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되찾은 랭킹 1위
[게임 세트. 매치 리.]
결국 경기는 지혁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체어 엠파이어의 마지막 콜이 떨어지자 페레이라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영혼 빠진 표정으로 경기장을 급히 빠져나갔다.
그가 가진 악명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퇴장이었다.
첫 그랜드슬램 상대가 테니스계의 끝판왕인 지혁이었으니 충격을 받는 것도 당연한 거겠지만.
이번 호주 오픈에서 더 높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했으니 아마 당분간은 얌전해질 것이다.
메이저 대회에는 비매너 플레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선수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 말이다.
와아아아아!!
관중들은 출구로 나가는 패자에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고 지혁의 승리에 뜨거운 환호성을 보냈다.
대부분이 골든 보이의 플레이를 보러 온 만큼 고작 1라운드 경기였음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풋내기 유망주가 겁도 없이 바디샷을 날린 덕분에 기대 이상의 경기를 봤어. 실력은 다른 탑 랭커들보다 형편없지만 나름대로 쓸모가 있구만.”
“그런데 첫 그랜드슬램 데뷔부터 더블 베이글이라 조금 불쌍하기도 하네. 분명 엄청 기대하며 여기에 왔을 텐데 말이야.”
“본인이 자처한 일이지. 아마 골든 보이에게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짓을 하지 못할 걸. 이번에 그렇게 당했으니까.”
그렇게 지혁은 예정대로 승자 인터뷰를 마치고 호주 오픈 1라운드를 마무리했다.
[이지혁, 남미의 악동 마르셀로 페레이라를 상대로 더블 베이글을 성공하며 완승.]
[더티 플레이에도 변수는 없었다. 전문가들은 침착한 대응과 훌륭한 멘탈에 주목해.]
[바디샷을 백핸드로 받아치는 모습이 호주 오픈 1라운드의 명장면으로 꼽혀.]
[남미의 천재 유망주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대가를 제대로 치르다.]
[경기를 패배하고 넋이 나간 표정의 페라이라. 1라운드 타락의 충격이 큰지 기자들의 인터뷰도 전부 거절해.]
[테니스 전문가들, “골든 보이의 실력이 작년보다 더 완벽해졌다. 언제 봐도 놀라운 성장 속도. 정점에 도달하고 나서도 실력이 정체하지 않는 점이 그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
페레이라와의 경기가 끝나고 지혁은 큰 위기를 겪지 않고 무난하게 상위 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기쁜 소식이 생겼다.
저번 런던 올림픽 도중에 백핸드의 등급이 상승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음 등급에 필요한 포인트가 한 번 더 모인 것이다.
이건 작년 올림픽과 US 오픈을 모두 우승한 덕분일 것이다.
다른 기술들의 등급을 올리는데 보통 1년가량이 걸렸던 걸 생각하면 지금 얻은 수확은 고작 4개월만.
우승과 준우승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제대로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모든 조건이 충족되자 지혁은 망설이지 않고 어플의 포인트를 전부 사용했다.
이미 목표치가 모이기 한참 전부터 성장 방향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이지혁]
근력: 80 민첩: 80 체력: 80 신장: 188cm▲
서브(A+), 포핸드(S), 백핸드(S), 풋워크(S), 외모(A), 트릭샷(A), 찰나(A+)
[포인트: 0]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막대한 정보량에 몸을 가늘게 떠는 지혁.
그는 이번 성장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지금보다 실력이 떨어졌을 때도 조코비치와 동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를 뛰어넘었을 것이 분명했다.
“결승전이 기다려지네…….”
마침 니시코리 케이가 8강 상대이니 그에게 연습해보면 되겠지.
세계 랭킹 7위 정도면 실력을 시험해보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호주 오픈 8강 당일.
아시아 최강의 선수들이 대결해서일까.
경기장은 유독 높은 비율로 동양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랭킹 2위와 랭킹 7위의 대결, 단순히 숫자로 보면 치열한 경기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만했다.
물론 두 선수의 기량 차이는 고작 5위 차이가 아니었다.
1~5위를 차지하고 있는 노박 조코비치, 이지혁, 라파엘 나달, 앤디 머레이, 로저 페데러와 그 밑의 랭킹은 느낌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상위 다섯 선수를 제외하고 5위 안에 들어온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탓에 테니스 팬들은 ATP 랭킹 5위의 선수들을 천상계로, 그 밑의 인간계로 나누었다.
엔디 머레이를 포함한 빅5를 급히 다른 선수로 분류한 것이다.
그리고 그랜드슬램과 마스터즈의 우승자가 오직 빅5들에게서만 나왔기에 그 평가는 거의 정설처럼 굳어졌다.
“리! 역시 8강에서 너랑 경기하게 될 줄 알았어.”
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지혁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니시코리.
비시즌기 동안 얼마나 철저한 훈련을 했는지 그의 몸 상태는 겉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
그러니 엄청난 기세로 다른 탑랭커들을 탈락시킬 수 있었던 거겠지.
“요즘 경기력이 대단하던데요. 특히 16강에서 다비드 페러를 상대로 보여준 실력은 저랑 코치님들도 놀랐어요. 아마 전문가들도 그 경기에 큰 호평을 했었죠?”
“네가 그렇게 빨리 앞서가는데 너를 목표로 하고 있는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준비해 온 게 많으니 기대하라고.”
니시코리는 유명한 네임드 선수이자 인간계 수문장으로 불리는 다비드 페러를 3-1로 꺾고 올라와서인지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비시즌기 동안 유의미한 진전이 있었나 보다.
‘실력이 더 늘었다면 나야 좋지. 내 실력을 시험해보는데 더 적합할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두 선수는 시작 시간까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코트 위로 올라갔다.
