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앤디 머레이
[게임 머레이 4-4.]
경기를 시작한 지 20여분, 1세트는 어느새 중반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지만 머레이는 여전히 카운터 펀쳐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먼저 공격적으로 나올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상대가 실수할 때까지 지독하게 버티는 디펜시브 베이스라이너.
더 지독한 나달이나 조코비치가 아니라면 좋아할 선수가 없는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통. 통. 통.
베이스라인에서 공을 튕기며 전략을 점검하는 지혁.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아직 표정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선수들 중 한 명에서 승기가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속 서브랑 백핸드가 거슬리네.’
브레이크를 성공할만하면 자꾸 이 두 기술에 발목을 잡혔다.
몇 달 전에 상대했던 존 이스너가 그냥 무식하게 힘이 센 선수였다면 앤디 머레이는 힘과 기술을 모두 겸비한 천재 플레이어였다.
‘이대로 기세를 살려주면 경기가 재미없을 텐데···. 일단 약점인 멘탈을 흔들어볼까.’
정신력이 강하기로 유명한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에게는 절대 통하지 않을 얕은 수법이지만 상대가 머레이니까 만약 운이 좋다면 먹힐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이전 경기에서 이 방법으로 이겼고 말이다.
쾅!!
속으로 결론을 내린 지혁은 경기의 템포를 급격하게 올렸다.
더 아슬아슬하고 공격적인 플레이로 상대에게 여유를 주지 않은 것이다.
“으어엇!”
탕!!!!
기합을 내지르며 백핸드를 치는 머레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스트로크는 과연 괴력을 가진 선수다운 위력이었다.
아마 평범한 탑랭커였다면 이런 공세를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했겠지.
탕!!
하지만 역동작이나 허점을 공략한 샷도 아닌데 지혁이 위닝샷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최강의 백핸드를 가진 조코비치한테도 이겨냈는데 이 정도 스트로크쯤이야.’
상식적으로 조코비치에게 그렇게 당했는데 그동안 얻은 교훈이 없겠는가.
정상급 베이스라이너의 파훼법은 이미 코치들과 질리도록 연구했다.
아무래도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하려면 필연적으로 나달, 조코비치를 꺾어야 했기 때문이다.
탕!!! 탕!! 탕!!! 탕!!
지혁도 고속 서브를 사용할 수 있는 선수라 어디 가서 힘으로 밀린 적이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랠리는 자연스럽게 힘대힘 대결로 흘러갔다.
선수들이 스트로크를 주고받길 얼마나 지났을까.
상황을 기다리던 지혁은 마침내 적절한 기회를 포착했다.
타다다다! 퉁!
갑자기 네트 앞으로 달려 나가며 백스핀이 잔뜩 걸린 드롭샷을 치는 지혁.
머레이는 베이스라인 끝자락에서 지혁의 스트로크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기습적으로 나온 이 플레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방향, 속도, 기술, 타이밍 등이 워낙 완벽해서 코트 절반도 오지 않아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피프틴 러브.]
[서티 러브.]
[포티 러브.]
지혁은 환상적인 드롭샷을 성공시킨 이후로 경기력이 부쩍 상승한 모습을 보여줬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플레이에 머레이는 좀처럼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했다.
쿵!!
[게임 리 5-4.]
결국 9게임의 마지막 포인트는 코트를 꿰뚫는 지혁의 포핸드 잭나이프로 종료되었다.
컨트롤하기 힘든 고난이도 기술이 연달아서 등장하자 관중들과 전문가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아아아아아!!
벤치에 들어가는 선수들에게 열렬한 환호성을 보내는 관중들.
지혁은 주변의 응원을 신경 쓰지 않고 머레이의 상태를 살폈다.
‘별 효과가 없어 보이네. 하긴 벌써 효과가 나타나긴 이르긴 하지.’
애초에 고작 1게임인 데다가 브레이크를 당한 것도 아니라서 전세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머레이가 아무리 두부 멘탈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스코어를 많이 벌려놓지 않는 이상 기대하기 힘들겠네.’
적어도 1세트를 가져오고 나서 다시 상황을 지켜봐야겠다.
마침 다음 게임이 듀스에 들어가느냐, 마느냐가 걸린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다.
그러니 이번에 브레이크를 성공하고 확실히 승기를 굳히면 된다.
***
같은 시간 관중석.
롤랑 가로스를 보러 온 온 영국인 팬들은 머레이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경기 상황에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앤디가 불리한 거 맞지?”
“아!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하지만 방금 전 게임에서 골든 보이의 플레이는 정말 엄청났다고. 너도 나랑 같이 봤잖아.”
“그건 그렇지만···.”
남자는 차마 그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차라리 롤랑이 아니라 윔블던이었으면 나았을 텐데, 머레이는 잔디 코트에서 가장 강하니까.”
그렇다고 머레이가 클레이 코트에서 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바운드 속도가 느려지는 환경은 베이스라이너에게 이득이 됐으면 됐지 손해가 될 수 없었다.
단지 잔디 코트에서 기존의 실력을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보여줄 뿐이었다.
아마도 자국의 환경이 익숙하거나 간절함의 크기가 달라서 그렇겠지.
영국에서 열리는 그랜드슬램에서 영국인이 우승한다는 건 정말 큰 의미가 있을 테니 말이다.
