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중국 아카데미
탕!!
US 오픈 우승이 걸린 건곤일척의 승부는 곧 시작되었다.
경기는 2세트가 그랬던 것처럼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고 팽팽한 균형을 유지했다.
단 한 번도 브레이크가 나오지 않은 채 스코어를 계속 쌓아간 것이다.
선수들의 서브와 스트로크가 기존보다 훨씬 더 정교해진 걸 생각하면 이건 상당히 놀라운 상황이었다.
당장이라도 실수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 7-6 듀스!]
체어 엠파이어의 판정에 숨을 헉헉대며 서브권을 바꾸는 선수들.
조코비치는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 방금 전에 당했던 실점들을 그대로 복수했다.
이쯤 됐으면 모험을 할 때도 됐는데 마치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수비적인 플레이를 고집하는 게 어지간히도 지독하다.
아마 괜히 익숙하지 않은 짓을 하면 곧바로 패배한다는 것을 아는 거겠지.
그게 아니면 쏟아지는 위닝샷을 전부 막아내느라 여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조코비치! 8-7.]
와아아아아!!
얼마 후, 조코비치가 또다시 지혁이 친 회심의 백핸드를 막아내자 경기장은 환호성과 박수로 가득 찼다.
일반적인 경기에서 보기 힘든 슈퍼 플레이가 매 포인트마다 끊이지 않고 나오는데 솔직히 열광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타이브레이크가 시작되고 나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일어난 상황이었지만 탑랭커들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지 답답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프로의 입장에서 저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허···. 이번에도 막아낸다고? 아무리 무결점이라고 해도 저게 말이 되는 건가. 나라면 바로 포인트를 빼앗겼을 텐데 말이야.”
“저걸 보니까 조코비치의 컨디션이 나쁜 건 아닌가 봐. 아니, 오히려 최상의 상태인 거 같은데.”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적어도 변명이 통할 경기력은 아니네.”
“둘 다 진짜 괴물이네······. 그랜드슬램에서 만났을 때 이길 엄두가 안 나. 하긴 지금 랭킹을 생각하면 당연한 건가. 두 사람은 1, 2위니까.”
“그냥 나처럼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게 편해. 그냥 본선에서 만나면 탈락하는 거지. 애초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
테니스 선수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위 랭커들에게도 지혁과 조코비치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선수였다.
감히 이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경기를 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선수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팬들이 빅4를 기준으로 신계와 인간계를 나누어 놓은 건 단순히 보기 좋거나 구색 맞추기가 절대 아니었다.
스포츠에서 승률이 95%를 넘어가면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이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팀 스포츠인 야구는 가장 잘하는 팀도 승률이 70%가 한계지만 테니스는 개인의 기량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종목이라서 상대 전적 100%도 얼마든지 찍을 수 있었다.
애초에 랭킹이 비슷한 빅4와 탑10의 승률도 90~95% 근처였으니 그 밑의 선수들은 생각할 것도 없었다.
탕!! 탕!! 탕!!
탑랭커들은 대단한 경기가 계속 이어질수록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배울 점이 많고 영감을 엄청나게 자극하는 대결이었지만 범접할 수 없는 천재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브를 몇 번이나 바꾼 결과, 마침내 타이브레이크의 승부가 가려졌다.
오늘 더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줬던 지혁이 간발의 차로 2세트를 가져간 것이다.
[인! 세트 리.]
와아아아아!!!
“역시 반전은 없구나···. 생각했던 대로네.”
“응.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첫 세트부터 징조가 많았잖아. 게다가 최상위권에서 그 정도 차이면 극복하기 힘든 수준이지. 아쉽지만 오늘은 조코비치의 날이 아니야.”
세트 스코어 2-0.
사실 여기까지 기울어진 이상 이미 경기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막 메이저 대회에 데뷔한 루키나 결정력이 떨어지는 하위권 탑랭커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지혁 같은 선수가 역스윕을 허용하겠는가.
그동안의 그랜드슬램 기록들을 따져봐도 지금 상황에서 지혁의 우승 확률은 사실상 90%를 넘어갔다.
실시간으로 나빠지는 조코비치의 표정이 그 증거였다.
그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선수인 만큼 지금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
결국 조코비치는 런던 올림픽의 머레이와 비슷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지막에 템포를 끌어 올리며 필사적으로 경기에 임했음에도 기울어진 경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US 오픈 결승전의 최종 스코어는 3-1, 지혁의 무난한 승리였다.
[골든 보이 이지혁 US 오픈 우승으로 나달에 이어서 두 번째로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
[데뷔 3년 만에 호주 오픈, 윔블던, 롤랑 가로스, US 오픈, 올림픽까지 5관왕을 차지한 이지혁. 만 19세의 나이로 레전드 반열에 들어서다!]
[다시 탈환된 최강자의 자리. 비록 랭킹은 아직 따라잡지 못했지만 테니스 전문가들은 시간문제라고 말해.]
[세계 랭킹 1위의 노박 조코비치, “리를 완벽하게 추월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오만이었다. 그렇지만 다음 대회는 다를 것.”]
[US 오픈 주니어 부분과 프로에서 모든 우승을 차지한 한국 국적의 선수들.]
[이지혁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주니어 선수 ‘정민’은 누구인가? 무명의 유망주가 단번에 세계적인 화제로 떠올라.]
[거대 스폰서들, 제2의 골든 보이를 떠올리며 정민에게 접촉하는 걸로 알려져.]
