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휴식기
[게임 세트. 매치 정민.]
연습 경기가 끝나고 지연에게 주어진 결과는 세트 스코어 2-0이었다.
한국에서 알아주는 천재 소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점수였다.
누가 아직 프로 데뷔도 하지 못한 중학생의 실력이 이렇게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지혁을 제외하면 정민의 승리를 예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역시 정민이야. 내가 기대했던 대로 이름값을 제대로 하네.’
과연 미래의 탑랭커는 어릴 때부터 실력이 심상치 않았다.
아마 이 정도 재능이 있었기에 차후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되는 거겠지.
“······.”
지연은 패배에 대한 충격이 큰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오늘 경기는 지혁을 제외하면 재능으로 밀려본 적이 없었던 그녀가 처음으로 겪는 위기였다.
“어···.”
경기가 끝나자마자 날카로웠던 눈빛이 완전히 사라지며 어색해진 훈련장의 분위기를 살피는 정민.
지혁은 주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에 초초해하는 정민을 위해 먼저 다가가서 긴장을 풀어주었다.
“잘했어. 작년 아카데미 대회보다 실력이 늘었더라. 당장 퓨스처에 데뷔해도 되겠는 걸?”
“정말요!? 정말 제 실력이 프로에서도 통할까요?”
“충분히. 우승은 힘들겠지만 예선전은 무난하게 통과할 거야. 그럼 너도 ATP 랭킹을 얻는 거지.”
가장 낮은 등급의 대회인 퓨처스도 세계 랭킹이 있거나 와일드 카드를 받지 못하면 64강의 예선을 뚫고 올라가야 했다.
국내 실업팀, 대학팀, 외국 선수들까지 합치면 고등부 선수가 뚫기엔 절대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다.
“휴···. 내년 5월에 대구 퓨처스에 참가해볼 생각이었는데 다행이네요.”
“이어서 열리는 김천, 창원 퓨처스까지 나가면 랭킹이 꽤 오를 거야. 국내 대회는 미국보다 경쟁률이 낮은 편이니까. 그러면 늦어도 9월부터 챌린저급 대회를 간간히 나올 수 있겠지.”
“그래도 형처럼 1년 만에 그랜드슬램에 데뷔하지는 못할 거예요. 형은 호주 오픈 4강까지 모든 경기를 전승으로 올라갔잖아요. 그 기록은 앞으로 절대 깨지지 않을 걸요?”
정민은 지혁의 행보를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목표로 하는 상대가 적당히 잘나야 희망이 있지 고3의 나이로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를 완벽하게 제압한 괴물에게 누가 경쟁심을 가지겠는가.
실제로 대부분의 유망주들은 지혁을 같은 선수로 생각하지 않고 테니스의 신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천천히 올라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메이저 대회에서 지겹도록 만날 거야.”
“정말 형이 말한 대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
사람들은 지연이 패배를 받아들일 시간을 주었다.
굳이 위로를 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이다.
그렇게 연습 경기를 끝내고 휴식을 하길 잠시.
정민은 지혁에게 오늘 훈련장에 온 목적인 코칭 이야기를 꺼냈다.
“체력은 괜찮아?”
“이제 멀쩡해졌어요. 솔직히 1경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몸을 움직이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지연이를 상대할 때 여력을 남겨둔 건가.’
지금 지혁의 생각이 맞다면 정민의 실력은 기존의 생각보다 더 뛰어나단 뜻이었다.
‘직접 확인해보면 되겠지. 경기를 해보면 전부 드러날 테니 말이야.’
아무리 정민이 재능 있는 유망주라고 해도 현 ATP 랭킹 1위 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떤 발버둥을 쳐도 서비스게임 하나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정민의 실력은 랭킹 600~800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 1세트만 해보자. 만약 그걸로 부족하면 조금 더 하고.”
“네! 바로 준비할게요!”
신난 얼굴로 코트 안으로 들어가는 정민.
선수들은 그 모습에 이전과 차원이 다른 관심을 보였다.
프로에게 지혁의 경기를 보는 건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게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평가받는 서브와 스트로크를 가까운 거리에서 구경할 수 있다면 분명 배울 수 있는 게 많을 것이다.
계속 침울한 표정이던 지연도 관심이 생긴 건지 고개를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정민을 어떤 식으로 상대할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서브 정민.]
지혁은 흔쾌히 첫 서비스게임을 양보했다.
애초에 240km에 달하는 서브를 정민이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도 차원에서 하는 경기이니 일단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탕!!
T존을 강타하는 정민의 플랫 서브.
지연과 했던 연습 경기로 몸이 완전히 풀린 건지 꽤나 좋은 코스였다.
‘그래도 내가 최근에 상대했던 선수들과 비교하면 너무 느려.’
어지간한 프로라면 에이스를 당할 서브였지만 공이 지혁의 라켓을 벗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라켓에 정확하게 맞은 공은 적당한 속도로 쭉 뻗어나갔다.
정민을 배려해 위력을 아주 많이 줄인 리턴이었다.
[러브 피프틴.]
워낙 리턴이 절묘한 위치로 떨어져서일까.
