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되찾은 랭킹 1위
니시코리는 간발의 차이로 놓친 1세트를 만회하기 위해 경기에 더욱 집중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그에게선 주눅 든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기를 어느 정도 해보니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1세트에서 두 선수의 경기력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고 말이다.
“하앗!”
탕!!
커다란 기합을 내지르며 라켓을 빠르게 휘두르는 니시코리.
플랫 서브는 가장 반격하기 힘든 위치로 떨어져 지혁의 리턴을 방해했다.
물론 속도가 느려서 에이스가 나올 기미는 조금도 없었지만.
퍼스트 서브로 경기를 끝내지 못하자 경기는 자연스럽게 랠리로 들어갔다.
니시코리의 서비스게임 차례에서는 매번 이런 상황이었기에 모두가 예상한 모습이었다.
타다다다! 탕!!
빠른 풋워크가 끈질긴 인내심을 무기로 랠리를 장시간으로 끌고 가는 니시코리.
코트 구석구석을 노리고 떨어지는 스트로크들은 베이스라인과 사이드라인 위를 걸치면서 지혁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1세트에서 이런 플레이에 말려 위닝샷을 꽤 내주었다.
바운드 위치가 엄청 아슬아슬한 게 컨디션이 역대급으로 좋긴 한가 보다.
쿵!!
[러브 피프틴.]
지혁은 갑자기 눈에 띄게 상승한 경기력으로 사이드라인을 강타한 스트로크를 여유롭게 받아치며 백핸드 위너를 넣었다.
“……?”
니시코리는 고작 한 포인트인데도 뭔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직 확신하기엔 너무 일렀기에 판단을 보류하는 듯했다.
[러브 서티.]
[러브 포티.]
[게임 리 1-0.]
더욱 각오를 다졌음에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며 나오는 첫 번째 브레이크.
그러자 관중들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웅성거렸다.
갑자기 두 선수의 실력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말처럼 지혁은 어떤 공격적인 샷이 날아와도 급한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이 정도로 자신에게 위닝샷을 넣을 수는 없다는 듯.
‘음…. 역시 효과가 확실한 걸. 랠리를 할 때 훨씬 편해진 기분이야. 그래도 이걸로는 한참 부족하니 더 시험해보자. 경기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지혁은 괴물을 바라보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무덤덤하게 코트를 교체했다.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다시 시작되는 2게임.
경기는 큰 반전 없이 니시코리가 불리한 상황을 유지한 채로 흘러갔다.
사실 서브권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도 밀리는데 수비하는 입장에서 브레이크를 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나마 정점에 달한 컨디션에 기대 랠리에서 조금의 우세를 가져갔는데 이제는 서브와 스트로크를 포함한 모든 부분에서 역량 차이가 확실하게 벌어졌다.
안 그래도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10%대였는데 이제 한 자리대로 돌아간 것이다.
[게임 리 2-0.]
결국 2게임 마저 퍼펙트로 끝나버리자 긴가민가하던 사람들도 지혁이 니시코리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챘다.
특히 일본 관중들의 반응이 유독 극적이었다.
아무래도 승리를 바로 앞에서 놓친 기분이 들어서 그러는 모양이다.
하긴 그 유명한 골든 보이와 한 게임도 아니고 무려 1세트 동안 동수를 이루었으니 흥분할 만도 했다.
자국의 선수가 드디어 천상계 무리에 합류한다는 생각에 아마 붕 뜨는 기분이었겠지.
하지만 베일을 걷고 드러난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다.
지금 상황에서 니시코리가 지혁에게 역전하는 건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대체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야? 분명 케이의 실력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설마 1세트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건가?”
“말도 안 돼. 그게 완급 조절을 하면서 플레이한 거라고?”
“당장 지금 상황을 설명하려면 그것밖에 없잖아. 혹시 이것 말고 다른 생각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입을 다문 채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일본 관중들.
