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슬럼프?
[세트 리.]
세트 스코어 1-1.
지혁은 비록 1세트를 먼저 내주었지만 곧바로 2세트에서 승리해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6-4까지 가는 접점 끝에 머레이의 상승세를 저지한 것이다.
‘경기 초반부터 이럴 걸 그랬나. 괜히 머레이를 빅4 아래라고 생각해서 하지도 않을 패배를 당한 것 같네.’
타이브레이크에 들어가서야 전력을 다한 게 1세트의 가장 큰 패인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세트가 종료되고 120초의 휴식 시간, 머레이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내던 관중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방금 전, 경기 결과로 인해 드디어 현실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역시 골든 보이는 힘든 건가···. 얼마나 어렵게 얻어낸 스코어였는데 다시 원점이라고?”
“그래도 당장 머레이에게 불리한 건 없어. 이제 마스터즈 경기가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만약 마스터즈라면 더 심각한 거 아닌가? 거긴 그랜드슬램보다 전적이 더 높잖아.”
“으음······.”
애써 긍정적인 말을 하던 남자는 친구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지혁은 정말로 그랜드슬램보다 마스터즈에서 승률이 더 높아서였다.
“이대로는 우승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머레이가 뭔가 방법을 찾아내야 해.”
“···분명 아직 사용하지 않고 숨겨둔 전략이 있을 거야. 다음 세트는 무조건 이길 걸?”
“그러면 다행이지만···.”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경기에 대한 평은 그치고 침묵이 감돌았다.
어차피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꺼내봤자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게 뻔하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시작한 3세트.
여유로운 분위기를 흘리던 머레이는 눈에 띄게 굳어진 표정으로 코트에 올라왔다.
경기의 당사자인 만큼 자신의 열세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서브 머레이.]
쾅!!
머레이는 더욱 빨라진 플랫 서브를 서비스 코트에 내려꽂았다.
정상급 베이스라이너라는 명성답게 역시 무시무시한 체력이다.
괴물 같은 피지컬과 지구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저런 선수가 상위 랭커 중에 널렸으니 그동안 아시아 선수들이 힘을 쓰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아시아 선수들이 평균 190cm의 괴수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심지어 테니스 인프라 차이로 테크닉마저도 밀리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혁과 니시코리 케이, 정민 같은 케이스가 유독 대단한 것이다.
탕!! 탕!! 탕!!
이미 경기 중반이 지나가는 시점이라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선수들이 이미 서로의 실력에 완벽히 적응한 탓이다.
아마 따로 숨겨놓은 전략과 기술이 없다면 이대로 무난하게 경기가 종료될 확률이 높았다.
[게임 리 4-3.]
코치들과 고생하며 준비한 전략이 뒤늦게 빛을 발한 것일까.
지혁은 먼저 브레이크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3세트마저 넘어갈 상황이 되자 머레이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직 이른 판단이긴 하지만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역전패라는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결승 문턱에서 넘어진 경험이 너무 많아서 머레이는 트라우마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윔블던을 반드시 영국에 되찾아와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감에 개최일이 가까워질 때마다 악몽을 꿀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상태를 몇 년 동안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테니스 팬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였다.
[서브 리.]
지혁은 현 ATP 랭킹 1위답게 상대 선수의 멘탈이 흔들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머레이의 경기력이 떨어졌을 때를 노려 스코어 격차를 빠르게 벌려버린 것이다.
어···어어!!
머레이가 바쁘게 풋워크를 하던 도중 크게 넘어지는 모습을 놀란 목소리를 내는 관중들.
그런 장면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영국 팬들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얼마 전, 롤랑 가로스에서 당한 부상도 떠올랐지만 윔블던 우승에 대한 머레이의 간절한 집념이 직접적으로 전해지고 있어서였다.
그 기점을 시작으로 내심 포기하고 있던 관중들은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지혁은 자신이 마치 악당이라도 된 느낌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그리 좋은 느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근 머레이랑 경기를 하면 매번 이런 느낌이란 말이야.’
아마도 그가 빅4와 탑10 사이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인간계 수문장, 미완의 대기, 비운의 천재 등.
분명 2% 부족한 별명으로 불리는 게 정말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겠지.
머레이는 다른 탑랭커들이 꿈에도 그리는 위치와 랭킹을 보유하고 있지만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이지혁이라는 역사상 최강의 천재들에게 6년이나 가로막혀서 랭킹이 정체된 입장의 선수에겐 지옥 같은 나날이었을 것이다.
만약 한 세대만 일찍 태어났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고 간단하게 테니스계를 지배했을 테니 말이다.
[세트 리.]
이미 스코어 격차가 너무 벌어진 상태여서 결국 머레이는 3세트의 결과를 뒤집지 못했다.
경기의 분위기는 전문가들이 확정적인 말을 조금씩 내뱉을 정도로 기울어버렸다.
이제 정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역전이 나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중간에 브레이크를 당하고 경기가 확 기울었습니다. 중간까지만 하더라도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었는데 말이에요. 이게 머레이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멘탈이 너무 약해요.]
[초반만 하더라도 기대 이상의 실력을 보여줘서 기대를 듬뿍 받고 있었는데 빅4의 벽은 역시 높군요.]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이지혁 선수는 같은 빅4가 아니라면 그랜드슬램에서 패배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번에도 증명됐네요. 요즘 머레이가 빅5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지만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빅4에 합류하고 싶으면 적어도 그랜드슬램 우승 3회 이상은 되야죠.]
***
4세트.
승부의 추가 확실하게 기울어진 상태에서도 영국인 관중들의 응원은 이전과 그대로였다.
