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성장
지혁은 인디언 웰스 오픈의 본선이 시작하기 전까지 준비를 완벽하게 마칠 수 있었다.
당장 조코비치하고 매치를 붙더라도 이길 자신이 생긴 것이다.
마스터즈처럼 3세트 경기는 안 그래도 지혁이 유리한데 이런 상황에서 패배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나랑 조코비치의 랭킹이 1, 2위라 다행이네. 탑시드 때문에 결승까지 만날 일이 없으니까 말이야.”
가장 강력한 적을 마지막까지 미룰 수 있다는 건 정말 엄청난 혜택이었다.
16강이나 8강에서 빅4와 경기가 성사되면 중도 탈락하는 불상사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랭킹이 낮은 선수들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는 일이 거의 없는 거구나.”
만약 하단 쿼터에서 우승을 하려면 조코비치를 이기고 결승전에서 지혁까지 쓰러트려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는가?
요행으로 한 경기를 이기더라도 연속으로 천운이 따르기는 힘들었다.
“결승까지 진출하려면 페더러랑 머레이를 이겨야 하네. 그래도 나달이 배제되었으니까 조코비치보다는 나아.”
머레이는 아직 전성기가 아니었고 페더러는 한참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솔직히 지혁은 이런 조건에서 자신이 중도 탈락할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인디언 웰스 오픈 본선 2라운드 당일.
2012년의 첫 번째 마스터즈는 엄청난 숫자의 팬들을 경기장으로 모았다.
아무래도 작년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호주 오픈을 제외하면 볼만한 대회가 없었던 영향이었던 것 같았다.
와아아아아!!
선수들의 등장만으로 쏟아지는 거대한 함성.
코트에 조금 늦게 도착한 지혁은 팬들의 응원에 화답하면서 경기를 시작했다.
상대는 퀄리파잉을 치르고 본선에 진출한 러시아 국적의 안드레이 골루베프였다.
ATP 랭킹이 고작 145위밖에 되지 않는 선수라 그가 지혁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쾅!!
조금의 자비도 없이 플랫 서브를 T존에 내려꽂는 지혁.
랭킹 20, 30위대의 상위 랭커도 이 고속 서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랭킹 145위의 선수가 리턴을 단번에 성공할 리 없었다.
애초에 230km를 가볍게 전광판에 찍어버리는 빅 서버가 탑100 바깥에 있겠는가?
골루베프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에이스를 당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통. 통. 통.
코트 뒤에서 들리는 바운드 소리.
골루베프는 퀄리파잉과 1라운드에서 전부 승리하고 2라운드에 올라왔음에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혁보다 무려 6살이나 많은 선수였지만 경기력은 나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서비스게임은 정확하게 4번의 서브로 종료되었다.
전부 에이스로 결판난 것이다.
저벅저벅.
순식간에 1게임을 마무리하고 코트를 교체하는 지혁.
관중들은 너무 빨리 진행되는 경기를 따라잡지 못한 건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뭐야? 벌써 서비스게임이 끝났다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았잖아?”
“역시 ATP 랭킹 1위랑 145위를 붙여놨는데 제대로 된 경기가 나올 리 없지. 프로가 아마추어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처참하네. 이것도 나름 장관이라면 장관이야. 어딜 가서 이런 경기를 볼 수 있겠어.”
“솔직히 저 러시아 선수가 불쌍하네. 경기 상대를 잘못 만난 죄로 이게 무슨 꼴이야.”
웅성웅성.
관중석은 골루베프가 서브를 시작하기 전까지 한동안 시끄러웠다.
탕!!
[SERVE SPEED: 117MPH]
탕!!
[러브 피프틴.]
“허···. 리턴 에이스?”
“마지막 희망인 서브도 전혀 안 먹히는 것 같네.”
“이러면 차라리 기권하는 게 낫지 않나? 경기를 하는 의미가 없잖아.”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웃음을 내뱉는 사람들.
지혁은 괜히 시간을 끌지 않고 빨리 경기를 끝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게 상대를 더 배려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트 리.]
1세트는 당연하게도 6-0, 베이글로 종료되었다.
너무 원사이드한 경기에 골루베프의 눈동자는 이미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몸풀기도 안 되는구나. 그냥 서브 연습이나 한다고 생각하자.’
감각을 다듬는데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지만 체력을 아끼게 됐으니 지금 상황이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1시간도 되지 않아 끝나버린 본선 2라운드 경기.
안드레이 골루베프는 체어 엠파이어의 마지막 판정이 내려지자 도망치듯이 코트를 떠났다.
6-0, 6-0 더블 베이글을 당한 상황에서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관중들은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몇 초도 되지 않아 상대 선수를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진정한 주인공인 지혁을 앞에 두고 조연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후우···. 진짜 장난이 아니네. 골든 보이가 어째서 랭킹 1위인지 알겠어.”
“언제쯤 전력을 다하는 경기를 볼 수 있을까?”
“최소 8강 정도는 되야겠지. 그쯤 되면 랭킹이 낮아도 10~20위일 거야.”
“이런 경기를 두 번이나 더 봐야 한다고? 티켓값이 아까우니까 32강이랑 16강은 건너뛰어야겠다. 차라리 적당한 실력을 가진 선수의 경기를 보는 게 훨씬 낫겠어.”
***
인디언 웰스 오픈이 8강까지 진행되는 동안 지혁이 신경 쓸만한 변수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지혁, 노박 조코비치, 라파엘 나달, 로저 페더러, 니콜라스 알마그로, 질 시몽, 존 이스너, 후안 마르틴 델 포트로 등 대부분 예상하고 있던 명단의 선수들만 남은 것이다.
