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압도적인 실력
[게임 리 5-0.]
경기는 기존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20대 후반의 베테랑 선수인 러시아 선수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스코어를 헌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1라운드에서 지혁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조기 탈락은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와 동행한 코치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는지 담담한 표정이었다.
정작 경기를 하고 있는 러시아 선수는 자신의 무력함에 미칠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원래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스타 선수를 만나면 대부분의 탑랭커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막 메이저 대회에 데뷔한 루키들은 1~2년 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이건 지혁의 나이가 이제 21살이 된 이유도 있었다.
대다수의 탑랭커들이 지혁보다 나이가 많은 만큼 은퇴할 때까지 매번 만나게 될 테니.
쾅!!
다시 러시아 선수 차례로 넘어간 서비스게임.
그는 베이글이라도 막아보려는지 전력을 다해 라켓을 휘둘렀다.
190cm의 장신이 왕관 자세에서 몸통을 회전시키자 강력한 타구가 서비스 코트를 빠르게 강타했다.
‘역시 탑랭커야. 정민과 이두희랑 훈련할 때 하고 차원이 다르네.’
그들이 아무리 대단한 재능을 가진 유망주라도 랭킹 65위의 탑랭커와 비교하면 아직도 실력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도 훈련을 하면서도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이제야 조금 실전 감각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탕!! 탕!! 탕!!
그렇게 날카로운 각도의 스트로크가 쏟아지면서 랠리가 계속 이어졌지만
지혁이 실점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 선수의 실력으로는 지혁의 괴물 같은 코트 커버력을 뚫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운만 좋으면 랭킹 20~30위대의 탑랭커들도 쓰러트릴 만한 기량이지만 탑10에게 이길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 한창 전성기인 나이임에도 아직까지 65위에 머무르는 거겠지만.
상위 랭커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뭔가 특별한 점이 필요했는데 그는 전반적으로 무난무난한 탓에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다.
와아아······.
이때까지 지혁의 경기를 본 적이 없었던 관중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그들이 보기에 엄청난 위력의 스트로크가 쉴 틈도 없이 떨어지고 있는데 실수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아서였다.
기계 같은 그 대처에 관중들의 머릿속에는 마치 조코비치의 경기를 보는 팬들처럼 완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골든 보이의 코트 커버력이 이렇게까지 대단했었나? 스트로크에 약점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맞아. 작년의 조코비치가 떠오르는 경기력이야. 아니, 서브하고 다른 공격 옵션들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상인가.”
“허···. 공격력도 대단했는데 이제 수비까지 완벽해졌잖아. 저기서 더 대단해지다니 다른 탑랭커들은 어쩌라는 건지.”
“어차피 이전에도 같은 빅4가 아니라면 승부는 뻔했잖아. 이제 믿을 건 작년에 골든 보이에게 패배를 안겨준 나달하고 조코비치뿐이야.”
“로저는?”
“글쎄······. 페더러는 머레이한테 밀려서 랭킹이 5위까지 떨어져서. 전성기라면 몰라도 30대에 들어선 지금은 많이 어려울 거야. 최근 같은 빅4를 한 상대 전적도 별로니까.”
워낙 선수들 간의 격차가 심해서일까.
경기장에선 긴장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누가 러시아 선수가 역전할 거라 생각하겠는가.
아직 경기가 끝나려면 최소 1세트 이상이 남아있었음에도 대부분의 팬들은 이미 승자가 결정되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세트 리.]
순식간에 1세트를 마무리하고 2세트에 들어가는 경기.
지혁은 원한다면 경기 시간을 더 단축할 수 있었지만 실전 감각을 위해 의도적으로 완급 조절을 했다.
덕분에 러시아 선수는 천천히 포인트를 잃어가며 말라죽어갔다.
[게임 리 1-0.]
[게임 리 2-0.]
······.
[게임 세트. 매치 리 6-0, 6-0.]
짝짝짝짝짝짝.
결국 지혁은 시즌 첫 경기를 두 번의 베이글로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하나 같이 말했다.
올 시즌의 골든 보이는 작년보다 훨씬 성적이 좋을 거라고 말이다.
“호주 오픈을 기대해봐도 되겠어. 이 정도면 런던 올림픽과 US 오픈의 기세를 충분히 이어갈 것 같아.”
“나는 무엇보다 조코비치와의 리벤지 매치가 기대돼. 아직 골든 보이의 전적이 밀리고 있지?”
“어. 꽤 큰 차이지. 그런데 오늘 리의 경기를 보니까 올해를 기점으로 그게 달라질 수도 있겠어.”
“정말로 그렇게 되면 사상 최초로 캘린더 그랜드슬램이 나올지도 모르겠네.”
1년에 3개의 그랜드슬램을 우승하는 업적은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모두 달성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무적의 실력을 자랑하던 그들도 모든 대회를 전승하지 못했다.
같은 빅4들이 끝까지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 주력 코트가 틀린 이유도 컸다.
나달, 페더러, 조코비치가 클레이, 잔디, 하드 코트를 하나씩 지키고 있던 탓에 완벽하게 시즌을 지배하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
지혁은 1라운드를 통과하고 결승전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진출했다.
애초에 작은 규모의 대회에서 그를 상대할 만한 선수가 있을 리가 있겠는가.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건 솔직히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테니스 팬들도 지금 같은 진행을 예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혁의 결승전 상대는 랭킹 23위의 이탈리아 선수, 안드레아스 세피였다.
과반수의 코치들이 존 이스너가 올라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중도에 탈락해버린 것이다.
