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런던 올림픽
머레이는 마지막 5세트에 들어가서도 평소 실력 이상의 초인적인 플레이를 보여줬다.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대결이 끝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렇게 경기가 1시간가량 지났을 무렵, 마침내 윔블던 결승의 승자가 정해졌다.
쿵!!
“”······.“”
베이스라인을 절묘하게 강타하는 머레이의 백핸드 다운 더 라인.
스피커로 체어 엠파이어의 경기 종료 선언이 떨어지자 경기장은 잠깐 동안 정적이 흐르다가 곧 거대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관중들의 얼굴은 감동의 눈물로 인해 젖어 있었다.
조코비치의 유일한 대항마라고 평가받는 지혁은 정말로 빅4가 아닌 선수들이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털썩.
머레이는 승리가 확정되자 긴장이 풀린 건지 비틀거리며 코트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아무래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더 이상 통제하기 힘든 것 같았다.
비록 전신에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꿈속에서도 바랬던 결과가 손안에 들어오자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과연 코트 위의 울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경기력이었어.’
지혁은 코트 반대편에서 축하의 의미로 박수를 보냈다.
아마 오늘 머레이가 보여준 집념이라면 어떤 선수라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승자를 존중하는 그 바람직한 행동에 관중들도 지혁을 격려했다.
물론 그런 관심도 윔블던의 진정한 주인공에게 금방 돌아갔지만 말이다.
이로서 윔블던 효과라고 경제학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심각했던 영국 테니스의 저주는 76년 만에 깨졌다.
‘역사대로 빅5가 되겠구나. 앞으로 그랜드슬램의 경쟁이 더 치열해지겠어.’
다행히 아무런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 윔블던으로 인해 필요한 포인트를 거의 다 모았으니까. 그동안 우승을 하지 못해서 시간이 너무 많이 미뤄졌어.’
리벤지 매치를 하게 되면 오늘의 패배를 얼마든지 되갚아 줄 자신이 있으니 그때까지 조금만 참으면 된다.
그리고 그건 잔디 코트를 사용하는 런던 올림픽이 될 확률이 아주 높았다.
우르르.
지혁이 다음 대회 일정을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시상식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금색 트로피와 은색의 접시를 들고 코트로 들어왔다.
심판들과 볼 키즈들이 뒤로 정렬하고 트로피가 전달되자 한동안 포토타임이 이어졌다.
눈물을 흘리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머레이와 굳은 표정의 지혁은 확실하게 대비되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린 만큼 모두가 만족스러울 수 없었던 것이다.
***
[앤디 머레이, 세계 랭킹 1위의 골든 보이를 꺾고 영국의 76년 숙제를 풀다!]
[새로운 다스 호스의 등장으로 테니스계의 구도를 빅5로 재 정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이지혁, 윔블던의 패배로 랭킹이 2위로 떨어져. 현재 1위는 세르비아의 노박 조코비치.]
[계속되는 부진, 과연 슬럼프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윔블던은 마친 이지혁 선수가 지난 13일,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했다고 알려져.]
[미궁 속에 빠져버린 런던 올림픽의 향방.]
머레이는 대회가 끝나고 얼마나 기뻤던 것인지 트로피를 든 자신의 모습을 엉덩이에 문신으로 새겼다.
예전부터 농담 삼아하던 말이었는데 정말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원래 유명 선수였던 그는 윔블던으로 첫 그랜드슬램 우승을 달성하자 인해 영국에서 국민적인 스타로 올라섰다.
당장 기사 작위까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으니 얼마나 반응이 뜨거운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지혁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더없이 냉정하게 변했다.
테니스 커뮤니티와 기사의 댓글에서는 마치 이때까지 스타의 추락을 기다렸다는 듯 무더기로 비판들이 쏟아졌다.
분명 준우승이면 나쁘지 않은 결과임에도 그동안 눈이 너무 높아진 탓이다.
간간히 지혁을 위로하는 선플들도 보였지만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악플들이었다.
ㅡ 빅4도 아닌 머레이한테 진다고? 이지혁 벌써 거품 다 빠진 거냐?
ㅡ 우승 확률이 가장 높은 잔디 코트에서도 이래버리면 런던 올림픽도 물 건너 갔네
ㅡ 조코비치한테도 안 돼, 나달한테도 안 돼, 머레이한테도 안 돼. 내 결론은 최단기 퇴물이다 이말이야.
ㅡ 드디어 밑천이 바닥난 거지. 이것도 나름 오래 버텼다.
ㅡ 이제 상위 랭커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일만 남은 건가. 계속 승승장구 할 줄 알았는데···.
ㅡ 요즘 성적이 시원찮은데 설마 니시코리처럼 연애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슬럼프가 온 거지. 원래 유망주들 여자 친구 만들면 귀신같이 떡락하잖아.
ㅡ 그게 맞을 듯 ㅡㅡ 저번에 열애설 나왔던 아이돌인가? 아님 배우?
ㅡ 경기만 잘하면 응원해주겠는데 이러면 얄짤 없지. 지혁아 아직 갈 길도 먼데 제발 정신 좀 차리자.
ㅡ ㅇㅈ 그동안 돈 많이 벌었다고 배가 불렀나 보네.
각국의 커뮤니티와 기사들은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한 댓글들이 점령했다.
추천/반대의 비율을 보면 여론은 지혁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마 다시 만족스러운 성적을 얻지 못하면 지금의 상황은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탓에 지혁이 합류한 올림픽 대표단은 혹시 불편한 심기를 건드릴까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이번 사례를 통해 스타에게 집중되는 관심이 항상 좋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늘 높이 올라갈수록 바닥에 내팽겨쳐지는 고통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러 통로를 통해 들려오는 분위기와 소식들은 살벌했다.