ㅡ 와···. 정민 이번 US 오픈으로 벼락 출세했네. 스폰서 명단에 있는 이름들 전부 대기업이다 ㄷㄷㄷ
ㅡ 그런데 겨우 주니어 그랜드슬램 우승한 거 가지고 수십억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나? 이거 우승해봤자 탑100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잖아.
ㅡ 그냥 몸값이 저렴할 때 복권 사는 것처럼 줃어 가려는 거지. 지혁이의 절반만 해줘도 로또에 당첨된 것 이상으로 이득을 뽑아낼 수 있잖아.
ㅡ ㄹㅇ 탑10 안에만 들어가도 몸값이 바로 수백억인데 겨우 1~20억에 줃어가면 무조건 개이득이지. 게다가 US 오픈에서 하는 거 보면 탑랭커는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음.
ㅡ 애초에 이지혁이 보증 수표인데 뭔 걱정을 하겠냐 ㅋㅋ 신뢰도 최상의 인증 마크 찍혀있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마케팅 담당자가 바보지.
ㅡ 그런데 기자가 미쳤나 제2의 골든 보이라니 올려쳐도 적당히 올려쳐야지.
ㅡ 이러다가 다음 대회에서 떡락하면 욕 어지간히 먹겠네 ㅋㅋ 이제 고1이던데 멘탈도 지혁이처럼 단단하려나? 이지혁은 시즌 아웃당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재활해서 복귀하던데.
ㅡ 너희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어차피 얘 일반인이 평생 벌 돈 올해 비시즌기에 몇 배는 뽑고 남음. 게다가 이지혁이 코치인데 떡락하는 걸 그냥 내버려 두겠냐? 무슨 수를 사용해서라도 위로 끌어올리겠지.
US 오픈 결승전이 끝나고 며칠 후.
한국으로 복귀한 지혁과 정민은 몰려드는 섭외 요청에 꽤나 시달렸다.
그랜드슬램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돌아온 그들은 높은 시청률의 보증 수표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두 사람이 사제 관계라는 소문이 은근히 돌고 있어서 팬들의 관심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음······. 이건 생각하지도 못한 제안인데요.”
“요즘 네 유망주 육성 능력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아. 특히 중국이 가장 뜨거운 러브콜을 보내고 있어. 아무래도 아시아권에서 투자한 금액이 가장 크니까.”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고도 탑랭커 하나 배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다급할 만도 하지. 리나를 제외하면 전부 수준 미달이니까. 게다가 테니스에서 여자 단식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봤자 조연일 뿐이잖아.”
코치들은 지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이자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사실 정민이 US 오픈 주니어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할 때부터 매니지먼트와 코치진 내부에서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역사상 최강의 천재가 하는 유망주 교육,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첫 번째 제자가 마치 지혁의 행보가 떠오르는 성적을 얻고 있어서 신빙성은 더욱 깊어졌다.
중국은 자국 출신의 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아마 그러니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과 여러 조건들을 제시한 거겠지.
이건 야심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혹할 만한 제안들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지혁은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마 과거라면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 금적전인 욕심이 거의 사라졌다.
부상을 당하지 않고 오래도록 선수 생활을 지속하는 것과 명예가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 것이다.
“지혁아, 그래서 생각은 해봤어?”
“별로 내키지 않네요. 괜히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고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네 나이를 생각하면 너무 이르긴 하지. 은퇴할 때가 10년도 넘게 남았으니 말이야.”
반응을 보니 코치는 억지로 설득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생각처럼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 선수가 굳이 모험을 할 필요성이 있겠는가.
이미 돈은 스폰서와 우승 상금으로 인해 평생 펑펑 써도 될 만큼 쌓이고 있었다.
“그러면 차 선택은 어떤가요? 만약 첫 번째 제안이 거절되면 이거라도 수락해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때 옆에서 지혁과 코치의 대화를 듣고 있던 IMG 한국지사 직원이 끼어들었다.
“중국 내 테니스 아카데미 방문?”
지혁은 제안서의 상단에 큰 글씨로 적혀있는 글자를 읽었다.
“어떤 유망주들이 있는지 궁금하긴 한데···.”
테니스 인프라가 부족해서 그렇지 분명 사람이 많은 만큼 재능 있는 유망주도 있을 것이다.
이대로 몇 년이 지나도 중국에서 주목할만한 탑랭커가 등장하지 않지만 아마 그건 교육 방식이 잘못되어서 그럴 것이다.
예상외로 상당한 흥미를 보이는 모습에 IMG 직원은 반색을 하며 이런저런 혜택들을 늘어놓았다.
물론 그런 말은 지혁의 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비시즌기에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정민이보다 얼마나 잘하는지 비교해보면 좋겠네요.”
승낙의 뜻이 담긴 그 한 마디에 직원은 고개를 엄청난 속도로 끄덕였다.
이번 제안은 지혁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IMG도 중국 시장 개척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정상적인 통로를 거치면 어려운 일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자 직원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이래서 매니지먼트들이 목숨을 걸고 슈퍼 스타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특정 조건이 제대로 갖춰지면 1명의 스타가 가진 영향력은 기업조차 가볍게 능가해버리니 말이다.
그렇게 지혁의 비시즌기 일정 중에 중국 아카데미 방문이 추가되었다.
매니지먼트를 통해 그 내용이 전달되자 현지에서는 몇 달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지혁의 방문을 최대한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