그 영향인지 니시코리를 응원하는 목소리도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경기의 결과가 조금씩 예측되는지 이전처럼 열심히 응원할 마음이 생기지 않나 보다.
쿵!!
[러브 서티.]
엄청난 풋워크 거리를 자랑하며 코트 바깥에서 스트로크를 걷어올리는 지혁.
환상적인 궤적으로 네트 옆을 관통하는 타구에 니시코리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포인트를 얌전히 헌납했다.
나름 회심의 샷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것까지 반격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고 있지만 지혁도 방금 전의 움직임에 꽤나 놀라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절대로 못 받았을 거야. 여기서 풋워크가 빨라진 게 확실하게 체감되네. 수비 범위가 엄청 늘어났어.’
“아니! 저게 말이 돼? 저기까지 따라가서 막아낸다고? 해도해도 너무한 코트 커버력이잖아. 위너를 넣으려면 어디로 샷을 치라는 거야.”
“정말로 이런 괴물을 케이가 이길 수 있을까?”
“엄청 어려워 보이는데…….”
“그런데 골든 보이가 이 정도라면 같은 급으로 평가받는 빅4는 얼마나 잘한다는 거지?”
“……당분간 탑5 안에 들어가긴 어렵겠네. 아무래도 실력을 더 길러야겠어.”
“응…. 아직 천상계에 합류하기엔 시기상조인 것 같네.”
워낙 대단한 슈퍼 플레이가 나와서인지 니시코리를 응원하던 관중들은 기가 많이 죽은 듯했다.
구경하는 사람들조차 이런데 직접 당한 선수의 멘탈이 멀쩡하겠는가.
니시코리는 방금 실점으로 정신적 타격이 큰지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지혁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게임 리 3-0.]
[게임 리 4-0.]
그렇게 2세트의 스코어가 4-0까지 벌어지자 뜨거웠던 경기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두 선수의 기량 차이가 너무 심각해 제대로 된 승부가 성립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몇몇 일본인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처참하게 당하는 광경을 보기 힘든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상대가 되지 않네요. 상황을 되돌리기엔 스코어가 너무 벌어졌어요. 여기서 2세트를 역전하는 건 빅4가 와도 힘듭니다. 괜히 티끌만 한 희망에 기대어서 체력을 낭비할 바엔 과감하게 버리는 게 맞아요.]
[이게 재능의 차이라는 걸까요. 유망주 1, 2위를 다투는 니시코리 케이도 골든 보이의 앞에서는 일개 선수에 불과했습니다. 한 세대를 지배할 천재에게 대항하기에는 무리였어요.]
해설들이 경기에 대해 평가를 내리 때 마침 지혁이 위너를 넣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다시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솔직히 터놓고 말하면 2세트에 들어가고 나서 니시코리가 당하기만 해서 쓸 만한 장면이 없기도 했다.
[와……. 저 플레이를 보세요. 니시코리 케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하는 게 저절로 이해가 될 겁니다. 골든 보이의 코트 커버력이 너무 단단해서 뚫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비시즌기 동안 또 한 단계 진화한 것 같네요. 도대체가 실력의 상승이 정체되는 법이 없어요.]
[네. 정말 끝도 없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조코비치에게서 다시 세계 랭킹 1위를 탈환하는 것도 그리 멀지 않겠네요.]
[아마 조만간일 듯합니다. 아무리 작년 그랜드슬램을 세 번이나 우승했어도 1년이 지나면 포인트가 사라지니 호주 오픈에서 리가 우승하면 ATP 포인트가 거의 비슷해질 겁니다.]
[마스터즈 승률은 골든 보이 쪽이 훨씬 높으니 이번 대회의 결승전은 트로피뿐만 아니라 1위까지 걸려있는 경기네요.]
해설들은 경기가 이 지경까지 되고 나니 오늘 경기보다 8강 이후의 일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지금 지혁의 경기력을 보면 결승전에 진출하는 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라이벌이자 결승에 올라올 확률이 가장 높은 조코비치와 비교가 된 것이다.