정민은 역동작에 걸린 듯 멈칫거리면서 리턴 에이스를 허용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이나 갸웃거리는 게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조만간 퓨처스에 참가할 테니 어디가 약점인지 알려주는 게 좋겠지.’
비슷한 실력의 선수라면 상관없겠지만 탑시드 1~5번의 참가자들의 랭킹은 최소한 200~400위쯤은 된다.
아마 능숙한 베테랑라면 정민의 약점을 무조건 눈치챌 것이다.
탕!! 탕!! 탕!!
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지혁은 전혀 까다로운 샷을 보내지 않고 방어에만 집중했다.
25cm나 차이나는 키 때문에 어른과 꼬마의 대결처럼 느껴졌지만 경기는 제법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모두 지혁이 완급 조절을 하며 봐준 덕분이었다.
“······내 착각인가? 지연이랑 했던 경기보다 실력이 더 나은 느낌이야.”
“잠깐. 설마 그것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고?”
“말도 안 돼···. 정말 그게 맞다면 저 꼬마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하다는 거야.”
“···적어도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수준이겠지.”
실업팀 선수들은 정민의 실력에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훈련장의 구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지연도 복잡한 심정인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한창 경기가 잘 진행되고 있을 때.
턱!!
어떤 전조도 없이 정민의 포핸드가 네트에 걸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실수로 일어난 해프닝이라 생각했지만 상황은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게임 이지혁 1-0.]
1번의 리턴 에이스와 정민이 저지른 3번의 에러로 첫 번째 게임을 가져간 지혁.
브레이크의 내용이 충격적인지 코트 주변은 급격하게 시끄러워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방금까지 잘하던 얘가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 이지혁 선수가 그 부분을 정확하게 공략한 거고.”
“일단 경기를 보면서 기다려보자. 어차피 금방 원인을 알 수 있을 거야.”
지혁은 서비스게임이 넘어온 상황에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 170km 미만의 서브를 사용했다.
아직 중학생인 정민에게 200km가 넘는 속도는 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에이스로 경기가 순식간에 끝나버리면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겠는가.
탕!!
““와···.””
정민에게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선수들은 지혁의 탑스핀 스트로크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생전 처음 보는 수준의 포핸드에 비밀을 파해치겠다는 생각을 모두 잊은 것 같았다.
“저게 ATP랭킹 1위의 실력이구나···. 바운드 위치가 자로 잰 것처럼 라인 위에 떨어지고 있어.”
“게다가 샷의 각도나 스핀량도 이상적이야. 이지혁 선수가 대단한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런 스트로크가 현실에서 가능하다니···. 솔직히 충격적이야.”
경기가 진행될수록 정민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에러의 숫자가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연과 했던 경기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게임 이지혁 3-0.]
“형, 어떻게 한 거예요?”
세 번째 게임을 마치고 벤치로 돌아온 정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지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분명 스트로크의 속도와 코스가 비슷한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역시 실력 때문에 그런 거죠? 형은 저보다 훨씬 테니스를 잘하니까요.”
“글쎄. 잘 생각해봐.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3-0이 나오진 않았을 거야. 아직 모르겠지만 너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거든.”
“···약점이요?”
정민은 지혁이 은근슬쩍 말해준 힌트를 듣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휴식 시간이 끝나고 경기가 다시 시작되자 드디어 뭔가 알아차린 듯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서브 이지혁.]
탕!!
경기의 전체적인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지혁이 한 번의 실점도 허용하지 않으며 압도적으로 이기는 장면이 반복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랠리의 균형은 아주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
[···서티 피프틴.]
사이드라인을 때리는 포핸드 다운 더 라인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지는 경기장.
고작 한 포인트에 불과했지만 이번 경기에서 정민이 처음으로 얻은 득점이었다.
마침내 지혁의 코트 커버력을 뚫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전력을 다했다면 당연히 타구를 놓치는 일은 없었다.
방금 나온 실점은 정민과 비슷한 수준의 풋워크로 제한을 두었기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웅성웅성.
정민은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지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눈치챘구나.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데?’
일반적인 선수였다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패배했을 텐데.
과연 정민의 재능은 대단했다.
같은 한국 선수인 걸 떠나서 정민은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탑랭커가 될 엄청난 천재였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원석을 제대로 다듬으면 니시코리에 필적할 선수가 되어줄 것이다.
지혁은 정민이 지금의 느낌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느슨하게 플레이했다.
점점 경기력이 좋아지는 모습에 코트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게임 리. 5-0.]
비록 너무 큰 기량 차이 때문에 한 게임도 이길 수 없었지만 정민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번 경기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된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마지막 서비스게임이 지혁의 차례인 걸 생각하면 이제 승산이 없었다.
“형, 마지막은 진짜 실력을 보여주면 안 돼요? 빅4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어서요.”
“좋아. 어려운 일도 아닌데.”
서브 4번 정도 한다고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라 지혁은 흔쾌히 정민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가방에서 라켓을 바꾸는 행동을 하자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혁은 정상급 올라운더이자 정상급 빅 서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최근 파리 마스터즈에서 보여준 경기를 생각하면 절대 실망스러운 서브를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상체를 깊게 숙이며 단단히 각오를 다지는 정민.
충분한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되자 지혁의 왼손에 쥐어진 공은 하늘로 휙! 하고 토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