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앤디 머레이
롤랑 가로스 본선이 시작하고 며칠 후.
지혁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코트가 클레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128, 64, 32강을 아주 간단하게 통과했다.
사실 지금 지혁의 랭킹과 실력을 생각하면 이건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빅4가 16강 이전에 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정민이도 꽤 잘하고 있네요.”
테니스 기사를 보며 중얼거리는 지혁.
근처에 있던 코치는 그 말을 듣고 전혀 동감하지 않는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 너무 기준이 높은 거 아니야? 국내에서 전례가 없는 활약이라고 물론 너를 제외해야겠지만 말이야.”
“이번이 세 번째 퓨처스였죠?”
“대구, 창원, 김천 오픈 순서니까 맞아. 그런데 네가 프로 데뷔조차 하지 않은 애송이한테 큰 관심을 가지는 걸 업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야 네 안목이 증명됐네. 나도 정민이 대단한 재능을 가진 녀석인 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정민은 첫 프로 대회인 대구 퓨처스에서 4강, 창원 퓨처스에서 준우승의 성적을 얻었다.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고1이 이만한 활약을 보여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이미 국내 테니스 업계와 팬들 사이에서는 구지연을 뛰어넘는 천재가 나타났다고 떠들썩했다.
아무래도 남자 단식의 경쟁률은 여자 단식과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벌써 놀라긴 일러요. 정민이는 18세부를 졸업하기 전에 주니어 그랜드슬램 1~2개 정도는 우승할 걸요.”
“주니어 그랜드슬램? 그건 네가 밟아온 경로랑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러면 혹시···? ”
코치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생각이 떠올라 말문이 턱 막혔다.
한국에서 제2의 골든 보이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혁이 어린 나이에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와 동급으로 올라서고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왔다.
주목할만한 재능을 가진 주니어 선수들은 무조건 한 번씩은 거쳐가는 호칭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지혁을 대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만 18세 이하의 선수들 중에 ATP랭킹 50위 안에도 들어가는 인물도 없는데 현 세계 랭킹 1위와 어떻게 비교를 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듯이 대부분의 유망주들은 탑랭커의 기준인 100위대에 부딪쳐 그 근처를 한참 동안 맴돌았다.
솔직히 주니어 그랜드슬램에서 우승 경력이 있는 선수라도 이 구간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혹시 정민이 빅4급 재능을 가진 선수라는 거야? 너처럼 데뷔 1년 만에 그랜드슬램 4강까지 올라가는 그런 괴물 말이야.”
“네? 아무리 그래도 1년은 무리죠. 메이저 대회에서 4강 안에 들어가려면 최소한 탑10 정도의 실력은 있어야 하잖아요.”
“휴···. 그렇지? 하긴 그럴 리 없지. 너 같은 천재가 한국에서, 같은 세대에 나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대충 이형석 선수랑 비슷한가 보구나. 그 정도만 해도 엄청 대단한 자질이지.”
국내 테니스의 레전드인 이형석은 지혁이 나타나기 전까지 한국 역사상 최강의 선수였던 만큼 코치의 말은 정말 과분한 평가였다.
“이형석 선수보다 니시코리랑 비교하는 게 맞을 거예요.”
“”······.“”
지혁의 담담한 목소리에 급속도로 조용해지는 주변.
코치들은 처음으로 정민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를 듣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도 그런 게 니시코리 케이가 어떤 인물이던가.
무려 현 ATP 랭킹 9위이자 지혁의 뒤를 이어서 아시아 넘버 2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최고의 천재이다.
재수 없게 지혁이라는 괴물에 가려져서 그렇지 니시코리는 연수입 300억이 넘는 초대형 스포츠 스타였다.
그런 슈퍼 스타와 이제 막 퓨처스에 데뷔한 정민이 동급이라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네가 선수를 보는 안목은 정확하기로 유명하긴 한데···. 그래도 정말 정민이 탑10까지 올라올 재목일까? 너는 남자 단식에서 랭킹 10위 안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
코치의 말대로 직접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정상의 자리에 도달한 지혁이 그 어려움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지혁은 이미 몇 년 후의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정민을 니시코리와 동급으로 놓을 수 있었다.
“지금 아무리 말로 해봤자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을 거예요. 그냥 1~2년 정도 지켜보세요. 그러면 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걸요.”
“훗. 그래. 이번에도 네 예상이 맞을지 궁금하네.”
설명할 생각이 없다는 태도를 무덤덤하게 밝히자 빠르게 미련을 버리는 코치들.
어차피 이대로 정민이 니시코리급의 탑랭커로 성장해도 지혁과 경쟁할 수준은 아니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같은 빅4가 아니라면 제대로 된 라이벌이 될 수 없었으니 말이다.
***
지혁은 다음 날의 16강 경기도 3-0으로 아주 가뿐하게 승리했다.
한창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기량을 랭킹 28위의 선수가 조금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정민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김천 오픈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만들어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퓨처스 우승.
마치 지혁이 연상되는 그 놀라운 성적에 한국 언론은 이미 정민을 지혁의 후계자로 낙점 짓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영향인지 얼마 전까지 무명이었던 주니어 선수는 졸지에 국내 한정으로 네임드 테니스 선수가 되어버렸다.
