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슬럼프?
지혁은 일주일 간 잔디 코트의 적응을 마치고 윔블던 본선에 참가했다.
그 덕분인지 초반 라운드에서 이전 대회 이상의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테니스 팬들 사이에서 돌고 있던 슬럼프라는 소문은 어느새 잠잠해졌다.
탑랭커를 상대로 3-0의 압도적인 승리가 몇 번이나 이어지고 있는데 솔직히 누가 지혁의 실력을 얕잡아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128강으로 시작한 윔블던은 8강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 남아있는 선수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네임드급 탑랭커들이었다.
32강에서 나달이 떨어진 일이 있었지만 잔디 코트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라서 딱히 놀랄만한 사건도 아니었다.
애초에 윔블던의 유력한 우승 후보 중에 꼽히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독일 선수인 플로리안 머이어를 3-1로 꺾고 먼저 8강을 여유롭게 통과한 지혁은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어떤 선수가 올라오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경기 내용과 훈련 방향이 크게 달라질 거라 이건 나름 중요한 일이었다.
경기 분석을 맡은 코치들도 TV 근처에서 실시간으로 여러 평을 내놓고 있었다.
“조코비치랑 머레이의 대결이라. 8강은 이번 경기가 가장 중요하겠네.”
“결과가 너무 뻔하지 않아? 요즘 조코비치의 실력은 언터쳐블이라고.”
“그래도 윔블던은 머레이의 홈 그라운드잖아. 플레이 스타일도 잔디 코트에서 유리한 편이고 운이 좋으면 승리를 따낼 수도 있어. 아무리 빅4라고 해도 승률이 100%는 아니니까.”
“그래. 기적이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지. 두 선수는 아직 수준 차이 확실해.”
코치들은 과반수 이상이 조코비치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메이저 대회 우승 경력, 명성, 실력 등 그동안 증명한 게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탕!!
[세트 머레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는 코치들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머레이가 먼저 세트를 가져가는 등 조코비치를 압도하는 그림이 나왔던 것이다.
경기를 중계하고 있던 해설들도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TV에서는 그를 찬양하는 멘트가 터져 나왔다.
영국의 스포츠 채널의 특성상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다른 빅4에 비해 조코비치의 인기가 낮은 것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도대체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롤랑이랑 경기력이 완전히 딴판인데?”
“맞아. 지혁이를 상대할 때만 하더라도 저 정도는 아니었잖아. 저건 단순히 홈 그라운드 버프라고 보기 힘든 실력인데.”
“어···. 이러다가 정말 머레이가 결승전에 올라오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게 지혁이한테 좋은 건가?”
“글쎄···. 만약 지금 같은 실력을 결승전에서도 보여준다면 애매하지.”
코치들이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지혁은 지금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머레이는 윔블던과 올림픽을 연속해서 우승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의 오랜 염원을 풀어준 아주 유명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2012년에 포텐셜이 폭발한 뒤 지금 지혁이 차지하고 있는 빅4의 자리를 머레이가 차지하기까지 했었다.
‘만약 머레이가 이번에도 그런 실력을 보여주면 빅5가 되는 건가?’
아마 기존의 빅4인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이지혁을 전부 꺾고 그랜드슬램 세 번 이상 우승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전에 없던 변수가 생긴 만큼 지혁과 하는 경기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겠지.
“그나저나 왼팔은 전부 나은 모양인데? 제법 심각한 부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입장 표명이 맞았나 봐.”
“어. 무조건 100% 컨디션이야. 몸이 정상이 아니라면 저런 무지막지한 백핸드가 가능할 리 없으니까 말이야.”
“진짜 백핸드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네. 조코비치랑 견줘도 밀리지 않는 위력과 정확도야.”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할 부분이야. 카운터 펀쳐 스타일의 베이스라이너인 이상 저게 결정적인 위너가 될 확률이 높거든.”
1세트를 먼저 따낸 머레이는 호평 속에서 남은 경기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기대를 완벽히 만족시키는 결과를 내놓았다.
[세트 조코비치.]
[세트 머레이.]
비록 2세트는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접전으로 아깝게 내줬지만 3세트에서 승리해 2-1로 스코어의 우세함을 유지한 것이다.
이 지경까지 오자 긴가민가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도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ㅡ 와!!! 머레이경 뭐냐고!!!! 조코비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다고??
ㅡ 드디어 포텐셜 터졌다 ㅋㅋㅋ
ㅡ 원래 초특급 유망주여서 늦은 감이 있지. 데뷔 때부터 엄청났잖아.
ㅡ 천상계 수문장하던 게 몇 년인데 드디어 위로 올라가네. 인간계 최강은 다른 선수한테 넘어가겠네. 델 포트로, 송가, 니시코리, 바브린카, 로딕, 페러 중에 누가 될까 ㅋㅋ
ㅡ 그런데 또 베이스라이너네. 난 페더러나 이지혁처럼 올라운더가 더 좋은데 ㅠㅠ 올라운더가 예술적인 샷이 많이 나와서 경기 보는 맛이 있잖아. 공격 옵션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ㅡ 아무래도 수비적인 플레이가 더 승률이 높으니까 어쩔 수 없지. 빅 서버가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해. 고속 서브만 하다가 끝나버리면 뭔 재미임.
ㅡ ㅇㅈ 서브 앤 발리가 판치던 올드 테니스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나음.
ㅡ 아니 김칫국 그만 마시라고 ㅋㅋ 어차피 결승전에서 이지혁한테 못 이기면 전부 소용없어. 그랜드슬램 우승 경력 없으면 천상계에 끼워주지도 않잖아.
