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되찾은 랭킹 1위
지혁과 페더러 모두 최대 230km이 넘는 고속 서브와 강력한 스트로크를 갖추고 있었기에 두 선수의 대결은 다른 경기들에 비해 훨씬 빠른 템포로 진행되었다.
네트를 왕복하는 타구가 마치 빨리 감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 상태로 스트로크 횟수가 기본 10회를 넘어가니 관중들은 도무지 한눈을 팔 수 없었다.
[게임 페더러 4-5.]
아주 아슬아슬한 차이로 서비스게임을 지켜내는 페더러.
아직 1세트도 끝나지 않았음에도 그의 상의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살벌한 활동량 때문이었다.
“휴……. 어려운 고비를 하나 넘었어. 이제 게임 하나만 따내면 듀스랑 타이브레이크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글쎄. 내 생각엔 별로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데. 골든 보이가 갑자기 실수를 할 것 같지가 않단 말이야.”
실제로 페더러는 지혁의 철벽같은 코트 커버력에 막혀 아직도 브레이크를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가진 공격 옵션을 모두 쏟아내고도 수비를 뚫어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화려한 경기를 관전하면서 내심 준결승전의 승자가 지혁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서브 리.]
쾅!!
1세트의 분기점에서 아껴놓은 전력을 다할 생각인지 더욱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지혁.
T존을 강타하는 서브는 이전 서비스게임보다 최소 5km 이상 빨랐다.
기습적으로 라켓을 교체한 덕분이었다.
[피프틴 러브.]
[SERVE SPEED 237km/h]
우와아아아아!!!
전광판에 무시무시한 숫자가 찍히자 경기장은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엄청난 경기를 보게 될 거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시간이 조금 더 지났지만 별다른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혁이 무난하게 주도권을 쥔 채로 상황이 흘러간 것이다.
[포티 피프틴.]
‘…정말 내 실력이 많이 늘긴 했구나. 오늘 페더러의 컨디션을 보고 분명 이것보다 훨씬 힘들 거라고 예상했는데.’
솔직히 이 상황에서도 약간의 여유마저 느껴지는 게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경기력이 어디까지 강해졌다는 말인가.
심기일전한 페더러를 상대로도 이런 결과라면 나달과 조코비치에게도 충분한 효과를 보여줄 게 확실했다.
‘진짜 지금이 그의 전성기가 아니라서 아쉽네. 4~5년만 일찍 데뷔했더라면 페더러의 진면목을 경험해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무리 경기에 대한 판단력과 기술이 발전해도 나이가 30대에 들어간 만큼 피지컬이 하락세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스포츠 종목들이 그렇듯이 가장 좋은 상황이 갖춰져도 전성기와 대등하거나 넘어서는 경기력을 발휘하긴 힘들다는 뜻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진다면 테니스 선수의 평균 은퇴 나이가 20대 후반일 리 있겠는가.
‘물론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는 30대 중반에서 40대까지 정상을 유지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경쟁자가 없어서 그렇다.
실제로 10년 뒤에는 상위 랭커가 유독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빅3가 그랜드슬램 우승을 놓치는 장면들이 종종 나왔다.
그건 지금이라면 절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요즘의 탑랭커들은 마스터즈 우승조차 언감생심 탐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나올 유망주들이 40대의 페더러조차 이기지 못한다니 정말 놀랍긴 하다.
확실히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전문가들이 빅4를 역사상 최강의 선수라고 평가하는 게 전적으로 맞는 것 같았다.
‘내가 과거로 돌아올 때까지 그들을 대체할만한 스타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탕!!
[세트 리.]
사이드라인을 때리는 페더러의 크로스샷을 다운 더 라인으로 반격하며 1세트를 마무리하는 지혁.
페더러는 코트 가장자리로 바운드되는 공을 따라가지 못했다.
한 번의 랠리에서 풋워크가 조금씩 밀리다가 이제서야 세금을 지불한 것이다.
지혁이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유도했기 때문에 지금 같은 파국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아!! 게임 스코어 6-4로 결국 골든 보이가 먼저 경기의 주도권을 가져가네요. 페더러의 출발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치열한 접전이 일어나지 않고 부드럽게 세트가 넘어갔네요.]
[네. 제가 느끼기엔 두 선수의 경기력이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건 준결승전의 결과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뜻이죠.]
[글쎄요. 저라면 지금이 더 암울할 것 같은데요. 승부수를 던지지도 않았는데 세트가 넘어갔잖아요. 방금 패배는 기량 대결에서 밀렸다는 뜻입니다.]
탑랭커 출신의 해설자는 자신의 말에 확신한다는 듯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그도 한 때 TOP10 안에 들었던 탑랭커였던 만큼 시청자들에게 그 발언이 충분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 그러면 이제 골든 보이가 로저보다 테니스를 더 잘한다는 건가? 솔직히 놀랍네.
─ 아니 이번 호주 오픈이 아니라 한참 전에 넘어섰지 2011년에 그랜드슬램 세 번 우승하고 테니스계 평정했잖아.
─ 그건 빈집털이였고. 페더러는 슬럼프, 나달은 무릎 부상, 조코비치는 글루텐 알레르기라서 우승 후보들이 전부 비실비실했던 거 기억 안 나냐?
─ 최근 로저가 인터뷰에서 자신 있다고 했는데 경기가 이렇게 되니 안타깝네. 오늘 경기에서 지면 충격이 클 것 같은데.
─ 10년이나 테니스계를 지배했으면 다음 세대에 넘겨줘야지. 골든 보이가 그의 자리를 뺏는 건 당연한 거야.
─ 전문가들이 앞으로 최소 5년 동안은 현재 랭킹을 유지할 거라고 했는데...