1936년 이후로 윔블던 남자 단식에서 단 한 번도 영국인 우승자가 나오지 않았기에 윔블던 효과라는 경제학 용어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머레이는 천재 유망주로 데뷔하고부터 지금까지 전 국민의 기대를 어깨에 지고 있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과분한 짐이었지만 그를 대체할만한 선수나 유망주가 존재하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올해는 윔블던하고 런던 올림픽이 있으니까 분명히 작년보다 성적이 훨씬 좋을 거야. 최근 경기력도 물이 올랐으니까 잘하면 우승도 할 수 있을 걸?”
“글쎄. 그 두 대회에 조코비치랑 골든 보이가 나올 예정이라 나는 잘 모르겠어.”
[플레이어 레디. 서브 머레이.]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휴식 시간이 전부 끝났다.
선수들이 코트에 올라가는 모습에 떠들썩하던 관중석은 빠르게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건 조코비치를 응원하던 두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이번 서비스게임을 지키고 듀스에 들어가자. 그래야 희망이 있어.”
“맞아. 1세트를 먼저 내주면 이길 확률이 30% 이하니까. 무조건 머레이가 첫 세트를 가져와야 해.”
쾅!!
190cm에 달하는 장신으로 무시무시한 고속 서브를 내려꽂는 머레이.
지혁은 T존을 때리고 센터 마크를 관통하는 타구를 여유로운 모습으로 걷어내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반사신경이었다.
그렇게 네트를 넘어간 공은 긴박한 발소리와 함께 몇 박자 빠른 타이밍으로 돌아왔다.
머레이가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기습적으로 서브 앤 발리를 시도한 것이다.
이건 머레이가 여러 가지 방면으로 다재다능한 선수였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어정쩡한 실력이었다면 잘 사용하지 않는 돌발 플레이가 오히려 독이 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타다다다! 탕!!
지혁은 네트 앞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부터 자신이 허점을 찔린 걸 눈치챘다.
지금 상황에서 발리가 코트 안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위닝샷이 나올 확률이 높았다.
‘찰나.’
발리의 궤적을 보자마자 찰나를 사용하는 지혁.
머레이의 깔끔한 자세를 보면 아웃이 나올 기대는 접는 게 나았다.
얼마 후, 코트에서는 다른 탑랭커들이 흉내 내는 게 불가능한 슈퍼 플레이가 나왔다.
몸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완벽한 카운터 백핸드 패싱샷이 나온 것이다.
“······.”
머레이는 회심의 공격이 막힌 게 믿기지 않는지 허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분명 완벽하게 들어간 발리였는데 더 수준 높은 패싱샷이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브 피프틴.]
웅성웅성.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 소란스러워지는 관중석.
“···저게 뭐야? 저 발리를 저렇게 받아친다고? 정말 사람이 맞는 건가?”
“내가 본 경기들 중에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네.”
“이게 18살의 실력이라니, 어째서 빅3를 전부 꺾고 세계 랭킹 1위를 하고 있는지 알겠네···.”
“어. 그랜드슬램을 네 번이나 우승한 게 운이 아니었어.”
그들은 요즘 지혁이 조코비치에게 열세를 보이고 있었기에 잠깐 잊고 있었다.
작년에 어떤 풍파가 일어났는지 말이다.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와 탑10들이 만들어놓은 기존의 서열 구도를 완벽하게 무너트린 역사상 최고의 천재는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머레이는 비록 발리를 실패했지만 당장 경기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 경기가 한참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경기 상황이 나아지거나 반전되는 건 아니었다.
쿵!!
[세트 리.]
결국 1세트의 최종 스코어는 6-4로 지혁의 무난한 승리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까다로웠어. 자칫하면 듀스에 들어갈 뻔했네.’
단순히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하게 승리를 따냈다고 생각하겠지만 경기의 내막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머레이가 더욱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본래 실력 이상으로 활약을 했던 것이다.
아마 위기감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는 힘을 발휘한 것 같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될 것 같은데.’
슬슬 머레이의 멘탈에 균열이 갈 조짐이 보였다.
그는 지혁이 지금 같은 플레이를 계속할 수 없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오늘따라 지혁의 컨디션이 유독 좋아서 운이 지독하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기에서 이길 생각을 자연스럽게 포기하겠지.
다른 선수들도 이 과정을 수도 없이 거쳐갔기에 꽤나 익숙한 과정이었다.
120초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경기가 다시 시작하자 2세트는 지혁의 세상이었다.
경기의 주도권을 완벽하게 쥔 것이다.
슈퍼 플레이에 멘탈이 흔들린 머레이는 쉴틈 없이 쏟아지는 파상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회심의 공격을 해도 마치 벽에 부딪친 것처럼 무심하게 돌아오는데 상태가 멀쩡한 게 이상한 거였다.
······렛츠 고 앤디!
스포츠 채널처럼 전문가들이 말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패배의 기운을 느낀 것일까.
머레이를 응원하던 팬들의 목소리도 눈에 띄게 작아졌다.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지혁의 이름과 비교돼서 그 모습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게임 머레이 3-1.]
그렇게 머레이가 서비스게임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데 성공하자 관중석에서 안도의 한숨이 크게 들려왔다.
만약 2세트의 스코어가 4-0이 되었다면 조금의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경기의 분위기가 특별하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파국이 아주 잠깐 미뤄졌을 뿐이지 머레이가 극도로 불리한 건 여전히 그대로였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휴식도 없이 바로 재개되는 경기.
지혁은 브레이크를 종이 한 장 차이로 아깝게 실패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자신의 서브를 준비했다.
어차피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경기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극심한 체력 소모를 감수하며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