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187화 (187/241)

187화. 예상 밖의 행운

[게임 세트! 매치 리! 6-3, 6-3.]

질 시몽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선수답게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였지만 결국 지혁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지 못했다.

스피커로 무덤덤한 체어 엠파이어의 목소리가 들리자 질 시몽은 붉어진 얼굴로 한동안 씩씩거리며 화를 가라앉혔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경기를 내준 것이 꽤나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경기 도중에 부숴버린 라켓이 몇 개가 벤치 옆에 굴러다니는 모습이 관중들의 눈에는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저 ATP랭킹 12위의 무시무시한 탑랭커조차도 골든 보이 앞에서는 그저 무력한 선수일 뿐이었다.

“질 시몽은 8강까지 모든 경기를 2-0으로 격파했는데······.”

“심지어 그 앤디 머레이마저 16강에서 탈락시켰잖아. 이번 웰스 오픈에서 그의 컨디션은 변명할 여지없이 최상이었어.”

“그만큼 두 선수의 격이 다르다는 거겠지. 같은 빅4가 아니라면 리와 경쟁할 수 있는 선수가 없다는 게 이번에도 증명됐어. 결국 우승자는 빅4 중에 나올 거라고.”

“그나마 볼만한 경기였다는 게 조금은 위로가 되네···. 적어도 베이글이 아니었으니 말이야.”

일방적인 경기였음에도 이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관중들.

지혁은 비록 프로에 데뷔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테니스 팬들 사이에서 이미 절대적인 강자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대회 성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완벽하게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그랜드슬램을 네 번이나 우승한 선수를 누가 얕잡아 보겠는가.

그것도 승률이 90%가 넘는 현 ATP랭킹 1위를 말이다.

“골든 보이의 준결승, 결승 상대는 당연히 페더러하고 조코비치겠지?”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그들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겠어?”

“휘유···. 호주 오픈도 그렇고 굵직한 대회들의 꼭대기는 무조건 빅4들의 대결이구나.”

“사실 우리도 그걸 노리고 플로리다까지 온 거잖아. 워낙 호평이 자자하니까.”

“맞아. 골든 보이의 결승 경기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한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랭킹 12위와 한 경기도 이 정도인데 그 위의 대결은 얼마나 대단하는 걸까.”

그들은 며칠 뒤에 열리는 빅 매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표정을 지었다.

철저한 사전 계획 덕분에 티켓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이때까지 지혁이 경기력으로 팬들을 실망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8강전이 끝나고 다음 날.

지혁과 그의 코치들은 준결승 대진표를 보고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기 결과가 기존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기 때문이다.

별다른 장애물 없이 무난하게 성사될 빅 매치가 빗나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탓인지 실시간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테니스 팬들도 어리둥절한 반응이 주류였다.

“설마 머레이에 이어서 페더러까지 중도 탈락할 줄이야···. 진짜 슬럼프가 심각하긴 한가 보네.”

“그럼 준결승에서 지혁이가 만날 선수는 존 이스너인가? 이 선수 키가 208cm였지? 엄청난 거인이구만. 물론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고속 서브를 칠 수 있는 거겠지만.”

“작년 마라톤 경기가 기억나네. 윔블던에서 니콜라스 마위랑 한 경기.”

“아! 그 11시간 5분짜리를 말하는 거구나. 정말 끔찍했지. 지혁이랑 하는 경기는 그러면 안 되는데.”

“허···. 상대는 고작 랭킹 22위야. 아무리 페더러를 탈락시킨 선수라도 그럴 황당한 일이 생기겠어?”

코치들은 냉정하게 존 이스너의 전력을 분석하며 지혁의 승산을 계산했다.

애초에 두 선수의 실력 차이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 났기에 결론은 오래가지 않아 나왔다.

최대한 변수를 고려해봐도 지혁이 질 확률은 10% 미만이었다.

“존 이스너는 서브 하나만 가지고 있는 원툴 선수라서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나도 동감이야. 랠리에 들어가면 지혁이가 간단하게 밟아버릴 수 있을 거야. 만약 약점을 극복했다면 진작에 랭킹이 10 계단은 올랐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어.”

“그나저나 미국 선수들은 앤디 머리도 그렇고 전부 무식한 피지컬을 가지고 있네.”

“서브가 240, 250km이면 뭐해. 다른 탑랭커들에 비해 풋워크가 둔해 빠져서 스트로크가 반푼인데. 빅 서버의 시대는 한 물 간지 오래야.”

논쟁조차 없는 몇 차례의 대화 끝에 나름의 합의점이 나오자 코치들은 지혁의 생각을 직접 물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제가 질 것 같지는 않네요. 솔직히 8강에서 만난 질 시몽이 몇 배는 더 까다로운 상대예요. 그는 공수의 밸런스가 탑 10급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선수였거든요.”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했구나.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겠어.”

“이번 인디언 웰스 오픈은 여러모로 운이 좋네요. 결승에 올라오는 게 조코비치, 나달 둘 중에 누구라고 해도 제가 여러 부분에서 더 유리하겠어요. 최종 라운드에 체력하고 전략을 아끼고 진출할 수 있을 테니까요.”

“대진운도 실력이야. 탑 시드는 ATP 랭킹으로 결정되는 거잖아. 네가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대회를 나간 보상이지.”

승리가 확실하다고 판단되자 지혁과 코치들의 분위기는 빠르게 화기애애해졌다.

