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정민
연습 경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정민은 드디어 상대의 플레이에 익숙해졌는지 조금씩 반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브레이크를 성공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쿵!!
[게임 해리슨 5-1.]
마지막 서비스게임은 첫 서브를 시작한 정민의 차례였다.
스코어는 서티 올까지 가며 나름 팽팽하게 유지되었지만 결국 연습 경기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게임 세트. 매치 해리슨.]
결국 정민이 6-1로 처참하게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가 이미 랭킹 70위대인 걸 생각하면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막 퓨처스에 데뷔한 주니어 선수가 탑랭커를 어떻게 이기겠는가.
그런 일은 빅4처럼 테니스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선수가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짝짝짝짝짝짝.
관중들은 경기가 종료되자 마치 약속했다는 듯이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기대 이상의 대결을 본 게 기쁜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정민을 평범한 유망주로 보던 시선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를 이번 US 오픈 주니어 그랜드슬램의 유력한 우승 후보로 인정한 것이다.
“골든 보이도 그렇고 이제 아시아 선수도 무시할 수 없겠어. 저런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말이야.”
“저 꼬맹이의 국적이 한국이라고 했지? 몇 년만 지나면 그랜드슬램에서 볼 수 있겠네.”
“골든 보이 같은 거물이 뒤에 있는데 그렇겠지. 나는 그것보다 어디까지 올라올지가 궁금해. 과연 탑10에 들어올 수 있을까?”
“아마 이번 US 오픈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탑10급 재능이라면 같은 또래의 주니어 선수들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압할 테니까.”
“음···. 올해 대회는 여러모로 기대되는구만. 최근 윔블던에서 우승한 머레이도 그렇고 흥미로운 선수가 정말 많이 나왔어.”
정민은 코치들과 관중들에게 이 정도면 충분히 잘했다는 칭찬을 끊임없이 받았지만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었다.
강한 승부욕을 가진 만큼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진심으로 승복할 만큼 차이가 나지 않기도 했다.
피지컬만 어느 정도 바쳐줬다면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데이비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로지 지혁만을 경쟁자로 생각하고 정진하고 있었는데 밑에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유망주의 실력을 겪고 나니 앞으로의 프로 생활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알렉산더 즈베레프, 다닐 메드베데프, 스테파노스 치치파스, 정민, 도미니크 티엠 등 쟁쟁한 선수들이 계속해서 나오니 그의 판단은 전적으로 옳았다.
***
연습 경기가 끝난 후, 정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지혁에게 얹혀온 짐덩어리가 아니라 미래가 보장된 특급 유망주 대접을 해준 것이다.
덕분에 US 오픈이 개최하기 전까지 정민의 훈련은 너무나 순조로웠다.
사실 다른 주니어 선수들이 코치들과 훈련할 때 그는 탑랭커와 실전 경험을 쌓았으니 당연히 컨디션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US 오픈 개최 당일.
한국은 그랜드슬램에 참가한 지혁과 정민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ㅡ 정민? 얘 누군지 아는 사람? 기사에서 왤케 뛰어주는 거냐?
ㅡ 이지혁 후계자라니 기자들 진짜 미쳐버린 건가. 듣보잡 유망주랑 말도 안 되는 비교를 하고 있네 ;;
ㅡ 이러다가 광탈하면 웃기겠는데 ㅋㅋ 얘 다른 주니어 선수들이랑 비교하면 키도 거의 10cm 이상 작네.
ㅡ 기사보니까 이지혁이랑 미국에서 같이 훈련했다네. 대체 뭔 관계이길래 이렇게 신경 써주는 거지? 성이 다르니까 가족은 아닌데 혹시 가까운 친척인가?
ㅡ 여기 테알못들 많네. 테니스 팬이면서 요즘 아시아 최강의 주니어 선수로 떠오르고 있는 정민을 모른다고?
ㅡ ㄹㅇ 고1이 퓨처스 대회들 찢고 있어서 테니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3년 전의 이지혁을 보는 것 같다고 난리도 아님.
ㅡ 헐···. 얘 세계 랭킹 왜 이러냐?? 고1이 455위라고? 한국 랭킹 4위네 ㄷㄷㄷ
ㅡ 4위? 한국에 그렇게 인재가 없나 ;;;
ㅡ ㄴㄴ 정민이 비정상인거지.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 장학생 출신이라더니 테니스 명문 이름값 제대로 하네.
쏟아지는 기사들과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 덕분일까.
주니어 그랜드슬램은 제법 높은 시청률을 유지했다.
그리고 정민은 팬들의 기대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았다.
6-2, 6-1의 스코어로 상대 선수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시청자들은 정민의 빈틈없는 플레이 스타일과 어린 선수답지 않은 안정적인 경기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ㅡ 와··· 엄청 노련하네. 상대가 반항할 여지를 조금도 안 주는 게 베테랑 선수 느낌이 물씬 난다. 나이랑 어울리지 않아서 왠지 기괴한 느낌임.
ㅡ 해설들도 기본기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감탄하고 있는 중 ㅋㅋ
ㅡ 그런데 이지혁처럼 천재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스타일은 아닌데? 솔직히 정민이 정통 베이스라이너라서 의외다. 성격이 정반대잖아.
ㅡ 아직 그건 모르지. 전력을 발휘하면 달라질 수도 있잖아.
ㅡ ㄴㄴ 내가 올해 4월부터 지켜봤는데 전혀 아님. 정민은 그냥 무난한 스타일이다.
ㅡ 오히려 기복이 없어서 좋아. 이길만한 경기는 거의 무조건 가져온다는 뜻이니까.
세계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정민은 다음 라운드에서도 승리를 계속 이어갔다.