앤디 머레이가 16강에서 질 시몽에게 의외의 패배를 당해 탈락하긴 했지만 거슬리는 장애물이 알아서 사라져준 격이니 이건 오히려 호재에 속하는 소식이었다.
‘드디어 제대로 된 경기를 할 수 있는 건가? 너무 쉽게 후반 라운드에 진출하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네.’
최선을 다할 만한 상대가 한 명도 없어서 실전 감각이 아직도 정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미 대회가 후반에 들어섰는데도 말이다.
‘랭킹 12위의 질 시몽이라면 어느 정도 버텨줄 수 있겠지. 송가나 가스케하고 경쟁하는 선수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너질 확률은 아주 낮으니까.’
지혁이 다음 경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속으로 계산하고 있을 때.
박 코치는 지금 상황에 격세지감을 느끼는지 어딘가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세 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네. 이제 마스터즈급 대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승권에 진입하는구나. 이게 불과 3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니···.”
부상 때문에 강제로 시즌 아웃을 당한 걸 빼면 지혁은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승승장구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무결점의 노박 조코비치.
이 관문만 통과하면 2000년 초반에 페더러가 그랬던 것처럼 테니스계를 완벽하게 점령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상황을 보면 그게 언제가 될지 예측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매번 준결승, 결승까지 진출해도 빅4 때문에 생각처럼 우승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지금까지 네가 보여준 성장 속도라면 금방 추월할 수 있을 거야.”
“다른 선수들이 계속 제자리에 머무른다면 그 말이 맞겠죠. 하지만 현실은 다르잖아요. 빅4의 실력은 작년에 비해 확실히 상승했어요.”
박 코치가 지혁의 황금빛 미래를 장담한 것과 다르게 그랜드슬램의 우승 트로피 경쟁은 아주 치열했다.
백핸드를 S등급으로 만들어도 확실하게 승리할 자신이 없는데 벌써 자만하는 건 말도 안 되었다.
‘지금도 경기에서 이기려면 5시간이 넘어가는 혈투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더 강해진다니 진짜 괴물은 내가 아니라 조코비치야.’
***
인디언 웰스 오픈 8강 당일.
지혁과 질 시몽은 서로 랠리를 주고받으며 1세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확실히 다른 선수들이랑 다르긴 하네. 어이없는 위닝샷이 나오는 경우가 없어.’
사전 빌드업을 통해 강력한 결정구를 보내야 득점이 조금씩 나온다.
철옹성 같은 베이스라이너의 수비에 지혁의 기분은 오랜만에 신이 났다.
무조건 이길 수 있는 상대와 경기를 하는 건 아무런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 시몽 2-2.]
와아아아아!!
눈을 즐겁게 하는 선수들의 접전에 뜨거운 환호성을 보내는 관중들.
지혁은 그 분위기에 취해 점점 자신의 경기 수준을 높였다.
탕!! 탕!! 탕!!
레이저를 닮은 일직선 궤적을 그리며 코트 좌우를 반복하는 스트로크.
숨통을 조이는 압박감에 관중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변했다.
[서티 피프틴.]
“이게 탑랭커들의 대결이지. 며칠 전에는 엄청 실망스러웠는데 드디어 볼 만한 경기가 나왔네.”
“그래도 승부가 뻔하긴 해. 골든 보이가 고작 질 시몽한테 패배할 선수는 아니잖아?”
“그게 아쉽지. 앤디 머레이라면 통쾌한 역전극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이번 대회에서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게 불행이었어.”
쾅!! 퉁!!
220km가 넘는 지혁의 고속 서브에도 질 시몽이 에이스를 허용하지 않자 관중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타다다다다!
경기의 승부가 단번에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코트에서는 선수들이 바쁘게 풋워크를 하는 모습이 자주 나왔다.
넓은 범위를 뛰어다니며 스트로크 대결 중심으로 경기가 진행된 것이다.
실력 있는 탑랭커들의 대결은 보통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게 정상이었다.
심지어 조코비치랑 하는 경기들은 다른 탑랭커들과 하는 게임들보다 보통은 2배, 길면 3~4배 이상으로 늘어지는 일이 많았다.
서로의 코트 커버력으로 위닝샷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구가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까. 요즘 조코비치의 코트 커버력은 나달의 우주 방어보다 한 수 위야.’
그렇게 지혁이 경기를 진지한 자세로 집중하기 시작하자 팽팽하던 균형은 조금씩 변화의 징조가 보였다.
랭킹 12위의 질 시몽에게 지혁을 꺾을 만한 능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쿵!!
“으윽···.”
강력한 헤비 스핀이 걸려있는 탑스핀 스트로크는 베이스라인을 가격하고 무시무시한 각도로 튀어 올랐다.
지혁이 리버스 포핸드를 절묘한 위치에 떨어트린 것이다.
정교한 컨트롤과 수준급의 위력이 합쳐지자 질 시몽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위닝샷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의 풋워크는 아주 조금씩 스트로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랠리에서 손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 리 3-0.]
자신의 미래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건지 거친 호흡을 내쉬며 인상을 찌푸리는 질 시몽.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 나름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의외성이 높은 변칙 플레이까지 동원했다.
물론 꼼수가 지혁의 정수를 꺾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원래 탄탄한 기본기 앞에서는 사도가 통하지 않는 법이었다.
이게 조코비치에게 퍼펙트, 무적, 무결점이라는 별명들이 붙은 이유였다.
완성된 베이스라이너를 쓰러트리는 건 그만큼 끔찍하게 어려웠다.
‘페더러하고 준결승전을 하기 전에 몸풀기로 충분한 경기였어.’
경기 감각을 절정으로 만들어줬으니 이제 상대에게 최고의 경기력으로 보답을 해줘야겠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