“쯧. 8강전은 제가 제일 불리하네요.”
송가, 알마그로, 델 포트로 대신 앤디 머레이의 이름이 적혀있는 대진표를 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는 지혁.
오랜만에 재회하는 영국의 테니스 영웅은 요즘 전성기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기에 앞서 거론한 선수들에 비해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원래 역사에서도 머레이는 2012~2016년 동안 그랜드슬램 우승 3회, 준우승 5회를 해낸다.
그러니 지금 지혁이 하고 있는 우려는 나름 근거가 있는 생각이었다.
비록 남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준결승에서 조코비치, 나달이랑 만나지 않는 대가라고 생각해. 아무리 지옥의 대진이라고 해도 그것보단 훨씬 낫잖아.”
“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네요.”
“그나저나 지금 테니스계가 미쳐 돌아간다는 게 이 대진표에 그대로 드러나네.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빅4를 제외하면 이 명단에 적힌 선수들을 전부 꺾고 우승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정말 무서운 시대야···.”
지혁의 코치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빅4와 같은 시대에 프로 활동을 하는 선수들을 불쌍하게 생각했다.
솔직히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정상을 찍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어요. 괜히 여유를 부리다가 탈락하기라도 하면 망신이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 분석대로라면 널널하게 이길 수 있을 거야. 그것보다 중요한 건 결승에서 만날 선수가 누구냐야. 나달, 조코비치 둘 중 누구로 결정되든 절대 만만한 상대는 없으니까.”
“일단 다음 경기부터 집중할게요. 결승에 진출해야 그 걱정도 의미가 있잖아요.”
“뭐,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코치는 이미 머레이를 한참 전에 뛰어넘은 지혁이 약한 소리를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지혁의 생각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어차피 분석과 전략을 짜는 건 코치진들의 일이었다.
***
롤랑 가로스 8강 당일, 필립 샤틀리에 경기장.
지혁과 머레이는 녹색의 관중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클레이 코트에서 재회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두 선수는 나름 인연이 있었기에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리, 너랑 다시 붙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는구나. 대회가 롤랑 가로스인 게 조금 아쉽지만 무대를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요즘 활약이 대단하던데요? ATP 포인트도 작년에 비해 많이 올랐고요.”
“정작 우승은 몇 번 못해서 별로 의미는 없어. 너랑 조코비치가 그랜드슬램을 완벽하게 지배했잖아.”
지난 몇 년 동안 머레이는 워낙 이리저리 치였기에 지혁의 칭찬에도 우쭐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랜드슬램에서 눈에 띄는 성적을 얻지 못한 것을 담아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리 세계 랭킹이 높아봤자 메이저 대회 우승 성적이 없는 선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에 이어서 오랫동안 4위를 지켜온 머레이가 지혁 대신 빅4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오늘은 저번처럼 쉽지 않을 거야. 이번 경기를 위해 준비를 많이 했거든.”
“재밌겠네요. 기대하고 있을 게요. 저도 가만있던 게 아니라서 머레이를 실망시키진 않을 거예요.”
“누가 너한테 실망하겠어. 매번 기적을 써내는 골든 보이를 말이야.”
두 선수는 체어 엠파이어가 시간이 다 되었다고 알릴 때까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렇게 가벼운 랠리를 하길 잠시.
드디어 지혁과 머레이의 8강 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쾅!!
시작과 동시에 광속으로 내려 꽂히는 서브.
분명 상위 랭커들 중에서도 비교할 상대를 찾기 힘든 수준의 살벌한 타구였지만 바운드 속도를 감소시키는 클레이 코트의 특징 때문에 머레이에게 에이스를 따내는 상황은 나오지 않았다.
이래서 클레이가 빅 서버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서브와 강력한 스트로크의 위력이 감소하는 롤랑 가로스는 베이스라이너에게 너무나 좋은 환경이었다.
탕!! 탕!! 탕!!
서비스게임의 첫 포인트는 에이스가 나오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랠리로 접어들었다.
머레이의 플레이 스타일은 카운터 펀쳐였기에 경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따분하게 흘러갔다.
상대 선수에게서 확실한 빈틈이 포착되기 전까지 단단한 방어 태세만 지루하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그다지 재미가 없는 편이라 테니스 팬들은 이런 장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피프틴 러브.]
[피프틴 올.]
[서티 피프틴.]
[서티 올.]
‘미치겠네···.’
일진일퇴를 하며 팽팽하게 스코어가 유지되는 경기.
지혁은 이럴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생각이 맞아떨어지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직 극초반에 불과했지만 마치 조코비치와 경기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원래 역사에서 빅4의 자리는 머레이가 차지하게 되는 만큼 그의 실력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머레이는 빅4 중에서도 가장 방어적으로 플레이하는 선수라 골치가 아파.’
코트 커버력 자체는 조코비치, 나달이 더 나았지만 공수의 비중이 한쪽으로 쏠려서 위닝샷을 따내는 게 더 까다로웠다.
그 과정에서 장시간의 랠리가 동반되니 체력을 무지막지하게 소모하는 건 이미 정해진 미래였다.
‘부디 5시간을 넘지않기 만을 않기를 빌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