경기 도중에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패배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영향인지 내일 바로 존 이스너와 준결승을 치러야 했음에도 긴장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은 보너스 경기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만. 이럴 때는 조코비치가 서브가 느린 게 많이 아쉽네. 오랜만에 정상급 빅 서버랑 대결하는 경험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글쎄요. 고속 서브까지 장착한 조코비치라. 저는 상상도 하기 싫네요. 지금도 전반적인 기량이 밀리고 있는데 그런 괴물은 저도 이길 자신이 없어요.”

“아······.”

***

인디언 웰스 오픈 준결승 당일.

지혁은 경기가 시작하기 전, 208cm의 거구인 존 이스너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역시 사이즈가 엄청 크구나. 몸무게가 110kg를 넘는다더니 근육도 장난이 아니야. 저 몸으로 랠리가 정말 가능한가?”

빠른 순발력이 요구되는 테니스에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날렵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존 이스너의 체형은 키를 감안하고 봐도 덩어리가 어마어마했다.

과연 서브 253km의 세계 신기록을 달성한 피지컬 괴물다운 모습이다.

“스트로크도 정면대결을 하면 힘에서 밀리겠는 걸? 포핸드 속도가 장난 아니겠어.”

물론 연습 경기도 아닌데 실전에서 제자리 랠리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코트 전체를 활용하는 플레이를 하면 분명 존 이스너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빠른 시간 내에 탈진해버릴 것이다.

저 거구를 움직이려면 체력이 평범한 선수들보다 훨씬 많이 소모될 테니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서브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 내가 얼마나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지혁은 솔직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라 꽤나 기대가 되었다.

어차피 패배할 확률이 극히 낮으니까 즐기기만 하면 될 것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이스너.]

그 바람이 통한 것일까.

준결승전의 첫 서브는 이스너에게로 돌아갔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두 선수의 모습은 20cm에 달하는 신장 차이 때문에 상당히 대조적으로 보였다.

지혁도 나름 188cm의 장신이었지만 존 이스너랑 같이 서게 되니 니시코리 같은 단신의 선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휙! 쾅!!

생소한 타점에서 번개처럼 쏘아지는 플랫 서브.

한 박자 빠르게 T존을 강타하는 공격에 지혁은 멈칫거렸다.

[피프틴 러브.]

쾅!!

[서티 러브.]

두 번 연속으로 에이스가 나오자 관중석에서는 작은 감탄이 흘렸다.

탁월한 리턴 실력과 수준급의 풋워크를 가진 지혁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와···. 골든 보이도 이스너의 서브를 바로 받아내지 못하는구나. 저 녀석도 인간이었어.”

“애초에 저런 공을 인간이 칠 수 있긴 해? 나는 잔상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던데.”

“그가 무적이었다면 아직도 랭킹 22위에 머무르겠어? 약점이나 공략법이 있으니까 20위 근처를 맴도는 거겠지.”

“하긴 그 말이 맞네···.”

관중들의 생각처럼 존 이스너의 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1게임이 종료되기도 전에 리턴이 나온 것이다.

무서운 굉음을 내며 코트에 내려 꽂힌 서브는 지혁이 뻗은 라켓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퉁!!

하지만 워낙 다급하게 움직인 탓에 방향까지 조절하지는 못했다.

타구가 정면으로 날아갔으니 지금 상황에서는 바로 반격을 당해 점수를 내주어도 변명하기 힘들었다.

타다다다다!!

무너진 자세를 유려한 동작으로 회복하며 센터 마크로 달려가는 지혁.

좌, 우 어느 방향으로 스트로크가 날아오더라도 처리하기 힘들었지만 포기하는 건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봐야지.

[서티 피프틴.]

“······어?”

몇 초 후, 지혁은 체어 쪽에서 생각지도 못한 판정이 내려지자 잠깐 동안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코트 중앙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스너의 발리가 떨어진 줄 알았다.

데구르르르.

‘하···. 네트에 걸렸구나. 이런 기본적인 실수를 해? 무식한 힘에 비해 컨트롤은 형편없다고 하더니 진짜였네. 나라면 무조건 위닝샷으로 연결했을 건데.’

저 피지컬로 세계 랭킹 22위 머무르는 건 전부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저렇게 결정력이 떨어지니 머리 위에 20명이 넘는 탑랭커를 이고 있는 거겠지.

존 이스너는 상대 선수 쪽에서 버티기만 한다면 알아서 자멸해주는 스타일이었다.

지혁이 아닌 다른 탑랭커들에겐 버티는 것조차 헬 난이도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가장 큰 무대인 그랜드슬램이라고 해도 최대 240~250km의 서브를 리턴할 수 있는 선수가 많을 리 없었다.

‘모든 게임에서 이길 필요도 없이 한 게임이면 충분하니까 세트를 가져오는 건 식은 죽 먹기겠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그것보다 더 쉬운 상대야.’

코트 커버력도 약한데 결정력까지 애매하다?

컨디션이 미친 듯이 좋아서 퍼스트 서브 성공 확률이 급증하지 않는 이상 이스너가 이길 확률은 0%에 수렴했다.

‘딱 양학용 선수구만. 아마 어중간한 탑랭커들에게는 이스너가 사신 같은 존재겠어.’

지혁은 상대 선수의 바닥이 드러나자 자그마한 걱정마저 완전히 덜어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봐도 지는 그림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경기를 즐기면서 결승전을 준비하면 될 것이다.

‘그래도 기왕 하는 김에 조금 더 기다려보자. 어디 가서 이런 서브를 경험하겠어.”

어차피 공격적으로 플레이하지 않아도 베이스라이너처럼 묵묵히 버티다 보면 승기는 넘어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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