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예상 밖의 행운
지혁이 자신의 승리를 100% 확신한 것과 다르게 1세트의 스코어는 한동안 팽팽하게 유지되었다.
아무래도 존 이스너의 서브를 수월하게 리턴하려면 약간의 적응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명색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빅 서버인데 아무런 준비 과정도 없이 간단하게 받아칠 수 있겠는가.
몸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경기 초반에 지혁이 고전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쾅!!
[게임 이스너 4-3.]
서비스게임을 에이스로 마무리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벤치로 걸어가는 이스너.
관중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이스너의 활약을 보고 놀란 건지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이전 경기에서 페더러를 탈락시키더니 이러다가 골든 보이까지 제압하는 거 아니야? 돌아가는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 않은데······.”
“그런데 이스너가 이렇게 잘했었나? 이때까지 이스너는 로딕의 마이너 버전이었잖아.”
“같은 미국 선수라서 팬들이 묶어준 거지 냉정하게 따지면 그것도 엄청 높게 잡아준 거야.”
그들의 말처럼 ATP랭킹 1위를 달성한 업적과 그랜드슬램 우승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앤디 로딕은 고작 랭킹 20위대의 이스너와 이름이 같이 거론되기에 격이 맞지 않았다.
“혹시 잠재력이 폭발하는 시기가 온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마침 나이도 테니스 선수의 최절정기인 20대 중반이야.”
“정말로 그게 맞다면 대사건인데. 미국 선수가 메이저 대회의 우승 경쟁권에 들어간다는 뜻이니까.”
“이스너는 프로 데뷔 때부터 재능을 주목받던 유망주였어. 비록 테크닉이 부족해서 몇 년 동안 랭킹이 정체됐지만 고질적인 랠리의 취약점만 보완된다면 앞으로 골든 보이 못지않은 대기록을 세울 수 있을 거야.”
미국인 관중들은 존 이스너가 지혁의 8강 상대인 질 시몽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주자 기대가 잔뜩 담긴 눈빛을 보냈다.
최근 빅4를 제외하면 지혁과 동수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서브 이스너.]
사람들의 열광적인 응원과 뜨거운 시선에 취한 탓일까.
이스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경기를 다시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서비스게임을 브레이크당할 확률은 극도로 낮았다.
‘다른 경기들처럼 골든 보이의 수비를 한 번만 뚫어내면 1세트를 가져올 수 있어. 일단 스코어를 상대보다 앞서게 되면 남은 경기는 쉽게 풀릴 거야.’
쾅!!
하지만 언제까지 지혁이 고속 서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러브 포티.]
탕!!
[게임 리 5-4.]
지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브레이크를 가볍게 따내었다.
방금까지 고전하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과였다.
““······.””
이스너의 허무한 패배에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경기장.
미국인 비중이 높은 관중석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이번 서비스게임은 이스너의 차례였는데 한 포인트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고속 서브가 하나도 먹히지 않았어. 골든 보이의 리턴 동작도 완벽했잖아.”
“이렇게 빨리? 아무리 그래도 적응하는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
쿵!!
[인! 포티 피프틴. 세트 포인트 리.]
지혁은 이스너의 살벌한 포핸드를 더 위력적인 백핸드로 되받아쳐서 세트 포인트를 얻어냈다.
이스너는 208cm의 큰 키와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었기에 라켓이 뒤로 밀릴 정도로 스트로크가 강력했지만 테니스는 피지컬 만으로 이길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비록 속도는 느려도 샷을 상대방이 예측하지 못하는 위치에 떨어트릴 수 있다면 그게 실전에서 훨씬 더 쓸모가 있었다.
아······.
와아아아!!!
탄식과 함성이 섞여서 들려오는 관중들의 목소리.
힘대힘이 아닌 순수한 테크닉으로 이스너를 제압하는 모습은 마치 거인을 쓰러트리는 것처럼 보였기에 관중들은 더욱 큰 인상을 받았다.
감탄한 표정이 여기저기서 보이는 게 이번 경기로 진정한 재능이 무엇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스너도 다른 탑랭커들이 느끼기에는 불합리할 수준의 재능충이었지만 지혁은 그 수준마저 아득히 초월해버렸다.
[아! 골든 보이의 다운 더 라인이 1세트의 마침표를 찍네요. 세트 포인트에 어울리는 위닝샷이었습니다. 빈틈을 완벽하게 찔렀어요.]
[스코어가 6-4니까 아주 미세한 차이였네요. 조금만 분발했더라면 이스너가 이길 수도 있었겠습니다. 먼저 브레이크를 당한 게 이번 패배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우리 그냥 터놓고 말하죠. 솔직히 미세한 차이는 아닐 겁니다.]
[······네. 그렇긴 하죠. 저 무시무시한 서브와 스트로크를 여유롭게 받아냈으니까요.]
한 해설이 이스너의 실력을 부풀리지 않고 현실적인 평가를 내놓자 나머지 해설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진짜 생각을 실토했다.
여기서 억지로 의미 없는 좋은 말을 늘어놓더라도 시청자들이 바보처럼 속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방금 전 세트에서 지혁이 보여준 모습은 평범한 선수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오늘은 페더러와 했던 경기처럼 반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낮겠네요.]
[그렇겠죠. 리는 경기력의 기복이 거의 없는 선수잖아요. 제가 기억하기로 뜬금없는 패배를 당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걸로 압니다. 아직 대회 참가 횟수가 적다고 해도 상당히 특이한 선수죠.]
[아무래도 그게 프로들 중 가장 높은 승률을 가진 이유인 것 같네요.]