서로 오늘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경기의 진행 속도는 다른 때에 비해 아주 빨랐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니시코리.]
서브권이 정해지자 테니스공을 전달하는 볼 키즈들.
니시코리는 경기 시작 전과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로 돌변했다.
중계 화면에 이글거리는 눈빛이 실시간으로 잡히자 테니스 팬들은 오…. 하며 기대를 했다.
보통 그들의 경험상 이런 분위기가 흐르면 명경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탕!!
니시코리는 테니스 선수치고 작은 178cm의 키를 가지고 있었기에 서브의 위력 자체는 평범했다.
도저히 랭킹 7위의 서브라고 보기 힘든 모습.
하지만 이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저 위치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장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지혁은 실력이 얼마나 상승했는지 확실하게 비교하기 위해서 경기 초반에는 이전과 비슷한 실력으로 플레이할 생각이었다.
[피프틴 러브.]
[서티 러브.]
[서티 피프티.]
오오오….
제법 대등한 스트로크 대결이 이루어지자 감탄의 목소리가 퍼지는 경기장.
특히 호주까지 원정을 온 일본 국적의 팬들은 더욱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니시코리의 활약이 그들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메이저 스포츠에서 이 정도로 대단한 선수를 배출해본 적은 드물었으니 말이다.
[게임 니시코리 1-0.]
‘확실히 8강 전에 상대한 선수들과 수준이 다르구나. 오늘 경기에 자신 있는 태도를 보인 게 이유가 있었어.’
과연 탑10 안에 들어가는 상위 랭커다운 실력이었다.
지혁은 정면대결로 게임을 뺏어가는 니시코리의 활약에 비록 브레이크를 실패했지만 미소를 지었다.
간만에 전력을 다할 상대를 만난 게 기뻤던 것이다.
[서브 리.]
쾅!!
200km가 훌쩍 넘는 고속 서브조차 완벽한 움직임으로 리턴하는 니시코리.
그는 완성형의 베이스라이너의 면모를 보이며 지혁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줬다.
[아!! 니시코리의 풋워크가 정말 빠르네요. 놀라운 코트 커버력입니다. 작은 키의 약점을 수비력으로 극복하고 있어요.]
[요즘 엄청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골든 보이와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그도 작년에 비해 실력이 많이 늘었나 봅니다.]
[골든 보이가 나타나기 전만 해도 1, 2위를 다투는 스타 유망주였으니 포텐셜이 터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죠. 랭킹도 무려 7위까지 달성한 선수이니까요.]
[이거 잘하면 기적이 나올 수도 있겠는데요. 경기력이 정말로 심상치가 않아요.]
호주 오픈을 중계하고 있던 해설자들은 앤디 머레이가 윔블던에서 우승한 사례를 들며 니시코리의 활약을 하나 같이 극찬했다.
그만큼 지금 그의 플레이는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게임 니시코리 3-2.]
그렇게 경기는 어느새 1세트 중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 어떤 선수도 우위를 가져가지 못해서일까.
관중들의 집중도는 경기 내내 최고조를 유지했다.
“와……. 오늘 케이의 컨디션이 좋나 본데? 골든 보이한테 약간 밀리는 느낌이 들긴 해도 저 정도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수준이야.”
“이러다가 올해 세계 랭킹 5위 안에 들어가는 거 아니야? 일본 사상 최초로 그랜드슬램 우승자가 배출되는 거 아니냐고.”
“케이의 재능이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지금의 경기력이라면 하나 정도 노려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레디.]
선수들이 휴식을 끝내고 베이스라인을 이동하자 다시 조용해지는 경기장.
일본인 관중들은 생각지도 못한 니시코리의 활약에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눈을 반짝였다.
오늘 경기에서 골든 보이를 이길 거라는 기대감이 잔뜩 담겨 있는 표정이었다.
***
쿵!!
아아아…….
세트 포인트를 장식하는 지혁의 백핸드 다운 더 라인.
두 선수의 경기는 6-4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승부가 결정되었다.
한 끗 차이로 결정된 1세트의 결과에 일본 관중들은 하나 같이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약간의 운이 따라줬다면 승자가 달라졌을 거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니시코리도 비슷한 생각인지 손으로 라켓을 두드리며 화풀이를 했다.
경기 도중에 범한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는 것 같았다.
손에 닿을 것 같았던 승리가 빠져나가는 것이 많이 고통스럽겠지.
‘음….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실력인데?’
만약 최악의 컨디션으로 호주 오픈을 참가했다면 1패가 늘었을 수도 있었겠다.
아무리 미친 승률을 자랑하는 지혁이라도 모든 경기에서 승리하는 건 아니었다.
보통 메이저 대회에서 20~25 경기를 하면 한, 두 번씩은 패배했으니 말이다.
‘물론 과거의 실력일 때를 말하는 거지만 말이야.’
지혁은 1세트에서 겪은 위기가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남은 경기가 더욱 달콤하게 다가올 걸 알았던 것이다.
‘이 정도면 2세트부터 전력을 다해봐도 되겠어. 아마 니시코리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첫 세트가 끝나고 선수들에겐 120초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지혁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른 채 앞으로의 경기를 예측하며 떠들었다.
그들 중 누구도 엄청난 반전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니시코리의 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남은 경기는 많이 싱거울 거야.’
일본인 관중들이 실망할 게 벌써부터 그려졌지만 그렇다고 일부로 져줄 마음은 없었다.
니시코리도 그런 것을 조금도 바라지 않을 거고.
잠시 후, 체어 엠파이어의 콜이 떨어지고 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2세트가 시작했다.
첫 번째 서브는 니시코리의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