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슬럼프?
지혁의 무난한 승리를 예상했던 전문가들의 평과 다르게 경기는 상당히 팽팽하게 흘러갔다.
어떤 선수도 먼저 브레이크를 성공하지 못한 채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이다.
결국 경기가 듀스에 돌입하자 영국인 관중들의 눈은 더욱 반짝이기 시작했다.
머레이의 컨디션이 골든 보이를 이 정도까지 몰아붙일 정도라면 승리를 따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촤아아악- 퉁!!
네트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머레이의 스트로크.
코트에 넘어지면서까지 친 공은 사이드라인을 때리며 마지막 위닝샷을 장식했다.
끈기와 행운이 동시에 따라준 결과였다.
[게임 머레이 6-5.]
와아아아아!!
“이제 한 게임만 더! 1세트의 승리가 바로 앞이야!”
“지금 앤디의 경기력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해!”
머레이가 슈퍼 플레이로 중요한 포인트를 얻어내자 경기장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탑랭커들도 지금 상황이 의외인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우.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말 머레이의 경기가 맞는 거야? 적당히 버티다가 골든 보이에게 승리를 내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건가. 우리들에겐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네.”
“지금 실력이라면 새로운 빅5라고 해도 믿겠는 걸? 비결이 뭔지 궁금하구만.”
관중석에서 응원과 찬사가 쏟아지길 잠시.
어느새 지혁의 서비스게임 준비가 끝났다.
지혁은 경기의 스코어가 불리한 상황임에도 그다지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열세에서도 승부를 뒤집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각하게 밀리는 상태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머레이가 홈 그라운드와 언더독의 이점을 누리고 있었지만 객관적인 실력 자체는 지혁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아마 기세를 한 번만 꺾어버리면 멘탈이 약한 머레이는 관중들의 과분한 기대를 버티지 못하고 급격하게 무너질 것이다.
마치 도미노 쓰러지는 모습처럼 연쇄적으로 말이다.
‘먼저 1세트를 내줄 수는 없지.’
이대로 분위기를 타게 내버려 두면 좋을 리 없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체력 소모를 어느 정도 감수하고 세트를 가져오는 게 훨씬 나았다.
쾅!!
휴식 시간에 라켓을 교체한 지혁은 더 빨라진 플랫 서브를 T존 위에 떨어트렸다.
비록 컨트롤을 희생하는 플레이였지만 찰나를 사용하면 얼마든지 보완할 방법이 있었다.
흐릿한 잔상을 남기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바운드된 타구는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했다.
탕!!
머레이는 센터 마크로 허겁지겁 달려와 베이스라인을 지나치는 서브를 간신히 리턴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집중력이 얼마나 최고조에 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어중간한 탑랭커였다면 라켓으로 공을 건드리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피프틴 러브.]
지혁이 전력을 다하자 이제까지 팽팽하게 돌아가던 경기의 분위기는 단번에 뒤집혔다.
[서티 러브.]
빠른 속도로 쌓여가는 지혁의 스코어.
어렵게 얻은 승리가 원점으로 돌아가자 경기장은 급격히 조용해졌다.
대부분의 관중들이 머레이를 응원하고 있었기에 아무리 멋진 플레이들이 쏟아져도 지금의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임 리 6-6. 타이브레이크.]
아아······.
타이브레이크에 들어가자 터져 나오는 탄식들.
보통 단기전은 지혁이 유독 괴물 같은 활약을 보여줬기에 몇몇은 이미 1세트의 승부를 포기한 얼굴이었다.
솔직히 나달, 조코비치를 제외하면 타이브레이크에서 져본 적이 없었으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물론 같은 빅4에게도 타이브레이크 승률을 70% 이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하아···.”
머레이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자 긴장이 되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랜드슬램 결승전 같은 큰 무대에 대한 경험이 빅4에 비해 월등히 적어서였다.
머릿속이 워낙 복잡해서 이제 팬들의 응원은 들리지도 않았다.
어떤 전략을 사용해야 할까, 어떤 샷을 위너로 쓸까, 리가 어떤 식으로 나올까 등.
짧은 제한 시간 안에 생각할 게 너무나 많았다.
[레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작하는 경기.
머레이는 라켓 손잡이를 부서져라 쥐며 정해진 자리로 걸어갔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번 경기를 이기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물론 그동안 윔블던에서 비슷한 생각을 한 선수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던 만큼 원하는 결과를 얻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타이브레이크는 한 포인트만 내주면 대참사가 날 수 있었기에 마치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덕분에 선수들의 집중도는 이전에 없을 정도로 올라갔다.
상대의 미세한 동작과 서브의 방향까지 포착해낼 정도로 말이다.
탕!!
먼저 서브를 시작한 머레이는 실수를 방지하려는 건지 이전과 같이 수비적인 포지션을 가져갔다.
아무래도 먼저 위험을 감수할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간이 정말로 크지 않는 이상 타이브레이크에서 모험을 하는 건 힘들었다.
드르르륵- 퉁!
““!!!“”
갑작스러운 지혁의 플레이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관중들.
그들은 타이브레이크가 조심스럽게 진행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에러 확률이 높은 드롭샷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경악했다.
게다가 방금 전의 드롭샷은 머레이의 강력한 백핸드를 맞받아친 결과였다.
이건 평범한 선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턱!
네트 상단에 부딪치고 간발의 차이로 넘어가는 드롭샷.
타구의 방향이 완전히 뒤틀렸기에 머레이가 이 스트로크에 대응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마 지혁이 저 입장이었더라도 결과는 동일했을 것이다.
[리! 0-1.]
아······.
관중석에서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아쉬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지혁이라도 의도적으로 네트 상단에 스트로크를 맞추는 건 어려웠다
그러니 이번 득점은 전적으로 운이 작용한 결과였다.
