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휴식기
지혁은 세레나 윌리엄스와의 이벤트 매치가 시작하기 전까지 한동안 방송국이나 기업들이 제안한 외부활동을 거부하고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
1년 동안 워낙 많은 대회를 출전해서 지친 몸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테니스의 비시즌기는 안 그래도 다른 스포츠에 비해 짧아서 선수들은 이 기간 동안 격한 훈련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탕! 탕! 탕!
“형, 여기는 공용 시설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예요? 혹시···프로 선수들의 훈련장인가요?”
안경을 쓰고 앳된 얼굴은 한 정민은 낯선 풍경의 주위를 연신 둘러보며 말했다.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영재 교육을 받던 그가 마침내 한국으로 귀국한 것이다.
유일한 한국 국적의 닉 키즈가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온 건 슬슬 프로 데뷔를 준비할 시기라서 그랬다.
원정을 다니면서 실전 경험을 쌓으려면 한국에 거주지를 마련하는 게 가장 편했다.
“문 앞에서 설명하는 것보다 네가 직접 보는 게 빠를 거야.”
닫혀있는 문을 여는 지혁.
그러자 훈련장 안쪽의 모습이 보였다.
“······.”
“앗!”
그렇게 정민이 내부를 확인하고 굳어있을 때 갑자기 깜짝 놀란 비명이 들려왔다.
경악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아무래도 사전에 지혁이 올 거라는 소식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높은 사람이나 감독은 무조건 알고 있었을 텐데 참 짓궂은 행동이다.
“여자 실업팀 선수들이야. 얼마 전에 초청을 받았는데 너한테도 꽤 도움이 될 걸.”
“···네. 분명히 그렇겠죠. 경쟁을 뚫고 프로에 데뷔한 분들이니까요.”
“지혁 오빠!”
아카데미 동기인 지연은 지혁을 발견하자마자 연습을 뒤로하고 곧바로 달려왔다.
그녀는 요즘 뛰어난 외모와 특출 난 재능으로 국내 최고의 여자 유망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기에 정민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아무래도 지연의 정체를 단 번에 알아본 모양이다.
하긴 테니스의 인기가 급증하면서 일반인들도 알아보는 경우가 많은데 테니스 선수가 지연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다.
“구, 구지연 선수 맞죠···?”
“어. 맞아.”
“팬이었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오늘 온다고 해서 엄청 기대하고 있었어요! 오랜만이에요!”
정민의 말은 지연의 개입으로 인해 끊어졌다.
마치 홀린 듯이 쳐다보는 게 중3이라는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솔직히 지연은 웬만한 연예인과 맞먹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미래에 한국을 대표하는 탑랭커도 어릴 때는 미숙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아! 올해 랭킹 1위로 마무리한 거 축하해요! 파리랑 상하이 마스터즈도 전부 실시간으로 챙겨봤어요!”
“너도 성적이 대단하던 걸? 기사에도 이름이 많이 나오던데.”
“오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아직은 챌린저 대회를 전전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언젠가는 꼭 그랜드슬램에 출전할 거예요.”
“앞으로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가능할 거야.”
“그럼요. 제 테니스 선생님이 누구인데요.”
환하게 웃으며 답하는 지연.
그녀는 정체기일 때마다 지혁에게 큰 도움을 받았기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웅성웅성.
지연의 동료인 여자 실업팀 선수들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지 멀리서 쑥덕였다.
테니스계에서 지혁의 위상이 워낙 높아 다가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와···. 지연이가 이지혁 선수하고 아는 사이라고 했던 게 정말이었어?”
“저도 얼굴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로 친한 줄은 몰랐어요.”
“역시 천재끼리 통하는 게 있는 건가?”
“저번에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이겠죠. 선수로서의 인기나 수준 차이가 엄청나니까요.”“골든 보이랑 오빠동생 사이라니 부럽다···. 나도 저런 인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계 최고의 선수한테 코칭을 받을 수 있잖아.”
“프로 데뷔부터 성적이 좋았던 이유가 있었네. 저런 선생님이 뒤에 있는데 서키트 준우승을 하는 게 당연한 거였어.”
그녀들은 지연이 억만금을 주고도 얻지 못할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빛을 보냈다.
테니스 선수에게 지혁이 가진 의미는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오빠, 그런데 얘는 누구예요?”
“정민이라고 올해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주니어 선수야. 오렌지컵에서 우승까지 한 재능 있는 녀석이지. 아마 이대로 성장하면 그랜드슬램까지 순식간에 올라올 거야.”
“와! 오빠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주니어 선수는 처음이네요.”
좀처럼 듣기 힘든 지혁의 호평에 정민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지연.
그 시선에 정민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훈련장의 사람들은 정민의 숙맥 같은 모습에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지혁과 지연을 제외하면 전부 한참 전에 성인이 되었기에 중학생의 풋풋한 반응이 반가웠던 것이다.
“아마 너라고 해도 정민이를 이기긴 힘들 걸?”
“네? 아무리 남자 선수라고 해도 제가 중학생한테 질 리가 없잖아요. 키도 이렇게 작은데.”
정민은 고등학생이 되고 183cm까지 크지만 지금은 또래와 비교해도 한참이나 작은 160 초반에 불과했다.
이 부족한 피지컬로 세계권 대회에서 우승을 했으니 정민의 기술적 완성도는 증명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의심스러우시면 경기를 해보면 알겠죠.”
