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상하이 마스터즈
‘···역시 조코비치란 말이야. 내가 생각했던 대로 빅4들 중에 실력이 가장 뛰어나.’
지혁은 2세트가 시작하고 나서도 경기의 주도권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상하이 마스터즈의 우승자는 무조건 지혁이 될 거라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정작 돌아가는 진짜 내막은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지독할 정도로 끈질긴 선수야. 경기가 길어지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건가? 뭔가 단서를 흘리진 않았는데.’
아마도 이게 정상급 선수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감각인가 보다.
관중들은 전혀 모르는 눈치이지만 평소에 비해 훨씬 빠르게 소모되는 체력은 2세트 중, 후반쯤부터 파국을 드러낼 것이다.
그만큼 현재 지혁은 모든 여력을 동원하고 있었다.
쿵!!
[게임 리 2-0.]
“와! 이대로면 이지혁이 이기겠는데? 조코비치가 이번에도 큰 차이로 게임을 내줬어.”
“그런데 원래 이 정도로 잘했었나? 1세트만 하더라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내가 기억하기로 분명히 조코비치 쪽이 미세하게 유리했었는데.”
“음······. 그때보다 지금 경기가 더 치열하니까 아마 탐색전을 한 게 아닐까? 아! 분명히 맞을 거야.”
남자는 추측을 말하다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생긴 건지 자신감을 표출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하기에 꽤나 설득력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혁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무결점의 조코비치도 황태자 앞에서는 안 되는 건가.”
“하드 코트인 상하이 마스터즈에서 이렇게 패배할 정도면 다른 대회의 결과도 그리 다르지 않을 거야. 잔디나 클레이는 환경이 더 불리하니까.”
“그래. 애초에 저 괴물을 어떤 선수가 이길 수 있겠어···.”
그들은 조코비치를 압도하는 지혁의 엄청난 실력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인간 같지 않은 반사신경과 정교한 라켓 컨트롤에서 도저히 패배를 떠올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관중들이 지혁의 승리를 생각하고 있을 때.
경기는 비로소 2세트 중반부를 넘어갔다.
지혁이 체력 저하가 드러날 시기로 걱정하고 있던 지점이었다.
[게임 리 4-2.]
“허억···. 허억···.”
신기와 같은 포핸드 위너로 게임을 마무리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지혁.
최대한 상태를 감추려고 해도 몸이 생각처럼 통제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토록 우려했던 파국에 도달한 모양이다.
웅성웅성.
관중들은 멀쩡한 조코비치의 모습과 대비돼서 그런지 더욱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뭐야? 갑자기 이런다고? 경기 시간이 엄청 길었던 것도 아닌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 아니야? 컨디션이 유독 나쁘다거나.”
“아니, 준결승까지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잖아.”
“설마 조코비치처럼 글루텐 알레르기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탕!! 탕!! 탕!!
많은 사람들이 우려가 섞인 눈빛을 보냈지만 의외로 경기의 주도권은 넘어가지 않았다.
지혁이 부족한 체력을 억지로 쥐어 짜내면서 스트로크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코비치는 자신의 반격이 계속해서 막히자 점점 다급한 기색을 보였다.
퉁!
두 선수가 랠리를 이어가던 중에 갑자기 나온 페이크 드롭샷.
고속으로 날아오는 다운 더 라인의 대처 치고 믿기지 않는 대응이었다.
아마 방금 샷은 지혁을 제외하면 흉내 낼 수 있는 선수가 세 명을 넘지 않겠지.
[게임 리 5-3.]
‘이제 한 게임만 남았구나···. 아슬아슬하지만 경기가 끝날 때까지 버틸 체력은 남아있어.’
네 번의 위닝샷만 성공하면 되니 이제 결승점이 바로 앞이다.
‘조금 더 힘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경기가 잘 풀렸어.’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건 운도 많이 따라줬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동안 실력이 많이 상승한 덕분이었다.
만약 몇 달 전이었더라면 지금 같은 여유를 절대 보여주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코비치도 2세트에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정말 기분 좋은 착각이었다.
계산이 틀렸다는 건 정말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임 세트. 매치 리.]
우와아아아아!
‘조코비치를 이런 식으로 이기다니.’
지혁은 상하이 마스터즈에서 우승을 하고나자 마침내 자신의 실력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다음 대회가 없는 시즌 말에나 가능한 전략이었지만 현시대 최강의 선수를 오늘 같은 방법으로 꺾을 수 있다면 단기전은 무적이라는 뜻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앞으로 상대가 어떤 선수라도 마스터즈에서 무조건 이길 수 있겠네. 아쉽게도 그랜드슬램에서는 통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그랜드슬램은 마스터즈에 비해 2세트가 늘어난 것에 불과해도 경기 시간이 짧으면 2배, 길면 3~4배까지 늘어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체력을 생각하지 않고 플레이하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아마 그런 날이 온다면 순수한 실력만으로 모든 선수들을 제압할 수준에 도달하고도 남을 것이다.
‘충격이 제법 큰가 보네. 하긴 US 오픈에서 우승하고 자신이 빅4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했겠지.’
지혁은 조코비치의 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상대는 경기에서 패배해도 순식간에 멘탈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저 상태로 인사를 하는 건 힘들겠네. 어줍짢게 위로를 하는 것도 웃기니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겠어.’
애초에 조코비치의 실력이 더 뛰어나니 슬럼프를 걱정하는 것도 웃겼다.
당장 내년 1월의 호주 오픈에서 붙으면 누가 이길지 장담하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잠깐 동안 멀뚱히 서 있자 시상식을 진행하기 위해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경기의 내용이 기대 이상이었는지 그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괜찮았다.
