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이두희
정민과 한 경기와 지혁의 코칭 때문일까.
이두희의 실력은 단기간에 놀랄 만큼 성장했다.
수많은 천재들을 봐온 코치들마저도 그의 재능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탕!! 탕!! 탕!!
오늘도 코트에서는 여지없이 훈련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민과 이두희는 비시즌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하는 게 어려울 법도 했지만 전혀 힘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실시간으로 실력이 성장하고 있는데 지루할 틈이 없겠지.
어떤 선수라도 이런 기회를 주면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혁과 같이 훈련을 하며 맞춤 코칭을 받는다는 건 정답지를 옆에 두고 문제를 푸는 것과 같았으니 말이다.
쿵!!
“후우···.”
지혁의 백핸드 다운 더 라인으로 위닝샷이 나오자 크게 숨을 몰아쉬는 정민.
그는 이제야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속 훈련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저도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형의 실력이 더 는 것 같아요. 기사에서 하는 말들이 정말이었네요.”
“음.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백핸드도 그렇고 모든 부분에서 전체적으로요. 그런데 세계 랭킹 1위를 찍고 나서도 이런 게 가능한 거예요? 형 정도의 수준이 되면 실력이 정체되는 게 정상이 아닌가.”
정민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난 일이었다.
“최정상급 선수인 형이 이렇게 빨리 달리면 그의 밑의 선수는 도대체 어떻게 따라잡으라는 거예요···.”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 이건 졸지에 제트기를 타고 가는 수준이었다.
암울한 현실에 정민의 얼굴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최종 목표로 잡아 놓은 지혁을 이번 생에 따라잡을 수 있을지 깊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솔직히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지혁의 자리를 빼앗는 건 현실적으로 많이 힘들어 보였다.
실제로 전문가들도 현재 정상급 선수들이 차지하고 있는 아성을 유망주들이 무너트릴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지금 테니스계는 역사상 가장 찬란한 황금기였으니.
“······.”
지혁과 정민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이두희는 수준 높은 대결에 완전히 홀린 건지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주니어 선수들을 상대로 매번 승승장구하다가 진짜 천재를 만나고 나니 자신의 재능과 실력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탓이다.
“두 사람 다 대단하지?”
“네···. 제가 절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물론 지혁이형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에요.”
“이지혁 선수는 그냥 테니스의 신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해. 그랜드슬램에 출전하는 상위 랭커들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거든. 말 그대로 천재지변에 가까운 존재지. 한국에서 어떻게 저런 선수가 나왔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야.”
“그런 선수가 제 코칭을 봐주고 있는 거네요.”
“그래. 그러니까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 평생 동안 오기 힘든 행운이니까. 퓨처스 몇 번 나갈 바엔 이곳에 집중하는 게 몇 천배는 훨씬 나아.”
자신의 선수가 진심으로 잘되길 바라는지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는 코치.
이두희는 그 말에 동의하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다음은 두희 차례네. 이제 코트 안으로 들어가면 돼.”
“네!”
연습 경기의 복기가 끝나자 지혁의 코치는 이두희에게 말을 전달했다.
그렇게 훈련장에서는 큰 대답이 들리고 선수들이 훈련을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
유망주들의 코칭과 개인 훈련에 집중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겨울에 잡혀있던 지혁의 슈퍼 매치 날짜가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 이번 이벤트 경기는 서울에서 개최되는 터라 한국 팬들이 엄청 기대하고 있던 대회였다.
정민과 이두희는 디데이를 며칠 앞두고 슈퍼 매치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테니스계의 두 정점이 붙게 된다는데 주니어 선수의 입장에서 커다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바쁜 일정 때문에 그랜드슬램을 직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터라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 지혁이형의 상대가 라파엘 나달이라고 했죠? 그 정도로 유명한 선수가 또 한국에 올지 몰랐어요.”
“나달이 유망주일 때부터 H자동차가 전폭적인 지원을 한 덕분이지. 그런 끈끈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거야. 빅4의 대결을 한 번 성사시키려면 정말 천문학적인 돈을 써야 하니까.”
“티켓을 구하기 엄청 힘들다고 하던데 저희는 그나마 다행이네요.”
“응. 형이 관계자 좌석을 줬으니까. 관전하는데 가장 좋은 자리라서 중요한 장면을 놓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거야.”
정민은 슈퍼 매치가 열리는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이미 S증권이 주관한 챌린저 대회를 치른 경험이 있었기에 이두희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데 형은 이벤트 경기에서 누가 이길 것 같아요? 하드 코트라서 환경은 어느 쪽에도 불리하지 않고 공평하잖아요.”
“글쎄. 나는 나달이 플레이하는 걸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래도 최근 성적을 생각하면 지혁이형이 이길 확률이 더 높을 거야. 클레이 코트를 제외하면 상대 전적이 확실하게 우세하니까.”
“우리한테는 전력을 다할 일이 없어서 궁금하긴 하네요. 과연 최선을 다하면 어떤 실력일까요.”
“분명히 뭘 상상하든 그걸 넘어서겠지. 게다가 나달은 베이스라이너라서 배울 점이 정말로 많을 거야.”
며칠 후, 슈퍼 매치 당일.
정민과 이두희는 선수 관계자석에 앉아서 경기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1,000석에 달하는 잠실 실내체육관의 관중석은 이미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완벽하게 만석이었다.
이것만 봐도 한국에서 테니스의 인기가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상승한 걸 알 수 있었다.
