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버릇없는 유망주
지혁은 페레이라의 비열한 수작을 직접 겪고 나서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선수들과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고 있던 볼 키즈들은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본능적으로 뭔가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기로 골든 보이는 가만히 당하고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고작 유망주 따위가 테니스계 최고의 스타의 심기를 건드리다니.
볼 키즈들은 페레이라를 마치 미친 사람 보듯이 쳐다봤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짓거리를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저벅저벅.
5게임을 마치고 벤치로 돌아가는 선수들.
페레이라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불편한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비록 작전은 실패했지만 지혁의 멘탈을 어느 정도 흔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때까지 이런 심리전을 걸어서 재미를 적잖이 봐왔기에 그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실력 차이가 현격하더라도 평정심만 흔들 수 있다면 충분히 강자를 쓰러트릴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마침 지혁은 더티 플레이의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는 어린 선수다.
[휴······. 다행이네요. 방금 전 상황은 꽤 위험했어요. 잘못하면 이지혁 선수가 스트로크에 맞을 뻔했습니다. 어딘가 고의성이 느껴지는 샷이었는데 페레이라가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겠죠?]
[설마요. 저런 사고는 워낙 많이 일어나는 편이니 우연일 겁니다. 체어 엠파이어도 그냥 내버려 두는 걸 보면 저와 같은 생각인 것 같고요.]
[네.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요.]
해설들은 방금 같은 상황이 아직 한 번밖에 나오지 않았기에 판단을 보류했다.
일부로 상대 선수에게 샷을 맞추는 미친 선수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혁의 팬들로 가득 찬 테니스 커뮤니티는 페레이라를 매달아야 한다며 난리가 났다.
ㅡ 아니 저 새끼가 돌았나 어디서 개수작을 해?
ㅡ 지혁이가 아니라 다른 선수였더라면 무조건 맞았겠는데? 리플레이 나오는 거 보니까 엄청 위험해 보이네. 도대체 저 상황에서 어떻게 위닝샷을 친 거냐···.
ㅡ 쟤 해외 테니스 팬들 사이에서 미친놈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였네 ㄷㄷㄷ 그랜드슬램에서 저딴 짓을 한다고?
ㅡ 사악하게 웃는 거 엄청 밉상이네 ㅅㅂ 방금 전에 나온 바디샷 노린 거 분명히 고의임.
ㅡ 난 라켓 부술 때부터 알아봤다 ㅋㅋㅋ 오랜만에 유망주 중에 돌아이 하나 나왔네 실력만 괜찮으면 나름 재미있는 캐릭터될 듯
ㅡ 그런데 이지혁 열 받은 거 같은데? 표정 약간 굳은 느낌 들지 않나?
ㅡ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1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하면 어떤 경기가 나올지 궁금함 ㅋㅋ
ㅡ 안 봐도 뻔하지 페레이라가 개털릴 게 분명함. 시드니 오픈에서 랭킹 23위 가지고 노는 거 못 봤냐?
[레디.]
그렇게 바디샷의 고의성을 따지며 테니스 팬들이 한참 시끄러울 때.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경기가 시작했다.
이번 게임은 지혁의 서브 차례였다.
통. 통. 통.
테니스공을 바닥에 튕기며 뜸을 들이길 잠시. 곧이어 자신만만하던 페레이라 앞에 무시무시한 플랫 서브가 떨어졌다.
[피프틴 러브.]
완전히 달라진 위력에 전광판으로 고개를 휙! 돌리는 관중들.
그러자 233km라는 숫자가 떡하니 찍혀 있었다.
몇몇 팬들이 예상한 것처럼 지혁이 경기에서 완급 조절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게임 리 5-1.]
안 그래도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격차가 더 벌어졌으니 남은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너무나 뻔했다.
페레이라가 공을 건드려 보지도 못한 채 서비스게임이 종료되어 버린 것이다.
지혁은 퍼스트 서브 하나만으로 상대의 브레이크 시도를 완벽하게 제압했다.
[서브 페레이라.]
