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이두희
아카데미에서 정민과 하오강의 코칭을 봐주길 며칠.
궁금증을 해결한 지혁은 아무런 미련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중국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코치들이 아쉬운 얼굴로 마지막까지 붙잡았지만 결국 지혁의 스케줄을 바꾸진 못했다.
비시즌기에 연고도 없는 곳에 계속 있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지혁이 가장 먼저 찾은 건 요즘 국내 테니스계를 뒤흔들고 있는 이두희였다.
IMG의 개인 테니스 훈련장.
매니지먼트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코트에 도착한 이두희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지혁의 초대를 받았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은가 보다.
아무리 최근 주목받고 있는 유망주라고 해도 세계 랭킹 1, 2위를 다투는 정상급 선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 안녕하세요.”
지혁을 발견하고 어딘가 어눌한 말투로 인사를 하는 이두희.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지 상당히 어색한 표정이다.
“네가 두희구나. 아직 중학생이라고 하던데 프로 데뷔도 하고 대단하더라. 나도 이제 막 퓨쳐스에서 성적을 올리고 있는데 말이야.”
인사를 받아준 건 먼저 훈련장에 도착해있던 정민이었다.
정민은 국내 유망주들 사이에서 지혁 다음으로 유명한 선수였기에 이두희는 순식간에 그의 얼굴을 알아봤다.
중국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그랬듯이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그 증거였다.
“···US 오픈 주니어에서 우승한 정민 선수 맞죠?”
“맞아. 오늘 훈련 기대하고 있을게.”
“네!”
이두희는 비록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독순술을 할 줄 알았기에 대화를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말투만 약간 어눌한 느낌이 들뿐 이질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나이가 어려서일까.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금세 친해졌다.
아마 서로에 대한 호감과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겠지.
“그럼 몸부터 풀어야 하니까 나랑 연습 경기 한 번 하자. 네 실력이 정말 궁금했거든.”
“네. 잘 부탁드려요.”
정민과 이두희는 서로에 대한 기대를 가득 품은 채 코트 위로 올라갔다.
국내에서 워낙 떠들썩했던 만큼 경기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또래에게 패배한 경험이 거의 전무했기에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겸손한 척 말해도 자신만만한 표정과 태도를 보면 승리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서브는 내가 양보할게.”
먼저 프로에 데뷔한 선수로서 서비스게임을 양보하는 정민.
이두희는 자신을 얕보는 행동에 약간 멈칫했지만 굳이 그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말로 자존심을 챙기는 것보다 실력으로 증명하는 게 훨씬 효과가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청각 장애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얕잡아 보는 일이 많았다.
결국 시간이 지나 그들을 압도적으로 추월하자 그런 시선도 전부 사라졌지만 말이다.
당장 고등부에 올라가도 상위 1% 안에 드는 실력자를 고작 중학생들이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와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도저히 경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이두희를 다른 세상에 사는 괴물로 받아들였다.
마치 지혁과 정민이 같은 나이대의 선수들에게 경쟁자가 아니라 신으로 취급되는 것처럼.
탕!!
일단 경기가 시작하자 부드럽던 이두희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진지한 표정과 랠리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누구라도 한눈에 눈치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진심으로 정민을 이기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하. 저 꼬맹이가 민이를 경쟁 상대로 생각하나 보네.”
“아직 중학생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한참 혈기왕성할 때잖아. 최근 성적을 보면 자신만만할 만도 하지. 벽에 부딪쳐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그러면 오늘 제대로 임자를 만났네. 아시아권에서 노는 유망주랑 정민은 비교조차 불가능하니 말이야.”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망주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고.”
경기를 구경하고 있던 코치들은 단 한 명도 정민이 이두희에게 패배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까지 그가 보여준 재능이라면 상위 랭커가 될게 분명했다.
그런 천재가 겨우 중학생한테 연습 경기를 진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탕!! 탕!! 탕!!
지도의 의미가 담긴 경기였기에 정민은 초반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탐색전을 하며 이두희의 실력을 파악하는데 집중한 것이다.
그렇게 한계점을 찾기 위해 랠리의 수준은 점점 상승했다.
“으음···. 확실히 잘하긴 하네. 퓨쳐스에서 준우승을 한 게 우연은 아닌가 봐.”
“기본기도 제법 탄탄한데? 저 정도면 고등부에서도 상대할만한 선수가 거의 없겠어.”
“국내에서 유명할 만 하구나.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를 알겠어. 랭킹이 금방 오를 스타일인데? 그런데 저게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렇지. 저런 선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비슷한 케이스가 수도 없이 많았고.”
이두희의 경기를 보며 무언가 떠오른 듯 혀를 차는 코치들.
일반인들이라면 정민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치는 그에게 마냥 찬사를 보냈겠지만 전문가들의 평가는 달랐다.
“대충 이 정도인가?”
정민은 몇 분만에 상대의 전력을 모두 파악한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그걸 기점으로 경기의 내용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탐색전이 끝난 만큼 적당히 봐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끼이익- 탕!!
중학생이라고 믿기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며 스트로크를 받아내는 이두희.
