조코비치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윔블던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다.]
[작년 롤랑 가로스부터 이어진 그랜드슬램 4연패, 과연 사상 최초로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을까?]
[전례가 없는 활약에 외신들과 해외 팬들도 경악해.]
[이지혁 선수가 테니스 팬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로 뽑혀.]
[이번 윔블던 결과로 인해 슬럼프를 겪을 거라고 하던 전문가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제 아무도 골든 보이의 미래를 걱정하지 의심하지 않는다.]
[부상에서 복귀하고 단 한 번의 부진도 보여주지 않은 이지혁 선수, 올해 남아있는 US오픈에서 우승할 확률은 60% 이상으로 예측돼.]
[윔블던 과정을 찍은 특집 다큐멘터리가 이달 중에 KBC에서 방영된다고 해서 많은 팬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ㅡ 지혁아!!! 믿고 있었다고!!!
ㅡ 최근 조코비치는 나달도 찢어버리는 수준인데 진짜 돌았네 ;; 진짜 괴물은 이지혁이었구나.
ㅡ 올해 그랜드슬램 복귀전 치를 때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음 ㅋㅋㅋ
ㅡ 이제 트로피 1개만 남았다. US오픈 우승하면 페더러도 못한 업적을 달성하는 거임.
ㅡ 그러면 그동안 우승 횟수 부족하다고 까던 외국 얘들 전부 입 다물겠네?
ㅡ 애초에 그 말에 공감하던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잖아. 그냥 무작정 우기는데 해외 팬들이라고 동조하겠냐 ㅋㅋ
ㅡ 이지혁 인지도를 생각하면 당연하지. 나 지금 영국 유학 중인데 여기서도 장난 아니다. 어지간한 할리우드 스타는 그냥 발라버릴 수준임.
ㅡ ㅇㅈ 윔블던 열리고 나서 전부 이지혁 얘기만 하더라. 나한테 아는 거 있냐고 물어보고 난리도 아님.
ㅡ 그런데 이지혁 다큐멘터리 촬영했다는데?? 한동안 뉴스나 대회 말고 TV에서 보기 힘들 거라고 하더만 무조건 본방사수해야겠네 ㅋㅋㅋㅋ
ㅡ 왠지 레전드 방송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ㅡ 윔블던에서 우승했는데 그건 기본이고 VOD로 촬영본이나 풀버전으로 올려줬으면 좋겠다.
지혁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는 대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영되었다.
방송국이 시청자들의 관심이 가장 뜨거울 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한 대로 KBC의 특집 다큐는 전례가 없는 초대박을 쳤다.
지혁이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기사거리를 바라는 기자들과 CF를 노리는 기업, 섭외를 원하는 방송국까지 모두가 지혁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짜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아마 체력 회복과 이후 일정을 위해 유럽에 계속 잔류하게 된다면 실망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
윔블던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지혁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고 판단되자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창 특집 다큐가 방영되고 있어서 국내 분위기가 뜨겁던 시점이었다.
솔직히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겠지만 남들 시선을 일일이 신경 쓰며 스케줄을 조절할 수는 없었다.
“지혁아, 요즘 인기가 장난이 아니던데 TV를 틀면 온통 네 이야기밖에 안 나와. 내 지인들도 사인 좀 받아달라고 엄청 부탁하더라.”
“다큐멘터리가 영향이 제법 큰가 보네요. 뭐, 방송이 끝나면 금방 가라앉겠죠.”
“아니, 나는 지금 분위기가 오래갈 것 같아. 섭외나 스폰서 제안이 무서울 정도로 밀려들고 있거든. 이런 적은 네가 그랜드슬램에서 처음 우승했을 때를 제외하면 처음이야.”
휴식 기간 동안 몸이 굳지 않게 가벼운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지혁에게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말하는 코치.
훈련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 시간이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틀 전에 H자동차에서도 스폰서 관련으로 연락이 왔잖아. 이번 윔블던을 기점으로 업계의 평가가 달라진 게 분명해.”
“거긴 나달을 후원하고 있는 곳이잖아요? 게다가 계약 기간도 많이 남은 걸로 아는데요.”
“그만큼 너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그 회사가 나달을 유망주 때 계약해서 워낙 재미를 많이 봤잖아. 스폰서 측이 너를 후원해도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제안이 많이 들어온 거겠지.”