2007년에 H카드가 주관한 슈퍼 매치로 페더러와 샘프라스가 왔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자리가 텅텅 비어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자국의 선수가 잘 나가는 게 종목의 홍보에는 가장 효과적이었다.
우와아아아아!!!
곧이어 선수들이 경기장에 등장하자 어마어마한 함성이 쏟아졌다.
지혁과 나달은 세계적인 스타답게 엄청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정규 대회가 아닌 데다가 제법 오랜만에 만난 만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두 선수.
경기는 간단한 랠리를 거친 후에 긴장감 없이 가벼운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물론 힘을 대부분 빼고 플레이해도 관중들의 눈에는 신세계였지만.
탕!!
오오오!!
그저 스트로크가 코트 좌우를 반복하는 장면이 이어졌음에도 연달아 탄성을 내뱉는 관중들.
채찍처럼 쭉 뻗는 타구의 궤적과 급격한 각도로 튀어 오르는 리버스 포핸드는 마치 마법처럼 느껴졌다.
국내의 전문가들도 일반인들과 비슷한 심정인지 입을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업 선수들과 격이 다른 빅4의 경기를 보고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와···. 지혁이형이 엄청 봐준 거였네. 나는 아직 버틸 수가 없어서 몰랐는데 랠리가 제대로 이어지면 저렇게 되는구나.”
“대충하는 것 같은데도 퓨처스 선수들이 전력으로 치는 샷보다 훨씬 수준이 높아요. 솔직히 저한테 저런 샷이 온다면 받아낼 자신이 없어요.”
“아! 저 백핸드를 저런 방식으로 막아낼 수도 있구나. 과연 나달이야. 평범한 선수들처럼 쉽게 경기를 내주는 일은 없겠네.”
정민과 이두희는 경기 초반부터 느끼는 점이 많은지 계속해서 고개를 끄떡였다.
이제 막 퓨처스에서 성적을 얻는 선수들에게 4~5단계나 높은 종결급 대회에서 우승하는 괴물들의 대결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시간이 몇 년이 지나더라도 흉내 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천재들마저 벽을 느끼는 걸 보면 빅4가 정말 대단하긴 했다.
이 정도 실력을 가진 선수들은 같은 빅4를 제외하면 앞으로 수십 년 간은 나타나지 않겠지.
끼이익- 탕!!
하드 코트에서 나는 특유의 거슬리는 소리와 공을 때리는 타격음이 들리길 10여분.
드디어 선수들의 몸이 풀리기 시작한 건지 경기의 수준이 무서운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점점 빨라지는 템포와 위력을 더해가는 스트로크에 관중들은 숨이 막히는지 급격히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건 정민과 이두희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일반인들보다 아는 게 많은 탓에 느끼는 바가 훨씬 컸던 것이다.
쿵!!
[서티 포티.]
베이스라인에서 몇 발자국 물러난 상태에서 기어코 위닝샷을 따내는 나달.
상위 랭커들 사이에서도 코트 커버력이 최상위권인 지혁의 수비를 뚫어낸 걸 보면 과연 베이스라이너의 정점다운 실력이었다.
[게임 나달 4-2.]
“아, 결국 여섯 번째 게임에서 브레이크를 당했네요. 역시 나달은 지혁이형한테도 쉬운 상대가 아닌가 봐요. 만약 이대로 경기가 진행된다면 이벤트 매치에서 질 수도 있겠어요.”
“아니, 벌써 결론을 내리긴 너무 빨라. 아직은 여력을 많이 남겨둔 상태거든.”
“······지금도요? 저는 한참 전부터 전력을 발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믿기 힘들겠지만 내가 이전에 경험한 형의 실력은 이것보다 더 대단했어.”
정민의 말대로 지혁과 나달은 치열해 보이는 경기의 겉모습과 다르게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굳이 이벤트 경기에서 살벌한 분위기를 풍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시즌기라 컨디션과 전략도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았는데 무리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힘을 남겨두고 있어도 다른 선수들의 경기와 비교하면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서 관중들은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게임 나달 5-2.]
지혁이 승부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아서일까.
나달은 먼저 스코어를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아아···.
원하는 방향대로 경기가 흘러가지 않자 경기장에서는 아쉬운 목소리가 가득 찼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관중들은 자국의 선수가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였다.
아무리 한국에 나달의 팬이 많다고 해도 지혁보다 많을 리가 없었다.
세계 랭킹과 성적마저 더 뛰어난 터라 지혁은 홈 그라운드에서 일방적인 응원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지는 그림은 별로겠지. 다른 나라에서 열린 이벤트 경기라면 몰라도 이곳은 한국이니까 말이야.’
지혁은 자신이 밀리는 상황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팬들이 점점 많아지자 적당히 하려던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비싼 돈과 시간을 지불하고 경기장에 온 자신의 팬들에게 보답하려면 승리를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다.
[서브 리.]
휴식을 마치고 다시 코트 위로 올라가는 선수들.
경기장은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웅성거렸다.
지혁이 기존에 사용하던 라켓을 벤치에 내려놓고 가방에서 새로운 라켓을 꺼낸 것이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뻔했다.
“드디어 제대로 할 마음이 생겼구나!”
“당연히 이래야지! 여지까지 왔는데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정민과 이두희는 지혁의 진정한 실력을 마침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사상 최강이라고 평가받는 선수의 진심이라니 생각만 해도 흥분되었다.
과도한 아드레날린의 분비로 일어난 손의 경련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라면 이 상태가 한동안 지속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