랭킹이나 성적을 생각하면 전력 차이가 상당했는데 아마 시즌 초반이라 폼이 완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경기라 최선을 다하지 않을 걸 수도 있고.
이번 대회는 어디까지나 호주 오픈의 전초전이었다.
[드디어 시드니 오픈의 결승전이 시작하는군요. 며칠 전에 저희가 예상한 대로 이지혁 선수가 최종 라운드까지 올라왔습니다. 상대는 안드레아스 세피네요.]
[빅4가 참가하지 않은 대회라 이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애초에 경계할만한 선수가 없었어요. 지금까지 보여준 걸 생각하면 우승도 간단하게 해낼 겁니다. 랭킹 23위의 선수는 이지혁 선수를 절대 이길 수가 없어요.]
지혁이 참가한 대회가 비록 ATP 250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결승전은 한국 공중파 스포츠 채널에서 송출되고 있었다.
방송사에서 중계권을 사더라도 중도탈락을 하는 경우가 전무한 데다가 시청률마저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네. 저희뿐만 아니라 해외의 전문가들도 경기의 승률은 9:1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청자분들도 마음 졸이실 필요 없이 그냥 이지혁 선수의 플레이를 즐기시면 될 겁니다.]
[요즘 백핸드가 물이 올랐다는 평이 많으니 이번 경기의 관전 포인트는 거기에 두면 되겠네요. 최강의 백핸드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 조코비치와 비교해도 좋겠습니다.]
쾅!!
결승전은 세피의 첫 서브로 시작되었다.
그는 클레이와 하드 코트에서 유독 좋은 성적을 쌓은 만큼 꽤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지혁과 랠리에서 거의 대등한 대결을 펼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이번 대회에서 처음이었기에 관중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지혁이 결승전까지 워낙 압도적인 스코어로 올라온 탓에 경기가 허무하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타다다다! 탕!!
191cm의 거구와 근육질 몸으로 강력한 스트로크 위력을 자랑하는 세피.
임팩트 소리와 타구가 쏘아지는 속도만 봐도 얼마나 그의 피지컬이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 정민이나 이두희가 있었다면 저 포핸드를 받아치지도 못했겠지.
저 무식한 힘에 라켓을 놓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오. 생각한 것과 다르게 경기가 제법 팽팽한데요? 안드레아스 세피가 놀라운 괴력을 자랑하면서 공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국내 선수에게서 보기 힘든 힘이에요. 역시 유럽의 탑랭커답게 피지컬이 엄청납니다. 이러니 아시아 선수들이 그랜드슬램에서 고전을 하는 거죠. 신체 능력이 거의 괴물이에요.]
[사실 이지혁 선수가 너무 대단해서 그렇지 랭킹 23위도 어디 가서 무시받을 수준이 절대 아니거든요. 저 실력이면 ATP 250, 500에서 우승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아요.]
[후···. 지난 3년 동안 저희 눈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새삼 깨닫게 되네요. 이게 전부 그랜드슬램을 최연소로 우승하고 논 캘린더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한 이지혁 선수 탓입니다.]
[벌써부터 10년 뒤가 걱정되네요. 이 선수가 은퇴를 하고 나면 테니스를 보는 재미가 없겠어요. 이런 천재가 연속해서 나오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안드레아스 세피의 활약으로 경기가 팽팽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해설들은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지혁에 대한 믿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리 초반에서 불리하더라도 얼마든지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탕!!
[게임 리 2-2.]
해설들의 믿음처럼 지혁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빠르게 살아나는 실전 감각에 의도적으로 경기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경기력이 기대한 것보다 괜찮은데? 존 이스너 대체하기에 충분하겠어.’
경기가 대등한 대결처럼 보이는 건 지혁이 세피와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주고 있어서였다.
물론 저 무시무시한 위력의 스트로크를 보고 있는 팬들은 그런 생각을 못하겠지만 말이다.
상식적으로 191cm의 거구가 전력을 다한 타구를 누가 여유를 부리면서 받는다고 생각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혁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줄 알았다.
[게임 리 4-4.]
‘몸풀기는 어느 정도 된 것 같고. 슬슬 제대로 해볼까. 괜히 듀스까지 갈 마음은 없으니까.’
지혁은 1세트 후반이 돼서야 경기를 본격적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안드레아스 세피는 그 유명한 골든 보이와 대등한 대결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가득 찬 표정이었다.
잠시 후에 어떤 꼴을 당할지도 모른 채 말이다.
[서브 세피.]
방금 전의 서비스게임이 짝수였기에 경기는 휴식을 거치지 않고 바로 시작했다.
쾅!!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은지 T존 위를 정확하게 강타하는 세피의 퍼스트 서브.
빅 서버 못지않은 그의 실력에 팬들을 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지혁이 아닌 다른 탑랭커였다면 에이스를 내주고도 남았겠지.
그렇게 세피는 훌륭한 서브를 바탕으로 랠리에서 유리한 고지를 가져갔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점수를 쌓아왔던 만큼 이번에도 그가 서비스게임을 지키는 건 문제가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쿵!!
지혁이 예술적인 각도로 백핸드 위닝샷을 집어넣기 전까지는.
따라 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비현실적인 스트로크에 당하자 세피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같은 빅4도 처음 당했을 때는 비슷한 반응이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심지어 지금 지혁의 실력은 그때보다 더 대단해졌으니.
저벅저벅.
엄청난 백핸드를 성공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베이스라인으로 되돌아가는 지혁.
무심한 표정으로 리턴을 준비하는 그 모습에 세피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