코치는 여러 자동차 브랜드 이름을 불러주며 이게 며칠 사이에 연락이 온 회사들이라고 알려줬다.
차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지혁조차 전부 한 번쯤 들어본 이름들이었다.
“그래서 어떤 곳을 고를 거야? 물론 대부분의 협상은 매니지먼트가 하겠지만 최종 선택권은 너한테 있을 거야. 일단 계약서를 쓰면 그 브랜드 차밖에 못 타니까 잘 생각해봐.”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조건이 가장 좋은 스폰서랑 해야죠. 고민할 것도 없어요. 1년 내내 투어를 다니느라 제가 운전할 일도 없잖아요.”
“······내가 잠깐 잊고 있었네. 너는 얼굴하고 어울리지 않게 재미없는 녀석이었지.”
그 말대로 지혁은 업계 사람들에게 수도승처럼 사는 것으로 아주 유명했다.
주변의 유혹이 엄청났던 걸 생각하면 정말 초인적인 인내심이었다.
또래 선수들은 훨씬 못 미치는 명성을 가지고도 연예인이나 모델들과 사귀면서 유흥을 즐겼으니 말이다.
심지어 같은 아시아 출신의 탭랭커인 니시코리조차도 투어를 다니면서 상당히 많은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았는가.
이건 지혁의 케이스가 확실히 이상한 거였다.
“그랜드슬램 4연패라는 대업적을 달성했는데 이제 조금 여유를 가져도 괜찮지 않아? 휴식도 없이 너무 팽팽하게 살면 갑자기 연료가 모두 소진될 수도 있어. 인간의 정신력은 무한하지 않거든.”
“코치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테니스보다 재밌는 걸 찾지 못했어요. 저에게는 이런 시간이 휴식이에요.”
“허···. 너도 참 대단하다. 하긴 그러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보가 가능했겠지.”
코치는 자신이 졌다고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인이 지금 상태에 만족한다는데 괜히 초를 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걱정하는 것보다 슬럼프에 빠지거나 경기력 부진이 나타나면 그때 가서 본격적으로 대처하는 게 나을 것이다.
“슬슬 시간이 다 됐네요. 그럼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훈련을 시작할게요.”
“알았어.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해.”
휴식 시간이 전부 끝나자 지혁은 잡담을 끝내고 다시 트레이닝에 집중했다.
게으름이라고는 단 1%도 보이지 않는 그 모습에 관계자들은 익숙한 광경임에도 감탄했다.
이 정도로 견고한 멘탈을 가진 선수를 겪는 건 그들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저 에너지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는 3년 동안 저 녀석이 제대로 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맞아. 나이도 어려서 시간도 다른 선수들에 비해 많을 텐데 말이야. 내가 저 위치에 있었다면 절대 저렇게 하지 못했을 거야.”
“그냥 테니스를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해.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대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선수야.”
“그나저나 지혁이를 상대할 탑랭커들은 죽었다고 생각해야겠네. 여기서 더 강해지면 감당할 수 있는 선수들이 있긴 한가?”
그들은 빅4를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는 경쟁자가 없자 마음속으로 탑랭커들의 명복을 빌어줬다.
규격 외의 괴물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죄로 비참한 꼴을 당할게 너무나 뻔해서였다.
코치들은 전부 프로 경력이 10년은 되었기에 팬들이 현재의 테니스계를 황금기라고 말하는 게 마냥 축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황제가 존재하는 시대는 선수들의 입장에서 지옥과도 같았으니 말이다.
탕!!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지혁은 피지컬 트레이닝에 이어서 스트로크까지 조금씩 시험해봤다.
모든 기술들이 차례차례 나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조코비치에게 패배를 안겨준 포핸드였다.
“와······. 그새 운동 수행 능력이 늘어났잖아. 성장기라고 해도 시즌 중에 저게 가능해?”
“···저 포핸드를 가까이서 보니까 더 소름이 돋네. 기술의 완성도가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갑자기 몇 계단을 한 번에 점프한 느낌인데? 페더러랑 나달, 조코비치의 장점을 다 모아놨어.”
“저런 게 날아오니 조코비치가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경기 중반에 갑자기 죽을 쑨 이유가 있었네.”
“아무래도 기존의 분석을 전부 갈아엎어야겠어. 저 정도면 결정적인 순간에 비장의 무기로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