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상하이 마스터즈
‘역시 조코비치인가. 다른 선수였다면 진작 수비가 뚫리고도 남았을 텐데······.’
지혁은 경기가 의도한 대로 풀리지 않자 얼마 전에 개최되었던 US오픈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때의 경기도 지금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조코비치의 공수 밸런스는 이미 다른 선수들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에 진입했다.
그러니 페더러, 나달을 밀어내고 ATP 랭킹 1위를 차지한 지혁에게 패배를 안겨줄 수 있는 거겠지.
쿵!!
오른쪽 코트를 때리고 조코비치의 백핸드 쪽으로 튀어 오르는 탑스핀 스트로크.
상하이 마스터즈에서 위닝샷을 수도 없이 성공시킨 리버스 포핸드였지만 지혁은 랠리에서 우세를 가져오지 못했다.
탕!!
조코비치가 감탄이 나올 만큼 완벽한 백핸드를 선보인 것이다.
그 플레이에 관중석 앞 열의 프로들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솔직히 방금 전 스트로크는 상대가 나빠서 그렇지 충분히 득점을 하고도 남았다.
‘내 포핸드보다 완성도가 더 높은 거 같네···. 저걸 등급으로 매기면 최소 S+급은 되겠지?’
지혁이 아무리 포인트를 많이 모아도 이번 생에 도달하기 힘든 경지였다.
‘아니, 몇 년 동안 지독하게 버티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 물론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는 가정이지만 말이야.’
그 시간에 다른 기술들의 등급을 상승시키면 되는데 가성비가 맞지 않는 어리석은 선택을 왜 하겠는가.
최강의 백핸드를 얻지 못해도 조코비치를 이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애초에 강력한 무기 하나만으로 무적의 선수가 될 수 있었다면 빅 서버가 ATP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경기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서브였으니 말이다.
[게임 조코비치 3-3.]
하아···.
중국인 관중들은 6게임의 승부가 갈리자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수준 높은 경기를 처음 겪어본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위닝샷이 나올 것 같은 긴장감과 무시무시한 스트로크가 주는 압박감이 몇 분씩이나 지속되는데 일반인이 버티기 쉬울 리가 없었다.
“자···장난 아니잖아. 이 긴장감은 대체 뭐야. 이러다가 내가 먼저 탈진하겠어.”
남자는 친구에게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을 보여주며 자신이 얼마나 경기에 몰입하고 있는지 말했다.
“솔직히 이때까지 황태자, 황제 같은 별명이 오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과소평가된 거였어. 저건 그 정도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경지야.”
“···나도 이제 저 두 사람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아. 그냥 다른 선수들이랑 격이 다른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어. 분하지만···저들이 은퇴하지 않는 이상 중국이 1위를 탈환할 일은 없을 거야.”
“정말 경이로운 실력이야. 테니스를 저렇게까지 할 수 있다니···.”
대부분의 관중들은 언론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떠밀려 온 경우가 많았다.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경기장에 왔는데 설마 그걸 충족시키는 걸 넘어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다니.
상하이 마스터즈 결승전은 분명 그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당장은 막상막하인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결국 조코비치가 이길 것 같지? 이지혁이 무슨 짓을 해도 우직한 모습으로 전부 받아내고 있으니까. 분명 그의 기량이 더 높은 게 확실해.”
“글쎄. 나는 황태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데. 저 숨 막히는 공격을 언제까지 막을 수 있겠어. 시간이 지나면 결국 파국을 보일 거야.”
“쯧.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조코비치는 5세트까지 진행되는 US오픈에서도 버텨냈다고. 그것보다 더 짧은 경기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거야. 너 테니스에 대한 안목이 생각보다 부족하구나?”
“하? 두 선수의 상대 전적이 2:1로 이지혁이 앞서고 있는 건 모르나 봐? 위기의 순간마다 더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는 게 이지혁이야. 결국 우승 트로피를 드는 건 그가 될 거라고.”
경기가 워낙 치열하다 보니 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두 가지로 갈렸다.
화려한 퍼포먼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혁, 탄탄한 기본기와 안정적인 플레이를 선호하는 사람은 조코비치.
아무래도 평소 선호하는 취향에 따라 응원한 선수가 나뉜 것 같았다.
***
같은 시간 한국.
상하이 마스터즈 본선 중계권을 구매한 스포츠 방송의 해설들은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번 경기가 리벤지 매치이기도 했지만 현재 테니스계에서 지혁의 진정한 라이벌이라고 할 만한 선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조코비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 조코비치가 이번에도 서비스게임을 지키는 데 성공하네요. 아쉽습니다. 마지막 포핸드가 막히지만 않았다면 브레이크 기회가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저 정도면 충분히 들어갈 만한 샷이었는데 상대가 조코비치라서 막혔어요. 정말 지독한 선수입니다.]
[박 해설님, 도대체 왜 이런 그림이 나오는 건가요? 결승까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요.]
[아마 가장 잘 먹히는 전략이 통하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네? 어떤 전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간단합니다. 이지혁 선수가 리버스 포핸드가 완벽하게 봉쇄된 여파예요. 주무기를 잃은 상태이니 경기의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하는 게 당연하죠.]
ㅡ ㄷㄷ 어째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한데 이러다가 또 지는 거 아니냐? US오픈이랑 느낌이 너무 비슷해서 불안하다. 심지어 코트도 그때랑 같은 하드 코트잖아.