─ 그건 리하고 조코비치 같은 선수들이 나오지 않았을 때고. 지금은 그때 하고 완전히 다르지.
***
시간이 지나 2세트 중반.
경기의 분위기는 여전히 지혁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진 못했지만 무난히 승리하는 그림이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번 경기는 찰나를 사용하지 않고 얻은 결과라 더욱 가치가 컸다.
쿵!!
[피프틴 올.]
페더러의 빈틈을 노려 카운터로 포핸드 위너를 얻어내는 지혁.
관중들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지 그림 같은 플레이에 감탄을 쏟아냈다.
수비적인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이 정도로 템포가 빠르면 지겨울 수가 없었다.
선수들의 위닝샷 하나, 하나가 전부 하이라이트였으니 말이다.
“허….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이지혁인가. 듣던 것보다 더 괴물이잖아. 원래 이렇게 잘했어? 솔직히 이런 괴물이 다른 선수에게 패배하는 그림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데.”
“작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그 사이 실력이 늘었나 보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아직 만으로 20살도 안 됐지. 지금도 무시무시한데 전성기가 되면 어떤 경기력을 보여줄지 상상하기도 어렵네.”
“난 공수 밸런스가 저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야. 약점이 전무한데? 공략할 만한 틈이 전혀 없어. 조코비치에게도 밀리지 않는 느낌이야.”
“그러면 이번 호주 오픈에서 무결점이라는 별명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겠구만.”
“만약 다른 선수라면 어림도 없을 거라고 말했겠지만 이지혁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네.”
[게임 리 4-4.]
‘이대로 듀스에 들어가도 이길 확률은 내가 더 높을 거야.’
결승전을 생각하면 보수적으로 플레이하는 게 더 나았다.
하지만 지혁은 오늘 경기를 그런 식으로 심심하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니시코리에게 전부 발휘하지 못한 실력을 전부 폭발시킬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그에겐 찰나라는 비장의 무기가 남아있었다.
어떤 기술을 사용하더라도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하는 기술이.
[서브 페더러.]
‘마침 브레이크 타이밍이네. 여기서 2세트를 끝내버리면 2~3게임을 단축할 수 있으니까 찰나의 부작용은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거야.’
지혁은 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다가 마침 내 결론을 내렸다.
‘대충 두 번 정도 사용할 수 있겠네. 두 번의 찰나면 브레이크를 하고도 남을 거야.’
과연 스트로크가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페더러와 관중들의 놀란 반응도.
쾅!!
곧이어 215km에 달하는 플랫 버스가 T존을 강타했지만 에이스가 나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기 시간이 중반이 지나 지혁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바운드 지점의 예측을 실패해서 스텝이 꼬이지 않는 이상 허무한 에이스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탕!! 탕!! 탕!!
이전과 비슷한 느낌으로 지속되는 랠리.
변화는 갑자기 일어났다.
지혁이 엄청나게 빨라진 움직임으로 네트와 베이스라인 중간에서 발리를 때려버린 것이다.
네트에 걸리거나 아웃이 얼마든지 나올만한 모험이었지만 타구는 거짓말처럼 라인 위를 때리고 지나갔다.
반격의 여지를 조금도 남겨주지 않은 위닝샷이었다.
“아니 저런 샷을 어떻게 받으라는 거야…….”
“…오늘따라 운이 좋나 보네. 아무리 라켓 컨트롤을 잘하는 골든 보이라고 해도 저 플레이의 성공 확률은 50%를 넘지 못할 거야.”
“그렇지. 다른 선수들이 괜히 하지 않는 게 아니니까.”
급하게 네트 앞으로 달려오면서 균형이 깨졌는데 전력을 다해 스트로크를 친다?
스코어가 엄청나게 여유롭거나 상대가 어지간히 만만하지 않은 이상 못할 짓이다.
그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혁의 득점을 운이 따라준 결과라고 여겼다.
똑같은 장면이 연속해서 반복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러브 서티.]
“미친…. 저게 또 성공했다고? 그랜드슬램 결승전이 달려있는 경기에서 너무 모험을 하는 거 아닌가? 굳이 지금 같이 유리한 상황에서 저럴 필요가 없잖아.”
“혹시… 단순히 운에 기댄 결과가 아니라면?”
“설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잘 생각해봐. 골든 보이라면 가능성이 있어. 그는 유독 슈퍼 플레이를 많이 하기로 유명하잖아.”
실제로 테니스 방송에서 선수들의 하이라이트가 방영되는 순간이면 지혁의 경기가 무조건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팬들이 지혁을 역사상 최고의 유망주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슈퍼 플레이만큼 선수의 타고난 천재성이 돋보이는 것도 없으니.
[러브 포티. 세트 포인트.]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경기에 살짝 당황을 해서 일까.
페더러는 그 답지 않은 실수를 하며 포인트를 하나 더 헌납했다.
스트로크가 베이스라인을 주먹 하나 차이로 넘어간 것이다.
‘이거 내가 최상으로 잡아놓은 상황보다 여유가 있는데. 세트 포인트에서 한 번 더 사용해도 괜찮겠어.’
오늘 경기에서 확실한 인상을 남기려면 어느 정도 부담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 페더러의 기세를 꺾어 놓으면 이번 시즌을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테고.
결국 지혁은 다음 서브를 준비하는 10여 초의 시간 동안 세트 포인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탕!!
[세트 리.]
페더러가 서비스게임을 되돌리려고 노력했지만 세트 포인트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들어갔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압도적인 차이가 나오자 경기장은 관중들로 인해 들썩였다.
과반수는 한 게임에 세 번이나 나온 슈퍼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S등급의 포핸드, 백핸드, 풋워크와 찰나의 시너지는 모두의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팬들은 지혁의 플레이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최강’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가 패배하는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