그렇게 별다른 위기를 겪지 않고 연전연승을 이어가자 한국 팬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로지 지혁 원툴이었던 선수 풀에 새로운 탑랭커가 등장할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64강, 32강, 16강, 8강.
8월 말에 시작한 US 오픈은 어느새 막바지에 도달했다.
지혁과 정민 모두 중도 탈락하지 않고 무사히 준결승에 진출한 것이다.
그 결과에 코치들은 내심 지혁의 정확한 안목에 감탄했다.
이때까지 몇 번이나 평가를 내렸는데도 단 한 번도 빗나간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려 100%의 정확도를 자랑하니 이제는 거의 예언처럼 들렸다.
“정말로 본 대회랑 주니어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전부 우승하겠는데.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글쎄. 아직 두 경기나 남아있어서 장담하긴 일러. 남은 상대들이 이때까지 상대해온 선수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가따롭잖아. 무엇보다 그 조코비치가 남아있다고.”
“하드 코트에서 무결점이 마지막 상대라······.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최근 지혁이의 하드 코트 상대 전적도 거의 전패잖아. 심지어 유리한 조건인 마스터즈에서도 밀린다는 평이고.”
“그래도 런던 올림픽을 기점으로 지혁이의 기량이 크게 상승한 만큼 저번처럼 허무하게 패배하진 않을 거야.”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네. 이번에 지혁이가 US오픈을 우승하면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란 올림픽을 포함한 4대 그랜드슬램을 모두 우승한다는 의미였다.
이건 빅4 중에서도 나달 만이 유일하게 달성한 업적이었다.
페더러, 조코비치도 끝내 성공하지 못한 기록이니 테니스 선수에게 그 의미는 정말 엄청났다.
“정말로 성공하면 지혁이도 레전드 반열에 들어가겠네.”
“허···. 고작 20살에 골든 그랜드슬램이라니. 도대체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거지.”
“다시 오지 않을 황금기지. 지혁이가 만들어 놓은 기록들은 앞으로 절대 깨지지 않을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천재가 다시 나타날 리 없잖아.”
“그동안 페더러와 나달이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것보다 더한 천재가 나타날 줄이야.”
“우리가 맡은 선수라서 다행이지. 만약 경쟁자였다면 도저히 상대할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
지혁은 준결승에 올라온 다비드 페러를 3-1로 격파하고 결승전에 무사히 진출했다.
모든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US 오픈의 마지막 상대는 하드 코트의 절대강자 조코비치였다.
그리고 한국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던 정민도 준결승에서 치열한 대결을 벌인 끝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보통 테니스 대회는 남자 단식이 메인 이벤트였기에 주니어 선수의 경기와, 복식, 여자 단식 경기가 먼저 진행되었다.
그 덕분에 국내 테니스 시청자들은 시간을 겹치지 않고 정민의 결승전을 시청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펠리보.]
결승전에 올라온 선수는 정민보다 2살이나 많은 캐나다 국적의 필립 펠리보였다.
그는 테니스 선수치고 작은 키인 180cm였지만 정민과 같이 서니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쾅!!
첫 서비스게임을 가져오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플랫 서브를 사용하는 펠리보.
어지간한 프로를 뛰어넘는 위력의 타구가 서비스 코트를 강타하는 모습에 관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주니어 선수들 중 최강으로 꼽힐만한 실력이었다.
정민의 잘 모르던 관중들은 첫 포인트부터 에이스가 나올 거라고 장담했지만 그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누가 봐도 여유롭게 리턴에 성공해버린 것이다.
대회 준비 기간 동안 지혁과 데이비드에게 최소 200km 이상의 서브를 질리도록 받은 결과였다.
탑랭커들 사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속도인 240km마저도 수백 차례 경험해봤는데 고작 주니어 선수의 고속 서브에 당황할 리 있겠는가.
솔직히 정민은 자신의 피지컬만 어느 정도 받쳐줬다면 상대를 장난감처럼 다룰 자신이 있었다.
탕!! 탕!! 탕!!
펠리보는 상대가 에이스를 전혀 당할 기색이 보이지 않자 곧바로 랠리로 경기의 방향을 틀었다.
애초에 잔디 코트도 아닌 만큼 결승전에 진출한 선수를 서브 만으로 이길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두 선수는 똑같은 베이스라이너인 만큼 종합적인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이길 게 분명했다.
그러면 피지컬과 경험이 많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게임 펠리보 1-0.]
[게임 정 1-1.]
[게임 펠리보 2-1.]
경기 초반의 분위기는 펠리보가 생각한 방향대로 흘러갔다.
서브와 강력한 스트로크로 여러모로 유리한 고지를 끌고 간 것이다.
그렇게 1세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브레이크가 나오며 경기의 균형이 기울었다.
물론 펠리보의 예상과 그 결과가 많이 달랐지만 말이다.
[게임 정 3-2.]
““······.””
주니어 선수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수준급의 백핸드로 브레이크를 먼저 따내는 정민.
관중들은 아직 어린 티가 나는 꼬맹이가 2살이나 많은 펠리보를 압도하자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대부분은 싱거운 경기가 될 거라 생각하고 기대를 접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이다음에 예정되어있는 메인 경기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방금 저 꼬맹이가 브레이크를 한 거 맞지? 우연인가?”
“그렇겠지. 펠리보는 꽤 유명한 유망주니까. 아무래도 방심을 하고 있었나 봐. 상대 선수가 너무 보잘것없어 보이잖아.”
“이번에 브레이크를 당했으니 방심은 끝이겠지. 이제 제대로 하겠구만.”
“그래. 우연이 두 번이나 일어나진 않을 거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