성인 선수에게서나 볼법한 기교와 능숙한 전략은 어지간한 프로 못지않았다.
오히려 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영리함을 따진다면 정민보다 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걸 보는 코치들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저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알아서였다.
사정을 아는 전문가들에게 이두희의 영리함은 절대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짜 나쁜 습관이 제대로 들었네. 그래도 이대로만 하면 주니어 대회에서는 지금처럼 무쌍을 찍을 수 있겠지만.”
“이래서 해외의 유명 아카데미에 유학을 보내는 거지. 만약 정민이도 유년기 시절에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가 아니라 국내에서 배웠다면 비슷했을 거야. 당장의 성적만 생각하면 이게 가장 효율이 좋으니까.”
“이길 수 있는 꼼수를 엄청 많이 배웠네. 저 나이 때는 저러면 안 되는데.”
“아마 랭킹이 200~300위쯤 되어야 깨달을 거야. 상위권에 올라가면 저런 짓은 통하지 않고 발목을 잡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야.”
상위권에서 랭킹을 올리려면 정면승부가 기본이었다.
상식적으로 수많은 경험과 뛰어난 재능을 겸비한 탑랭커들이 어중간한 꼼수에 당하겠는가.
빠르게 랭킹을 올리기 위해 지름길을 선택한 주니어 선수들은 시간이 지나서야 후회를 하곤 한다.
쇠를 두드리듯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본기를 단련할 시기에 잠깐 반짝이는 명성에 취한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래 역사에서 이두희는 150위를 돌파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방황했다.
고등학생 때 찍은 랭킹을 성인이 되고 나서 지혁이 회귀할 때까지 넘지 못한 것이다.
아마 그 상황은 시간이 더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이건 아시아 선수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주니어 시절에 세계 대회를 우승하고 귀신처럼 사라지는 유망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게임 정민 3-0.]
정민은 기본기만으로 주니어 그랜드슬램을 우승할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두희의 꼼수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요행이 통하지 않고 정면대결에 들어가자 경기는 급속도로 싱거워졌다.
제2의 이지혁이라는 칭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졸전이 펼쳐진 것이다.
이두희는 자신이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걸 아는지 실시간으로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분명 지금까지 정민 같은 유망주를 만나본 적이 없을 테니 이런 느낌은 처음이겠지.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
[게임 세트.]
결국 6-0, 베이글로 끝나는 정민과 이두희의 연습 경기.
두 사람의 나이가 12개월 10일 차이를 나는 걸 생각하면 피지컬을 변명으로 대기도 힘들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원인은 명백하게 실력 탓이었다.
“······.”
이두희는 이번 경기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건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 있어하던 전략들이 통하지 않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네가 왜 그러는지는 알겠지만 나쁜 습관들이 너무 많더라. 지금 출전하는 대회에서 그런 게 통할지 몰라도 랭킹이 조금만 올라가면 이번 경기하고 비슷한 결과가 나올 거야. 투어급 선수로 활동하려면 경기 방식을 전체적으로 고쳐야 돼.”
침울한 이두희의 모습을 보며 거침없이 말하는 정민.
그는 지혁이 인정을 받을 만큼 재능이 확실했기에 문제의 원인을 단번에 간파했다.
솔직히 방금 같은 수작은 실력이 어느 정도 완성된 정민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웃기기만 할 뿐이었다.
“그나마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다. 플레이 스타일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고칠 엄두가 안 나거든.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
정민과 코치진들은 이두희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아마 이대로 놔둬도 알아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이다.
어중이떠중이가 하는 말이면 무시했겠지만 현재 최강의 선수인 지혁조차 똑같은 평가를 내렸는데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한동안 이전 같은 성적을 내지 못해서 혹평을 받아도 미래를 생각하면 기본기 중심으로 경기를 하는 게 절대적으로 맞았다.
“······.”
이두희와 동행한 코치는 할 말이 없는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지혁과 정민은 물론이고 그들의 일행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전문가들인 만큼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장 현역 시절의 성적을 비교해봐도 그렇다.
이름 없는 실업팀 선수였던 그와 다르게 훈련장에 있는 코치들은 하나 같이 한때 탑랭커나 국가 대표 경험이 있는 네임드였으니.
“그래도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편이네요. 이 정도 실력이면 제가 다닌 아카데미에서도 최상위권이에요. 지금 합류하더라도 바로 닉 키즈가 될 수 있을 걸요.”
정민은 경기를 끝나자 곧장 지혁에게 다가와 이두희에 대한 소감을 늘어놓았다.
“니시오카 요시히토랑 비교하면 어때?”
“음···. 지금 당장은 상대가 안 될 거예요. 대충 1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엄청 높이 평가하고 있구나.”
“네. 물론 메이저 대회에서 어떤 성적을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 아래에서 경쟁력이 충분해 보여요.”
아무래도 정민과 이두희의 관계는 기존의 역사와 비슷하게 흘러갈 듯했다.
분명 한국의 역대급 유망주로 치열한 랭킹 경쟁을 이어가겠지.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줄 경쟁 상대가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지혁이라는 훌륭한 멘토까지 갖춰졌으니 정말로 재미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