솔직히 선수가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며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데 팬들이 어떻게 먼저 포기하겠는가.
심지어 경기장의 분위기에 취한 건지 영국인이 아닌 팬들마저 원인 모를 뜨거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머레이와 별로 관계가 없는 전문가들은 여전히 냉정한 태도를 고수하며 평가를 내렸다.
원래 테니스 대회는 간절함만으로 성적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베테랑 선수가 10년 동안 뼈를 깎은 노력을 하며 실력을 단련해도 막 데뷔한 천재 유망주에게 처참하게 찢기는 경우는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정말 불합리한 현실이었지만 이게 테니스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탕!!
[게임 머레이 2-2.]
[게임 머레이 3-3.]
[게임 머레이 4-4.]
““······?””
지혁의 무난한 승리로 돌아갈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경기는 좀처럼 브레이크가 나오지 않았다.
관중들도 설마 머레이가 이 정도로 버틸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건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테니스복이 더럽혀지고 온 몸이 흙과 잔디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머레이가 초인적인 경기력을 발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도 지혁의 강력한 스트로크들이 쉬지 않고 쏟아지는 걸 보면 절대 봐주는 건 아니었다.
만약 저게 전력이 아니었다면 지혁은 올해 호주 오픈과 롤랑을 간단하게 우승했을 것이다.
[듀스!]
[게임 머레이 6-6. 타이브레이크!]
그렇게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어어진 경기.
4세트의 타이브레이크는 엄청난 긴장감 속에서 시작되었다.
‘딱히 지금 상황을 의도한 게 아닌데···.’
보통 지혁은 까다로운 상대를 꺾기 위해 일부로 타이브레이크에 돌입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1세트를 내어주고 나서 그런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오늘 머레이의 경기력은 정말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게 정석인 법이었다.
몇몇 탑랭커들은 타이브레이크가 지혁의 전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6-6까지 온 건 절대 그가 바랐던 상황이 아니었다.
탕!! 탕!! 탕!!
지혁과 머레이는 숨이 턱턱 막히는 압박감을 실시간으로 받으며 경기를 계속 지속했다.
짧으면 몇 분, 길어도 10분 전후밖에 되지 않는 시간임에도 경기의 긴장감이 장난이 아니었기에 관중들의 얼굴은 급격히 피로해졌다.
[머레이! 13-12]
웅성웅성.
스코어가 정상범주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조금씩 소란스러워지는 관중석.
올해 최고의 명경기가 펼쳐지고 있는 중이라 팬들과 시청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상급 선수들이 잔디 코트에서 이렇게 긴 타이브레이크를 하는 건 절대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쿵!!
잠시 후, 하늘이 머레이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한 걸까.
지혁의 서비스 차례에서 아웃이 될 게 분명했던 스트로크가 라인 끝을 애매하게 걸치는 장면이 나왔다.
[머레이! 13-13.]
“챌린지!”
그 결과에 검지를 들며 곧바로 챌린지를 요청하는 지혁.
짝.짝.짝.짝.짝.
심판은 전광판에 떠오른 호크 아이를 몇 번이나 확대하고 나서 1mm 차이로 들어갔다고 판정을 내렸다.
이건 실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행운이 따라준 결과였다.
와아아아아아!!!
고작 실점 하나에 불과했지만 타이브레이크의 승부를 결정짓기에는 충분했다.
머레이가 자신의 서브권을 철벽처럼 막아내며 4세트를 가져간 것이다.
세트 스코어 2-2, 또다시 동점이었다.
마스터즈와 비교하기 힘든 장시간 경기를 한 터라 선수들은 부쩍 지친 모습으로 벤치로 돌아갔다.
중계 카메라에는 미세하게 떨리는 선수들의 다리가 잡혔다.
아무래도 무지막지한 활동량과 특수한 상황 등, 여러 가지 조건이 겹쳐진 탓에 육체적인 한계점에 일찍 도달한 것 같았다.
“후우···. 경기를 하고 있는 건 앤디인데 정작 내가 힘들어 죽겠네. 그동안 윔블던을 많이 봤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야. 대기록이 눈앞에 있어서 그런가.”
“골든 보이를 타이브레이크에서 두 번이나 이기다니 솔직히 믿기지 않네. 정말 어려운 고비를 넘겼어.”
“기적을 두 번이나 만들어 내다니. 이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야.”
“제발···제발. 앤디가 이겼으면···.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패배할 수는 없어.”
영국 관중들은 경기의 상황이 몇 번이나 들쭉날쭉하게 변하자 전신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도 기적을 만들어낸 머레이와 희망적인 경기 분위기에 눈빛만은 반짝이고 있었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자 중계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본능적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다.
이번 윔블던 결승전에서 테니스 역사에 남을 대사건이 일어나려고 하려는 것을 말이다.
“이러다가 골든 보이가 질 수도 있겠는데? 이번에 패배하면 그랜드슬램 결승전에서 4연속으로 좌절하는 건가?”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건 슈퍼 스타답지 않은 모습이네.”
“슬슬 슬럼프가 올 때가 오긴 했지. 이제서야 리의 공략법이 나온 거야. 워낙 엄청난 재능을 가진 천재라서 다른 선수들에 비해 몇 배나 오래 버틴 거지.”
“그런데 머레이의 실력도 놀랍네. 랭킹 5위가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더 올라올 여력이 있었다니 말이야.”
“그동안 잠잠했던 탑랭커들의 구도가 제법 흔들리겠어. 다음 그랜드슬램에서도 이런 활약을 보여준다면 정말 재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