테니스 이야기가 나오자 언제 부끄러웠냐는 듯이 눈빛이 바뀌는 정민.
쭈뼛거리던 모습이 갑자기 날카롭게 바뀌자 주변 사람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 서로에게 좋은 경기가 될 거야. 한 번 해봐.”
“훗. 오빠에게 코칭을 받기 전에 몸풀기로 생각하면 되겠네요.”
“너무 얕보다간 생각지도 못한 패배를 당할 수도 있을 걸?”“설마요. 금방 끝내고 올게요.”
지연은 지혁의 말을 듣고 흥미가 생겼는지 경기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지혁에게 호평을 받은 정민의 실력이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
경기는 평범하게 3세트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레디. 서브 구지연.]
동전을 먼저 서비스게임을 가져가자 먼저 기세를 가져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 지연.
곧이어 하늘로 토스된 공은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반대편 서비스 코트를 강타했다.
비록 남자 탑랭커들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제법 위력적인 플랫 서브였다.
탕!!
“”와아!!””
구경꾼들은 정민이 깔끔하게 리턴에 성공하자 전부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비록 입단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아도 지연의 실력은 실업팀에서 무려 2위였기 때문이다.
괜히 국내에서 천재 소녀라고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쟤가 아직 중학생이라고 했지? 아마추어치고 리턴이 엄청 좋은데?”
“역시 이지혁 선수가 데리고 온 이유가 있었어. 분명히 저 재능을 알아본 거겠지.”
“키가 작은 게 아쉽네. 메이저 대회에서 피지컬이 받쳐주지 않으면 한계가 너무 명확하니까.”
지연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자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가볍게 승리할 거라고 생각했던 경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을 받아서였다.
쿵!!
[러브 피프틴.]
사이드라인을 때리고 코트를 벗어나는 정민의 백핸드 크로스샷.
국내 프로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 그 컨트롤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냈다.
고작 한 포인트뿐이었지만 더 이상 정민을 무시하는 눈빛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제 알겠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네. 그래도 제가 질 것 같진 않네요.”
지연은 위닝샷을 한 번 당하고 나서 정신을 차렸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두 번째 서브를 준비했다.
아무래도 여유를 부리면서 이길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대로 5~6년만 지나면 니시코리 케이와 아시아 최강을 다투는 선수라 그럴까.
정민은 지연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남자, 여자의 차이라고 보기에는 지연의 나이가 3살이나 더 많아서 그걸 변명으로 삼긴 어려웠다.
“···조만간 쟤를 퓨쳐스에서 볼 수 있겠는데? 믿기지 않지만 이미 기술은 완성 단계야.”
“이지혁에 이어서 고등학생 랭커가 다시 나오는 건가.”
“고등부에서 아마추어들이랑 놀 레벨은 절대 아니야.”
“이게 진짜 천재들의 세상이구나···.”
실업팀 선수들은 평범한 유망주와 격이 다른 재능을 가진 정민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범인들이 진짜 천재를 보고 나서 일반적으로 가지는 감정이었다.
ATP랭킹 100위를 찍고 그랜드슬램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압도적인 재능을 보여줬다.
탕! 탕! 탕!
경기는 치열한 랠리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진행되었다.
지연이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하면 정민은 베이스 라이너 특유의 코트 커버력으로 막아내는 장면이 반복된 것이다.
안정적인 그 대처는 벌써부터 재능이 범상치 않게 보였다.
[게임 정민 2-2.]
“이번에도 백핸드가 결정구가 됐네···. 보통 약점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수준으로 그치는데 대단해.”
“저런 백핸드가 있으면 대회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쉬울 거야. 공략할만한 약점이 하나 더 줄어드니까.”
“특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네. 어떤 훈련을 받았기에 저런 거지?”
사람들은 지연의 압승으로 돌아갈 거라 예상했던 경기가 대등하게 흘러가자 정민에게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무리 그동안 국내에서 무명이었던 선수라도 이 정도 실력을 보여준다면 미래를 예측하는 건 너무나 쉬웠다.
[게임 구지연 3-2.]
아슬아슬하게 서비스게임을 지키는 데 성공하고 벤치로 돌아오는 지연.
그녀와 정민은 경기에 완전히 정신이 팔렸는지 바깥 상황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미세하게 정민이가 더 유리하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무난하게 승리할 거야.’
사람들이 승부를 예측하지 못하고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지혁은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경기를 하는 두 선수에 비해 압도적인 실력을 갖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임 정민 4-3.]
[게임 정민 5-3.]
[게임 구지연 4-5.]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경기의 상황은 지혁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강력한 백핸드를 가진 정민이 브레이크를 먼저 가져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베이스라이너가 패배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게다가 정민 같은 선수라면 역전은 더욱 나오기 힘들었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약점을 찾기 힘든 선수는 그만큼 강력했다.
괜히 조코비치와 나달 같은 베이스라이너들이 상위 랭킹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지연이를 상위 랭커로 만들려면 조금 더 신경 써야겠어. 국내에 마땅한 경쟁자가 없어선지 성장 속도가 정체된 느낌이야.’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지연은 특별한 코칭이 없다면 50위 권에 주저앉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실력자이지만 세상은 TOP10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관심을 주지 않았다.
상위 랭커들을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점을 하나 정도 만들어야 했다.
지금 정민이 보여주고 있는 백핸드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