ㅡ 하필이면 리벤지 매치를 조코비치가 제일 좋아하는 무대에서 하네 ;; 클레이가 아니더라도 잔디였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ㅡ 가장 숫자가 많은 게 하드 코트니까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가장 숫자가 많아서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음.
ㅡ 준결승까지만 해도 이대로 쉽게 우승할 거라고 했는데 여기서 제동이 걸리네. 진짜 조코비치는 저걸 어떻게 막아내는 거냐?
ㅡ 와···. 페더러가 나이 때문에 기량 하락하니까 그보다 더한 끝판왕이 나와버리네. 해도해도 너무한다.
ㅡ ㄹㅇ 조코비치만 없으면 이지혁이 메이저 대회 전부 휩쓸어버릴 걸.
ㅡ 얼굴도 밉상이네. 보기만 해도 짜증난다.
팬들은 매번 결승전에서 지혁의 우승을 방해하는 조코비치에게 짜증을 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자국의 스포츠 영웅에게 물을 먹인 선수에게 좋은 말이 나오는 게 이상했다.
그 영향인지 최근 조코비치는 한국에서 역적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도 지혁의 인기가 압도적으로 높아서 외국이라고 특별히 분위기가 다른 것도 아니었다.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T존을 강타하는 지혁의 플랫 서브.
전광판에 238km의 속도가 찍혔지만 평소처럼 에이스가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조코비치가 괴물 같은 반사신경으로 리턴을 성공했기 때문이다.
‘허···. 이것도 막아 낸다고? 정말 준비를 제대로 해왔구나.’
US오픈에서 우승한 이후로 조금은 자만할 줄 알았는데 그런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조코비치의 성실한 성격은 게으름을 절대 용납하지 않은 듯했다.
괜히 그가 원래 역사에서 최강의 선수로 평가받는 게 아니었다.
다른 선수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뼈를 깎는 훈련을 ATP 랭킹 2위가 됐음에도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래.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자.’
마침 마스터즈 대회라서 저번 경기보다 체력 상태도 훨씬 좋다.
그러니 찰나처럼 부담이 많이 가는 기술들도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얼마든지 사용해도 괜찮았다.
‘만약 탈진을 해도 곧 비시즌기에 돌입하니 상황도 최적이네.’
타다다다! 탕!!
지혁은 결심을 굳히고 베이스라인에서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왔다.
스트로크의 위력을 상승시키기 위해서였다.
분명 버티기만 하면 막대한 장점이 있었지만 이런 식의 플레이는 난이도가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탑랭커들 사이에서 사장된 이유가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탕!! 탕!! 탕!! 탕!!
선수들의 거리가 갑자기 줄어든 영향일까.
임팩트 소리의 간격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점점 빨라졌다.
상황이 그러니 체력 소모도 자연스럽게 극심해졌다.
조코비치는 지혁에게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게 해주겠다는 듯이 더 날카로운 각도로 스트로크를 보내며 공세를 유지했다.
아무리 더 강한 압박이 들어온다고 해도 베이스라인 뒤로 물러나 있는 자신이 더 유리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경기 상대가 지혁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앗!”
탕!!
사이드라인을 때리는 다운 더 라인을 넘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쳐내는 지혁.
불안정한 자세로 더 강력한 샷을 치는 건 현실에서 불가능했지만 백핸드는 소름 끼치는 궤적을 그리며 라인 끝에 정확히 떨어졌다.
조코비치와 관중들 모두 예상하지 못했던 슈퍼 플레이였다.
우와아아아아!!
경기에서 하이라이트로 뽑힐 만한 샷이 나오자 관중석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조코비치는 크게 실망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운이 없어서 당했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확률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랜드슬램에서 세 번이나 경기를 해본 경험상 방금 같은 샷은 한 게임에 많아 봐야 한 번 정도였다.
쿵!!
[피프틴 포티.]
“······.”
슈퍼 플레이로 인해 세 번 연속으로 점수를 잃자 급속도록 얼굴이 굳는 조코비치.
그는 지금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끼는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 거겠지.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빨리 첫 브레이크를 가져오자.’
[게임 리 4-3.]
[게임 리 5-3.]
엄청난 출혈을 감수한 결과는 역시나 달콤한 보상을 가져다줬다.
조코비치를 상대로 먼저 2게임이나 앞서갈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세트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거의 이긴 거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다음 서비스게임마저도 지혁의 차례라 모든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세트 리.]
1세트의 승리를 가뿐하게 차지하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벤치로 들어가는 지혁.
여유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사람들의 눈빛은 거세게 흔들렸다.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게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지혁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덜덜덜.
‘단시간에 너무 무리했나······.’
손가락이 떨리는 걸 연기로 어떻게든 감추고 있지만 본인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결승전이 끝날 때까지 들키지 않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파국이 드러날 시기를 최대한 늦춰보자.’
조코비치는 지혁의 천재적인 재능에 놀란 건지 약간 두려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저 심리를 제대로 이용한다면 2세트 중반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선수라면 어려워도 19살이 나이로 그랜드슬램을 네 번이나 우승한 지혁이라면 성공할 확률이 아주 높았다.
‘여유를 주지 말고 여기서 더 몰아붙이자. 2세트로 끝내야 그나마 승산이 있지 만약 3세트까지 간다면 무조건 패배할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지혁은 조코비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한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생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