[아마 피지컬, 테크닉은 물론 플레이 스타일의 공수 밸런스까지 완벽해서 그럴 겁니다. 리는 이론적으로 가장 완벽한 선수예요.]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많이 돌기는 했죠. 약점이나 아쉬운 부분이 없는 선수라고요.]
그렇게 해설들이 본심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지혁은 남은 경기에서 이스너를 어떤 방식으로 상대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대략 90%는 파악한 거 같네. 더 이상의 변수는 없겠어.’
이스너의 서브는 모든 선수를 이길 수 있는 무적의 기술이 절대 아니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어째서 상대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도 어중간한 랭킹에 머물렀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서 실력이 더 개선된다고 가정해도 그랜드슬램에서 우승을 다툴 일은 없겠는데? 2세트도 비슷하게 하면 되겠어.’
[플레이어 레디. 서브 이스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작한 경기.
이전 세트가 총합 10게임으로 종료되었기에 2세트에서도 첫 서비스게임은 이스너의 것이었다.
쾅!!
이스너의 플랫 서브는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T존을 강타했다.
코트를 뚫어버릴 듯한 살벌한 굉음에 볼 키즈들이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저 무식한 서브에 맞는다면 멀쩡할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거의 30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봐온 타구들이었지만 볼 키즈들에겐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느끼기에 지혁과 이스너의 준결승전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괴수들의 대전이었다.
탕!! 탕!! 탕!! 탕!!
지혁은 마치 1세트를 재연하듯이 이번에도 랠리를 길게 이어갔다.
드문드문 이스너의 초강력 포핸드가 날아왔지만 철벽 같은 수비를 뚫어내지는 못했다.
[게임 리 1-0.]
“또 브레이크네···.”
“처음부터 브레이크가 나오다니 오늘은 이스너가 이기기 힘들겠어.”
“후···. 그럼 그렇지.”
내심 언더독의 반란을 기대하던 관중들은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자 하나, 둘씩 기대를 접었다.
[게임 리 2-0.]
와아아아아!
거기에 지혁의 슈퍼 플레이마저 간간히 나오자 그 속도는 더욱 가속되었다.
[역동작을 노리는 골든 보이의 드롭샷이 이번에도 성공합니다. 이 득점으로 경기의 쐐기를 확실하게 박아버리네요.]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플레이였습니다. 리는 어째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력이 증가하네요. 일반적으로 떨어지는 게 정상인데 말이에요. 역시 언제나 저희의 예상을 뛰어넘는 선수입니다.]
그렇게 경기는 힘과 기술의 대결로 흘러갔다.
지혁이 의도적으로 그런 그림을 유도한 것이다.
아마 정면으로 부딪쳤다고 해도 결과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너가 250km의 서브를 칠 수 있다고 해도 지혁의 240km짜리 고속 서브를 리턴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단지 지금처럼 경기에서 승리했을 때 더 매력적인 상황이 만들어져서 이런 선택한 것뿐이었다.
***
타다다다다!!
빠른 속도로 코트를 달리는 발소리가 들리길 잠시.
탕!! 하고 라켓에 맞은 타구는 사이드라인 위를 가격했다.
지혁이 자랑하는 포핸드 크로스샷이었다.
이것도 정확한 컨트롤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지 그렇지 않다면 아웃이 되어서 상대에게 점수를 헌납했을 것이다.
[게임 리 5-3.]
“후우···.”
마침내 준결승이 구부능선을 넘어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지혁.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고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1게임만 더 승리하면 인디언 웰스 오픈 결승 진출이 확정된다.
‘6-1이나 6-2로 끝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내 생각보다 경기가 많이 어려웠어.’
전부 이스너가 승기가 넘어간 상황에서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전력을 다한 탓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서브가 연속해서 떨어지니 지혁이 아무리 집중을 하더라도 한, 두 경기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면 베이글을 달성하고 싶었지만 이스너는 어드벤티지를 가진 상황에서 게임을 내줄 정도로 만만한 선수가 아니었다.
‘그래도 계획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체력은 많이 아꼈네. 딱히 긴 듀스에 들어간 적도 없고 세트 스코어도 2-0으로 끝나가니까 말이야.’
쾅!!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은 서비스게임은 아쉽게도 이스너의 차례였다.
경기를 시작한 지 이제 막 한 시간이 지나서 그의 서브는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그랜드슬램에서 5세트 경기도 하는 선수가 고작 2세트 후반부에서 체력이 전부 고갈될 리가 있겠는가.
이대로 3세트를 전부 소화한다고 해도 이스너가 탈진하는 상황을 보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피프틴 올.]
[서티 올.]
존 이스너는 이번 게임에서 아껴둔 실력을 전부 발휘할 생각을 한 건지 생각지도 못한 여러 가지 플레이들을 선보였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껴둔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티 포티. 매치 포인트 리.]
그렇게 길었던 경기는 마침내 매치 포인트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유종의 미를 얻기 위함일까?
지혁은 마지막 득점을 어떤 선수도 흉내내기 힘든 기가 막힌 슈퍼 플레이로 마무리했다.
그 완벽한 스트로크에 관중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찬사를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게임 세트. 매치 리.]
작게 들리는 바운드 소리가 코트 뒤편에서 울려 퍼지자 체어 엠파이어는 커다란 목소리로 경기 종료를 선언했다.
그것과 동시에 경기장을 뒤흔드는 거대한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비대칭 전력끼리 부딪쳤기에 결과적으로 싱거운 결말이 나왔지만 오늘 경기는 나름 볼만한 장면들이 많았다.
예전부터 힘과 기술의 정점이 부딪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하는 팬들이 많았는데 이제 궁금증이 해결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