그렇게 지혁의 서비스게임이 끝나자 이번에는 상대 쪽으로 넘어가는 서브권.
페레이라는 빈 공간을 라켓으로 헛스윙한 게 열이 받았는지 이를 악물며 퍼스트 서브를 준비했다.
쾅!!
193cm에 달하는 장신의 키와 훌륭한 피지컬 덕분일까.
타구는 탑랭커 평균 이상의 속도를 내며 T존에 내려꽂혔다.
물론 이 정도로 지혁의 리턴을 뚫어내진 못했다.
탕!! 탕!! 탕!!
페레이라는 적어도 랠리만큼은 다른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고속 서브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지 스트로크 대결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조건이었으니 말이다.
쿵!!
[러브 서티.]
“······.”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 많이 달랐다.
그렇게 랠리마저 안 되자 도저히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지 비열한 짓거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앗!”
탕!!
마치 실수인 척 바디샷을 유도하는 페레이라.
지혁은 똑같은 수작에 당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기에 빠르게 옆으로 움직이며 리버스 포핸드를 쳤다.
평범한 스트로크보다 깊은 포물선 궤적을 그린 타구는 코트를 가격하고 몇 뼘이나 더 높은 위치로 튀어 올랐다.
“악!”
[러브 포티. 세트 포인트 리.]
물 흐르는 듯한 지혁의 동작에 넋을 놓고 있던 페레이라는 탑스핀 스트로크를 가슴 정중앙에 맞고 뒤로 넘어졌다.
아무리 비교적 물렁한 테니스공이라도 150km가 넘는 속도로 맞으면 전력을 다해 주먹으로 가격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분명 내일이 되면 가슴에 시퍼런 멍이 생길 것이다.
페레이라는 활활 불타는 눈빛으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질이 더러운 만큼 자신이 당한 걸 복수할 생각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세트 리.]
하지만 1세트의 포인트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에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졌다.
아직 시간이 넘치도록 있는 터라 아쉬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
페레이라는 2세트에 들어가고 나서도 비매너 플레이를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실력으로 이길 수 없으니 이런 선택지밖에 없겠지.
지혁은 악의가 가득 찬 샷들을 실력만 가지고 완벽하게 부셔버렸다.
쿵!!
[게임 리 3-0.]
어떤 플레이를 해도 득점을 한 번도 얻지 못하자 빠르게 멘탈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는 페레이라.
그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초췌해져 가고 있었다.
경기력이 상승한 지혁을 따라가면서 가랑이가 찢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부상 위험이 높은 하드 코트에서 몸을 날리는 모험까지 했지만 그가 얻은 득점은 여전히 0일뿐이었다.
탕!!
지혁은 베이스라인에 떨어지는 타구를 그림 같은 백핸드로 반격했다.
같은 빅4가 아니라면 흉내조차 불가능한 스트로크는 아주 간단하게 득점을 얻어냈다.
이때까지 열 번이나 넘게 반복된 장면인데도 해결책이 없나 보다.
알고도 못 막는 수준의 백핸드.
그 충격적인 격차에 관중들은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골든 보이야···. 진심으로 하니 상대가 안 되는 구만.”
“허···. 랠리가 전혀 나오지 않잖아? 도대체 실력 차이가 얼마나 난다는 거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거지. 역시 경기 초반에 게임을 내준 건 적당히 봐준 게 맞았어.”
“쯧. 비매너 플레이를 하더만 꼴좋네.”
“그래. 이번 기회에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 것도 괜찮겠지. 그랜드슬램의 높은 벽을 한 번 겪고 나면 태도가 많이 달라질 테니 말이야.”
관중들은 불량한 태도를 보이던 선수가 졸전을 펼치자 은근히 비웃음을 보냈다.
경기도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고 경기장의 분위기마저 최악이자 페레이라의 멘탈은 박살 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다.
[세트 리.]
일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6-0, 베이글로 종료되는 2세트.
경기는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지경까지 몰렸다.
솔직히 역전은커녕 이젠 더블 베이글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
휴식 시간 동안 코트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페레이라가 암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티를 내서 볼 키즈들이 그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혁에게 바디샷을 날릴 정도로 미친놈이 갑자기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른다.