물론 여기가 호주 오픈이 아닌 롤랑 가로스였다면 그 대신 나달이 언급되었을 거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하이라이트로 뽑힐 장면이 유독 많이 나왔네요. 골든 보이의 컨디션이 정말로 좋나 봅니다. 비시즌기 동안 저희가 모르는 특별한 훈련이라도 한 걸까요.]
[그건 승자 인터뷰를 들어보면 알겠죠. 아마 기자가 저희가 궁금한 점을 가장 먼저 질문해줄 겁니다. 시청자분들도 그걸 바랄 테니까요.]
쿵!!
[피프틴 포티.]
감탄이 나올만한 훌륭한 플레이로 득점을 하고 베이스라인으로 돌아가는 지혁.
그는 방금 전의 위닝샷이 만족스러운지 티 나지 않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풋워크의 실력이 상승하니까 이런 장점이 있네. 평소에 못 받을 것 같은 샷들을 막아내니 하이라이트로 쓸 만한 명장면이 정말 많이 나와.’
팬들의 관심을 많이 받을수록 이득인 그에게 정말 찰떡같은 능력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기술들을 우선순위로 두느라 괜히 미뤄왔다고 생각할 만큼.
‘뭐,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포핸드하고 백핸드를 선택했겠지만 말이야.’
지금 무시무시한 실력으로 니시코리를 압도하고 있는 건 정점에 달한 스트로크와 풋워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덕분이었다.
만약 긴박한 상황 속에서 정확하고 결정적인 샷을 칠 수 있는 기량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뛰어난 풋워크 능력도 빛 좋은 개살구가 되었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지금도 슈퍼 플레이의 절반 이상은 꽤나 아슬아슬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세트 리.]
니시코리의 패배로 순식간에 버리는 2세트.
6-0, 베이글이라는 충격적인 패배에 니시코리를 응원하던 일본인 팬들은 선수보다 멘탈이 부서진 모양이었다.
다른 관중들이 함성을 지를 때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대조적인 모습이 방송으로 송출되자 한국의 시청자들은 그 광경이 재밌는지 테니스 커뮤니티가 급격히 시끄러워졌다.
─ 쟤들 초반만 해도 기세등등하더니만 ㅋㅋㅋ 정말로 니시코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나?
─ 설마 그럴 리가 ㅋㅋ 어딜 7위 따리가 갓지혁에게 맞먹으려고 드냐. 응 몇 번을 해도 승률 100%야~ 공짜승 달달하네 ㅋㅋ
─ 일본 관중들 1세트 초반이랑 지금 얼굴 비교한 사진 올라왔는데 진짜 웃기네 ㅋㅋㅋㅋ
─ 와.... 1시간 만에 몇 년을 늙은 거냐 니시코리 응원하느라 마음 고생이 심하신가 보네.
─ 그만큼 간절하다는 거지~ 탑5가 문턱이니까 솔직히 안달 날 만도 해
─ 오늘 경기 보니까 앤디 머레이처럼 몇 년은 인간계 수문장으로 죽치겠네 재수 없으면 거기서 은퇴하는 거고
─ 탑5 선수들 중에 키 제일 작은 선수가 185cm아님? 피지컬만 보면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데 그렇다고 재능이 압도적인 것도 아니잖아?
─ ㅇㅇ 막 천상계에 합류한 앤디 머레이 키도 190cm에다가 가장 어린 이지혁조차도 188cm임. 전문가들도 니시코리의 성장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음.
─ 지금도 이미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성적이지. 세계 랭킹 7위면 테니스 100년 역사 다 털어도 아시아 최강이다. 이지혁 없었으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아시아의 레전드였을 걸.
─ 어쨌든 빨리 결승전 시작됐으면 좋겠다. 지금 실력으로 빅4를 만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함. 이제 이지혁이 전력을 다할 상대는 빅4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