“아니, 저게 저렇게 들어간다고? 정말 골든 보이는 운도 좋네. 원래 저런 도박은 에어로 응징되어야 하는데.”
“첫 포인트부터 브레이크라니···. 안 그래도 단기전이라 불길했는데 머레이에겐 최악의 상황이네.”
“다음 서브는 리의 차례니까 바로 갚아주면 되지.”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지. 지금 머레이의 상대는 골든 보이라고.”
그 말대로 지혁은 두 차례의 서브에서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공격적인 플레이에 더욱 비중을 두었는데도 더욱 견고해진 코트 커버력은 탑랭커들의 기를 완전히 질리게 만들었다.
만약 저 자리에 자신이 있었더라도 도저히 뚫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 3-0.]
머레이는 지혁에게 세 번이나 얻어맞고 난 뒤 이대로 버티다간 말라죽을 거라고 판단했다.
‘나도 위험을 감수하고 공격적으로 나가야 해.”
타이브레이크에게 정상급 올라운더를 상대로 버티기만 하면 이길 수가 없다.
억지로 빈틈을 만들어내어 비집고 들어가야 승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이다.
[서브 머레이.]
지혁이 두 차례 서브를 하고 나서 서브권은 다시 머레이게 넘어왔다.
탕!! 탕!! 탕!!
그렇게 잠시 후, 어어진 경기는 방금 전과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관중들은 훨씬 빨라진 선수들의 템포와 부쩍 살벌해진 스트로크가 코트 좌우를 반복하며 날아다니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는 것도 힘든데 직접 뛰어다니는 경기의 당사자인 선수들은 얼마나 힘들까.
솔직히 테니스를 쳐본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끝까지 차는 기분이었다.
[머레이! 1-3.]
[머레이! 2-3.]
머레이는 비록 득점을 얻어낸 모습이 지혁처럼 순조롭진 않았지만 자신의 서비스를 아슬아슬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끈질기네.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타이브레이크에 걸려있는 게 워낙 많은 만큼 딱히 체력과 힘을 아낀 것도 아니었다.
상대의 플레이가 끈질겨서 브레이크를 실패한 것이다.
***
타이브레이크는 이전의 서비스게임이 그랬듯이 평형을 이루며 스코어를 빠르게 늘려갔다.
[리! 6-4. 세트 포인트.]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경기가 없듯이 지혁과 머레이는 어느새 세트 포인트를 남겨두게 되었다.
초반에 얻은 브레이크 한 번이 커다란 나비효과를 일으켜 이 사태가 만들어졌다.
단기전은 이래서 포인트 하나, 하나가 중요했다.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는 관중들.
지혁은 서브의 코스를 잠깐 고민하다 이내 공을 허공으로 토스했다.
쾅!!
“흐읍!”
탕!!
영국 팬들에게는 다행히도 에이스로 허무하게 세트가 끝나는 일은 없었다.
머레이가 평소 실력 이상의 리턴을 보여준 것이다.
아마 경기 초반이었다면 T존 위를 걸치는 서브를 처리하지 못했겠지.
고속 서브로 유리한 고지를 가져간 지혁은 랠리에서 거센 압박을 이어갔다.
탕!! 탕!! 탕!!
당장이라도 위너가 나올 것 같았던 랠리는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계속 지속되었다.
휘청.
잔디가 미끄러웠던 탓인지 갑자기 휘청거리는 머레이.
덕분에 영국인 관중들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암담해졌다.
하지만 머레이는 돌발 상황에서 왼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균형을 회복했다.
선수들이 워낙 격렬하게 뛰어다닌 탓에 베이스라인 근처는 이미 잔디가 만신창이가 되어 흙바닥이 된 지 오래였다.
탕!!
몇 번이나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 잔디와 흙으로 초라한 몰골이 된 머레이는 결국 다운 더 라인 코스로 백핸드 위너를 따냈다.
처음으로 얻어낸 브레이크였다.
[머레이! 6-5.]
짝짝짝짝짝.
영국인이 아닌 다른 국적의 관중들도 머레이의 무시무시한 집념을 느낀 건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드라마틱하게 경기를 이어가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입을 한 모양이었다.
더구나 영국인들이 윔블던에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욱 몰입이 잘 되었다.
“후······. 엄청난 랠리였어.”
“그나저나 이번 결승전은 머레이가 이겼으면 좋겠네.”
“나도 저렇게 필사적인 경기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윔블던 우승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큰지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네.”
[서브 머레이.]
쾅!!
머레이는 어려운 고비를 넘긴 게 어떤 계기가 된 건지 남은 경기에서 엄청난 경기력을 발휘했다.
빅4와 종이 한 장 차이의 실력자가 이렇게 미쳐버리면 아무리 지혁이라도 제압하기 힘들었다.
어떤 선수도 모든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인! 세트 머레이.]
결국 10-8까지 간 타이브레이크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머레이의 승리로 돌아갔다.
영국인 관중들은 그 결과에 광란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그저 생각만 하던 윔블던 우승이 이제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워낙 전력 차이가 커서 속으로 결과를 의심하고 있던 사람들도 이제야 확신을 가진 건지 머레이에게 진심이 담긴 응원을 보냈다.
경기는 이제 1세트가 끝난 것에 불과했지만 그동안의 통계를 따져봤을 때, 먼저 세트를 가져온 선수의 승률은 압도적으로 높았다.
게다가 단기전에서 높은 승률을 보이던 지혁을 꺾고 얻어낸 승리라 이번 승부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 팬들은 지혁에게 유리한 상황에서도 이겨냈으니 경기 도중에 어떤 위기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