또라이는 가능하다면 피해 가는 게 상책이었다.
휙.
‘이제 주제 파악이 어느 정도 된 건가?’
지혁은 눈이 마주치고 고개를 빠르게 돌리는 페레이라의 모습에 그의 심경 변화를 눈치챘다.
경기를 하는 동안 상대의 눈빛이 점점 변해간 터라 지금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예측하는 건 너무나 쉬웠다.
사실 어떤 선수라도 저런 입장에 처한다면 똑같은 반응을 보여줬을 것이다.
리버스 포핸드와 트위스트 서브에 바디샷을 맞고 베이글까지 당해버렸는데 정신이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실제로 페레이라는 지금 고개를 숙인 채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빅4의 실력이 설마 이렇게 엄청날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레디.]
체어 엠파이어의 콜이 떨어지자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코트로 걸어가는 페레이라.
승부욕이 완전히 사라진 모습을 봤을 때 경기를 완전히 포기한 듯했다.
[게임 리 1-0.]
[게임 리 2-0.]
[게임 리 3-0.]
3세트는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스코어가 쌓였다.
사실 선수 한 명이 패배감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졸전이 펼쳐지는 건 당연했다.
그 무력한 모습에 팬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반응들이 나왔다.
ㅡ 저게 경기 초반의 미친놈이랑 동일인물이 맞냐? 갑자기 왜 이렇게 불쌍해 보이는 거지
ㅡ 이지혁한테 참교육 제대로 당했네 ;; 바디샷에 베이글 스코어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ㅡ 이 정도면 유망주 죽이기 아니냐 ㅋㅋㅋ 쟤 이번 호주 오픈 끝나고 슬럼프 확정일 것 같은데. 멘탈이 가루가 될 때까지 박살 났으니 랭킹 꽤 많이 떨어질 걸.
ㅡ 전부 자업자득이니 동정할 필요 없음. 먼저 수작을 부렸으니 지금 상황은 인과응보다.
ㅡ 애초에 작전이 통할 만한 선수한테 써야 되는데 상대를 잘못 골랐음.
ㅡ 이제 그만 때려라 ㅋㅋㅋ 쟤 눈 보라고 이미 죽어있는 상태임
ㅡ 어림도 없지 경기 끝나면 바디샷 날렸다고 가루가 되도록 까일 일만 남았다. 해외에서 이지혁 팬덤 엄청나거든 ㅋㅋ 그래도 이번 경기로 테니스 팬들한테 이름은 많이 알렸네
ㅡ 그딴 악명 누가 바라냐고 ㅋㅋㅋㅋ 실력이라도 보여줬으면 악동 캐릭터 얻었겠지 그런데 베이글로 털려서 ㅈ밥 이미지만 생김 ㅋㅋ
페레이라는 다른 대회에서도 비매너 플레이를 꽤 많이 저질렀기에 그를 동정하는 여론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고작 바디샷 한 번 날린 것치고 과한 대가였지만 지혁은 상대를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다.
본보기로 응징을 해놓아야 똑같은 상황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은 3세트는 페레이라가 무력한 모습으로 포인트를 헌납하는 장면들이 반복되었다.
마치 프로 선수가 아마추어를 가지고 노는 듯한 모습에 해설자들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경기는 이제 승부라고 보기 힘든 지경까지 와버린 것이다.
[상대가 아예 안 되네요. 정말 처참한 광경입니다···.]
[사실 그동안의 커리어나 세계 랭킹을 이런 상황은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었죠.]
[두 선수의 대결이 너무 일찍 이뤄진 것 같습니다. 페레이라에게는 실력을 단련할 시간이 더 필요해요.]
[네. 최소한 5년은 더 지나야 볼만한 경기가 나올 겁니다.]
[유망주가 이지혁 선수에게 패배하는 건 당연한 결과이니까 페레이라는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승부였어요. 상대가 골든 보이였으니 그가 아니라 어떤 선수라도 같았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