런던 올림픽이 시작하기 10일 전, 지혁은 런던 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해 국가 대표팀과 훈련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랭킹 차이를 생각하면 국내 선수들은 연습 파트너로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는 올림픽 본선 자동 진출의 최소 조건인 세계 랭킹 56위를 충족하는 선수도 지혁을 제외하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표팀의 분위기와 구설수를 생각해서라도 성실하게 행동하는 게 나았다.
평소 테니스 협회와 국가 대표팀이 지혁에게 엄청난 편의를 봐주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탕!!!
코치가 보내주는 스트로크를 엄청난 위력의 백핸드로 받아치는 지혁.
도저히 맞받아칠 엄두가 나지 않는 공이 베이스라인 위를 정확하게 강타하고 벽에 쾅!! 하고 부딪치자 코트 주변에서는 작은 감탄이 들렸다.
“역시 빅4인가. 우리가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네.”
“도대체 윔블던에서 왜 진 거야? 저 괴물 같은 실력으로 패배하는 건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데.”
“저런 이지혁도 최근 그랜드슬램에서 연달아 우승하지 못했는데 빅4와 머레이는 얼마나 대단하다는 거지?”
“후······. 이러니 국내 선수들이 메이저 대회에서 예선 통과도 못하는 거지.”
국가 대표팀에 소속된 코치들은 지혁의 실력을 볼수록 사기가 올랐다.
격이 다른 피지컬과 완벽한 스트로크 기술을 보면서 올림픽 최초 우승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지혁의 백핸드가 원래 이랬나? 어째 완성도가 윔블던보다 수준이 더 높아진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대회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마 오늘 컨디션이 좋아서 그럴 거야.”
“역시 그렇겠지? 하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고작 일주일 만에 실력이 늘리는 없지.”
“······나는 백핸드 완성도가 는 것 같은데? 저게 컨디션이 좋다고 나올만한 수준의 샷이야?”
웅성웅성.
훈련장은 점점 코치들의 토론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지혁이 보여주고 있는 백핸드는 그만큼 심상치가 않았다.
쿵!! 쿵!! 쿵!!
똑같은 위치에 연속으로 떨어지는 백핸드.
양손과 한 손을 스위칭하는 그 마법 같은 실력에 사람들의 입은 떡 벌어졌다.
“실제 경기에서 저런 샷이 나오면 아무리 상위 랭커라도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없을 것 같네.”
“우리가 괜히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 이지혁에게 슬럼프가 왔다는 건 전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어. 저게 어딜 봐서 슬럼프에 빠진 사람이야?”“이번에 화려한 복귀를 하고 멍청한 해외 전문가들 놈들에게 크게 한 방 먹여주겠구만. 최근 테니스 기사랑 댓글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잘됐네.”
“그래. 지금 실력을 런던 올림픽에서 그대로 발휘한다면 머레이도 못 이길 거야.”
코치들은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인 만큼 선수를 보는 안목이 평범한 테니스 팬들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머레이와 레전드 경기가 나올 거라고 예상되자 그들의 몸은 흥분으로 가늘게 떨렸다.
***
2012년 7월 29일, 런던.
2주 동안 휴식과 훈련을 하며 절치부심하던 지혁은 마침내 런던 올림픽 1라운드를 시작할 수 있었다.
비록 작년에 비해 지혁의 활약이 시원찮았지만 한국에서 그의 인기는 여전히 엄청났기에 테니스 중계 시청률은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지혁 선수의 첫 번째 상대는 랭킹 49위의 미국 선수네요. 만만치 않은 순위입니다.]
[올림픽이 64강부터 시작하는 터라 수준이 아주 높습니다. 미니 그랜드슬램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어요.]
[네. 사실상 우승 경쟁률은 윔블던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마스터즈보다 상위 랭커들의 참석률이 훨씬 높으니까요.]
[대진을 보니 머레이와 리벤지 매치가 결승전으로 잡혔던데 과연 성사될 수 있을까요?]
[이지혁 선수가 올라가기만 한다면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요즘 머레이의 포텐션이 아주 미쳤어요. 마침 잔디 코트이니 여러 조건들도 그의 손을 들어주고 있고 있어요.]
해설들이 가장 먼저 화제에 올린 건 역시 요즘 주가를 한창 올리고 있는 머레이였다.
상대 선수인 미국 랭커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시청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반발은 전혀 없었다.
상식적으로 지혁이 고작 랭킹 49위에게 패배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레디.]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1라운드 경기가 시작했다.
첫 서비스게임은 미국 선수의 차례였다.
쾅!!
미국 선수는 우월한 피지컬을 이용해 상당한 속도의 플랫 서브를 내려 꽂았다.
방심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깜짝 놀랐다.
사실상 랭커들 사이에서 무시할 만한 선수는 없었는데 그걸 잊은 것이다.
49위면 한 나라를 대표하기에 충분한 실력이었다.
탕!!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혁의 백핸드가 허무하게 상대의 코트를 강타하고 뒤에 있는 벽에 부딪쳤다.
마술 같은 그 스트로크 기술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아직 제대로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탕!! 탕!!
하지만 그것도 몇 차례 반복되자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경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천재였다.
지혁은 실력을 숨길 생각도 없이 무덤덤한 태도로 스코어를 쌓아갔다.
그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탑랭커들은 난리가 났다.
단 번에 백핸드가 달라진 것은 눈치챈 것이다.
지혁이 데뷔하고 나서 이런 적이 몇 번이나 있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는 선수는 없었다.
그동안 몇 달 사이로 실력이 부쩍 상승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