ㅡ 잔디 코트에서 이지혁은 클레이 코트의 나달이나 다름없지. 내 생각엔 결승까지 올라와봤자 털리기만 할 듯.
[게임 세트. 매치 머레이.]
“”······.“”
정말로 머레이가 조코비치를 탈락시켜버리자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번 결과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대이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머레이가 보여준 경기력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단순히 운으로 따낸 승리가 아니라 다른 빅4와 붙어도 충분히 해볼 만한 실력이야.”
“지혁이 다음 상대가 송가였지? 머레이는 페더러랑 붙어야 하니까 대진은 유리한 편이네.”
“나달이 중도 탈락한 덕분이지. 그나저나 오늘 경기를 봤을 때 결승에 진출할 선수는 정해진 것 같네. 솔직히 머레이가 탈락할 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어.”
코치들은 지혁에게 가장 위협적인 상대를 잠정적으로 결정지었다.
방금 전의 경기가 워낙 인상적이었던 탓인지 머레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반박하는 의견은 없었다.
***
며칠 후, 윔블던 결승 당일.
지혁의 코치들이 예상한 대로 마지막에 남은 두 선수는 지혁과 앤디 머레이였다.
8강전에서 심상치 않은 실력을 보여줬던 머레이가 페더러마저 탈락시켜버린 것이다.
그 놀라운 기세에 영국 팬들의 기대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무려 76년 만에 자국 선수가 윔블던 우승을 가져올 것 같은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렛츠 고 앤디! 렛츠 고 앤디!
14979개의 좌석을 가진 윔블던의 메인 코트는 아직 경기가 시작하기 전임에도 영국인 팬들의 응원으로 가득 찼다.
홈 그라운드의 이점으로 일방적인 응원이 쏟아지는 터라 지혁도 조금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적진에 방문한 느낌을 어떤 선수가 반기겠는가.
선수들이 간단한 인사와 악수를 나누고 얼마 후.
본격적으로 결승 경기가 시작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시끄럽던 관중석은 놀라울 만큼 조용해졌다.
머레이의 서비스게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 것이다.
쾅!!
첫 포인트부터 강력한 플랫 서브를 내려꽂는 머레이.
서비스 라인 근처를 강타한 공은 마치 미끄러지듯이 낮은 각도로 튀어 올랐다.
이래서 잔디 코트에서 빅 서버들이 유독 득세하는 것이다.
탕!!
지혁은 이미 송가를 상대하면서 고속 서브에 익숙해진 이후였기에 비교적 여유롭게 에이스를 막아내었다.
그렇게 랠리가 진행되자 선수들의 플레이 스타일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수비를 하며 위닝샷을 넣을 만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머레이와 감탄이 나올 만큼 화려한 샷들을 사용하는 지혁이 대비된 것이다.
[게임 머레이 1-0.]
와아아아아!!
관중들은 머레이가 특별한 위기 없이 서비스게임을 지켜내자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보냈다.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전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게 진심으로 기쁜 모양이었다.
“환상적인 플레이였어!! 저 골든 보이를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그래! 이번에야 말로 앤디가 윔블던 트로피를 영국에 가져올 거야!”
머레이는 팬들의 응원이 그저 기쁘기만 한 게 아닌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서 순수한 응원들도 압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영국인들의 오랜 염원을 풀어주기 전까진 해소되지 않을 문제였다.
그동안 윔블던에서 유독 멘탈이 약한 모습을 보였던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
[서브 리.]
지혁은 코트를 교체하자마자 곧바로 서비스게임을 시작했다.
쾅!!
무시무시한 속도로 T존을 강타하는 플랫 서브.
서브의 최대 속도는 지혁이 머레이보다 10km 이상 빨랐기에 관중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게임 리 1-1.]
2게임은 1게임과 비교해서 월등히 빠르게 끝났다.
아마 머레이가 고속 서브에 어느 정도 적응되기 전까진 비슷한 그림이 나올 것이다.
[게임 머레이.]
[게임 리.]
[게임 머레이.]
[게임 리.]
우승에 대한 간절함의 크기가 달라서일까.
머레이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브레이크를 당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서비스게임을 방어해 나갔다.
그렇게 1세트가 중반을 넘어갔을 때. 지혁이 에이스를 얻는 빈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윔블던 결승을 중계를 하고 있던 해설들은 그걸 바로 캐치하고 시청자들에게 곧바로 설명했다.
[머레이가 벌써 골든 보이의 고속 서브에 익숙해졌나 보네요. 세트 초반보다 리턴이 안정적으로 변했습니다.]
[허슬 플레이를 아끼지 않는 게 각오가 정말 대단한 모양입니다. 집중력이 무서울 정도예요.]
[역시 조코비치와 페더러를 탈락시킨 게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네요. 정말 76년 만에 윔블던의 트로피가 영국 선수의 품에 안길 수도 있겠습니다.]
[네. 지금 머레이라면 가능성이 높아요.]
쿵!!
[아! 이번 게임에서도 브레이크가 나오지 않았네요. 머레이의 코트 커버력이 정말 단단합니다. 잔디 코트라서 수비를 하기 힘들 텐데 말이에요.]
[아마 골든 보이가 주로 사용하는 리버스 포핸드의 위력이 떨어진 영향일 겁니다. 같은 기술을 사용하는 조코비치랑 나달도 큰 패널티를 받았으니까요.]
해설들의 말처럼 스핀을 이용하는 스트로크들은 잔디에서 본래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니 다른 선수들의 샷보다 스핀량이 1.5배나 많은 지혁의 포핸드는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브에서 얻은 이점을 여기서 전부 깎아 먹은 것이다.
포핸드는 지혁이 가진 기술들 중 가장 등급이 높은 걸 생각하면 상당히 나쁜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