“중국 내에서 상하이 마스터즈 시청률이 엄청났다죠? 역시 이지혁에요. 이 정도면 내년에도 어마어마한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말로만 들었던 골든 보이 효과를 제대로 보는군요. 관중 수입도 몇 배로 늘었습니다. 선수 한 명이 늘었을 뿐인데 아시아 테니스계가 이렇게까지 바뀌다니 저는 아직도 믿기 힘드네요.”
“그게 슈퍼 스타의 힘이죠. 100명, 1000명의 선수보다 천재 한 명이 세상을 바꾸는 법입니다. 고작 300위밖에 안 되는 중국 1위의 이름을 누가 알아보려고 하겠습니까.”
“부디 황태자가 앞으로도 지금 같은 활약을 해줬으면 좋겠네요. 우리를 위해서라도요.”
중국인 관중들은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진심으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줬다.
처음으로 정상급 선수의 경기를 보고 나서 엄청난 감동을 받아서였다.
“정말 오길 잘했어. 내가 본 모든 스포츠 경기들을 포함해서 오늘이 최고야. 내 평생에 이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라고.”
“하하하. 티켓을 구하지 못한 내 친구들이 불쌍하네. 쓸데없이 비싼 돈을 지불했다고 비웃던 녀석들의 생각은 틀렸어. 역시 내가 옳았다고.”
“내년에도 꼭 다시 오자. 황태자가 페더러, 나달이랑 하는 경기도 꼭 보고 싶어.”
“그래. 그런데 좌석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방송이 나갔다면 경쟁이 올해보다 훨씬 어려워질 테니까.”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구해봐야지. 만약 예매하는데 실패하면 나는 암표라도 구할 거야. 너는 오늘 같은 경기를 볼 수 있는데 내년에 안 올 거야?”
“···무조건 와야지.”
주최측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관중들의 열렬한 반응에 지혁이 내년에도 반드시 대회에 참가하기를 바랬다.
만약 불참하는 불상사가 생기면 수입이 반토막 나는 끔찍한 일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아마 지혁에게 뜻밖의 사고가 생겨 랭킹이 급락하는 일이 생겨도 와일드 카드를 받는 건 어렵지 않을 듯했다.
***
조코비치와의 결승전을 하고 한 달 후.
지혁은 파리 마스터즈의 우승을 끝으로 2011년 시즌을 마무리했다.
탑10으로 시작한 ATP 랭킹은 여전히 확고부동하게 1위였다.
2위의 조코비치하고 격차가 2,500포인트 이상 났기에 수많은 테니스 팬들은 작년의 나달과 재작년의 페더러와 비슷한 활약이라고 평가했다.
그 당시 두 선수가 잔디 코트와 클레이 코트에서 50연승, 70연승을 달리고 있을 때니 지혁이 이번 시즌을 완벽하게 지배했다고 이야기해도 맞는 압도적인 성적이었다.
마침내 지혁이 빅4의 수좌에 올라간 것이다.
‘물론 영원한 승자가 없듯이 내년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지.’
조코비치가 상하이 마스터즈 결승 이후로 약간 부진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실력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이대로 사라질 선수도 절대 아니었고 말이다.
원래 역사에서 조코비치는 탑랭커들 중 최고의 부동심을 자랑했으니 다음 시즌에서 더 무서운 실력을 가지고 돌아올 확률이 아주 높았다.
‘나달까지 변수로 추가하면 벌써 골치가 아프네. 100% 승리를 장담하기엔 아직 실력이 부족해.’
올해 있었던 4번의 그랜드슬램에서 3번이나 우승한 건 실력보다 운이 많이 따라준 결과였다.
페더러와 나달이 동시에 슬럼프에 빠지고 조코비치도 전성기 초반이었으니 말이다.
‘안정적으로 우승을 하려면 적어도 2~3년은 더 기다려야겠네.’
지혁은 자신의 실력이 과거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상승했음에도 빅4에게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피부로 체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니 테니스계가 20년 동안 3인 체제로 유지되지. 페더러가 마흔 살이 되고 나서도 은퇴를 하지 않는 게 이해가 돼.’
다른 탑랭커들이 피지컬로 극복하기 힘들 만큼 빅4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5년 정도 지나면 결국 내가 최강이 되겠지만 전성기에 쓰러트려야 의미가 있겠지.’
지혁은 빅4들을 제압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대로 가만히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ATP 랭킹 1위를 찍고도 기량 상승에 더 박차를 가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월에 이벤트 경기가 잡혀 있다고 했죠?”
“그래. 상대는 세레나 윌리엄스야. 리나가 너랑 한 경기로 인기를 끌자 흥미가 생긴 거겠지.”
“윌리엄스라···. 상당히 거물이네요.”
여자 단식의 절대자 세레나 윌리엄스는 현재 여자 테니스계에서 페더러 이상의 지배력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였다.
“경쟁자가 없어서 그렇지. 실력 자체만 두고 보면 너보다 훨씬 떨어져. 경기에서 질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애초에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어요. 아무래도 성격 때문에 그런 거죠. 저번 사건도 그렇고 워낙 잡음이 많은 선수잖아요.”
“하긴 저번에 여자 단식의 우승 상금을 남자 단식과 동일하게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었지? 아시아 심판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건도 있었고. 매번 인종 차별 이야기를 꺼내는 선수치고 언행이 맞지 않는 여자야.”
“조코비치도 상금은 실력이랑 대회 인기로 결정된다고 했다가 엄청 곤욕을 치렀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면 이번 기회에 실력 차이를 확인시켜주는 게 어때? 항상 자신이 남자 선수들이랑 실력이 대등하다고 했었잖아.”
“······구미가 당기는 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