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되찾은 랭킹 1위
타고난 승부사인 지혁은 타이브레이크에서 처음으로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조코비치의 필사적인 반격으로부터 본인의 포인트를 지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애초에 서브 차례가 넘어온 상태여서 유리한 싸움이었다.
실력이 대등하다면 지혁이 승리할 확률이 훨씬 높은 경기.
게다가 스코어가 5-5인 상태에서 나온 슈퍼 플레이를 생각하면 보험마저도 든든했으니 지금 같은 상황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었다.
[세트 리.]
7-5, 2점 차이로 마무리되는 1세트.
지혁은 체어 엠파이어의 콜이 떨어지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상대에게 확신과 쓸데없는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겉으로 티는 내지 않고 있지만 이번에도 꽤나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기껏 얻어놓은 유리함을 날릴 뻔했다.
물론 관중들은 그런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오히려 지혁의 여유로운 표정과 뛰어난 플레이를 보고 조코비치를 약간이나마 압도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골든 보이가 이겼구나…. 경기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이번 호주 오픈의 우승 트로피는 그가 가져가겠어. 조코비치에게 유리한 하드 코트라서 작년 US 오픈하고 다른 결과가 나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나도 그래. 작년 그랜드슬램 전적이 1승 3패였잖아. 이렇게 무난한 느낌으로 이길 줄은 몰랐지. 전문가들이 올 시즌의 실력이 늘었다고 하던데 그게 단순히 띄워주는 말이 아니라 정말이었어.”
“이러면 빅4의 구도가 어떻게 되는 거지. 랭킹이 다시 재정비되는 건가.”
“호주 오픈의 결과가 달라지면 그건 당연한 거고. ATP 포인트를 계산해보면 1위가 바뀌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
“1년도 되지 않아서 정상의 자리를 되찾는 다라. 왕의 귀환이네.”
1세트의 마지막 부분이 임팩트가 워낙 커서일까.
대다수의 관중들은 조심스럽게 결승전의 승자를 지혁으로 점치기 시작했다.
그만큼 방금 전의 슈퍼 플레이는 그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평범한 탑랭커들과 격이 다른 실력을 보여준 조코비치도 대단했지만 그걸 정면대결로 제압한 지혁은 훨씬 더 대단했으니.
작년의 성적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조코비치에게 견줄만한 대항마가 마땅히 없었다.
상위 랭커나 하위 랭커나 만나기만 하면 줄줄이 패배하게 되니 포텐셜이 터진 조코비치는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 지혁 이상의 저승사자로 여겨졌다.
실제로 공식 대회 승률도 그가 더 높았고.
지혁이 같은 빅4의 경기를 포함하고도 90%에 가까운 승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성적이었다.
그러니 2012 시즌은 조코비치가 완전히 지배했다는 말이 나왔던 거겠지.
그렇게 관중들이 한창 오늘 경기의 결과를 예측하며 신나게 떠들고 있을 때.
선수들은 벤치에 앉아 부쩍 피로한 기색으로 휴식을 하고 있었다.
포인트 하나조차 용납하지 않는 엄청난 긴장감 속에서 타이브레이크를 하느라 정신적인 부분과 육체적인 부분 모두 녹초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어. 역시 직접 경기를 해봐야 감이 잡히네.’
아무리 정교한 분석 자료들이라고 해도 실전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혁은 경기 초반을 하고 나서야 확실하게 판단이 섰다.
지금의 실력이라면 올 시즌 그랜드슬램은 할만하다.
대회에서 운이 어느 정도 따라준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성적이 좋았던 2011 시즌 못지않은 결과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겠다.
우선 당장 눈앞에 닥친 호주 오픈부터 제대로 마무리해야겠지만.
지혁이 1세트에서 승리하고 경기는 전반적으로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후반까지 승부를 내지 못한 채 팽팽한 상황이 이어지다가 막바지가 되면 지혁이 승리를 하는 그림이 반복해서 나온 것이다.
분명 기량이 비슷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선수들이 가진 결정력의 차이였다.
코트 커버력과 수비 능력이 거의 대등한데 한쪽이 어떤 위기에서도 반격을 하며 위닝샷을 넣을 수 있으니 조금씩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조코비치가 막강한 실력으로 경기 전체에서 주도권을 쥐고 갔지만 지혁의 실력이 여기까지 상승한 이상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더 이상 조코비치랑 경기를 하면서 말라죽는 일은 없겠네.’
지혁은 오늘 경기를 통해 이번 호주 오픈을 기점으로 자신의 기량이 그를 넘어섰음을 확신했다.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자 은근히 플레이 스타일에서도 자신감이 드러났다.
초반보다 더 과감해지고 더 적극적으로 몰아붙이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평소의 조코비치라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동안 다른 선수들이 공격적인 포지션을 잡고 어떤 비참한 꼴을 당했는지 케이스가 수도 없이 쌓여있으니 말이다.
이건 지혁이 경기의 기세를 완전히 가져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트 리.]
그렇게 2세트마저도 지혁의 승리로 돌아가는 경기.
스코어가 2-0까지 벌어진 상황에서 사실상 2013 호주 오픈의 우승자는 90% 이상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조코비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경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침착하던 평정심이 깨진 모습을 보여줬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자잘한 부상 이슈로 불가피하게 패배하는 경우는 몇 번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가장 자신 있는 하드 코트와 랠리 중심의 경기에서도 지혁을 상대로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하다니.
조코비치는 예상치 못한 지혁의 활약으로 인해 항상 자신이 최강이라고 생각하던 자부심에 커다란 금이 갔다.
***
[게임 세트. 매치 리.]
감정이 담기지 않은 냉정한 목소리로 콜을 하며 결승전을 마무리하는 체어 엠파이어.
세트 스코어 3-0.
아무도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결과였다.
작년 시즌을 지배하다 시피한 조코비치가 완패를 당하다니.
최소 2~3년은 정상의 자리를 문제없이 유지할 거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이 완벽하게 박살나 버렸다.
지혁이라는 상식 밖의 몬스터로 인해서 말이다.
관중들도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결과에 흥분했는지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줬다.
어차피 두 선수 모두 주류에 포함되는 국적의 선수도 아니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것도 아니라서 기왕이면 스타성이 더 높고 응원하는 선수가 랭킹 1위의 대항마로 나타나는 게 그들에게 여러모로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명이 모든 대회를 독식하는 것보다 오늘처럼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더 재미있었다.
우와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으로 흔들리는 스타디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찬사의 주인공은 오로지 이번 호주 오픈의 우승을 차지한 지혁의 것이었다.
원래 패배한 선수에게 돌아가는 영광 같은 건 없다.
winner takes it all,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테니스도 승자 독식의 세계였다.
관중들은 시상식이 진행되고 선수들의 인터뷰가 진행될 때까지 조코비치를 완전히 잊은 채 지혁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준 지혁에 대한 보답이었다.
[테니스 역사상 최강의 재능을 가진 이지혁, 세계 랭킹 1위의 조코비치를 3-0으로 완파하며 호주 오픈 우승.]
[다시 부활한 천재. 결승전은 2011 시즌의 골든 보이가 떠오르는 경기였다.]
[그랜드슬램 우승으로 2000포인트를 획득하다. 이제 세계 랭킹 1위까지 700포인트. 마스터즈 대회 하나만 우승하면 1위와 2위가 서로 교체돼.]
[무결점의 조코비치를 대파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테니스 전문가들이 꼽은 원인은 ‘안정적인 풋워크와 능숙해진 경기력.’]
[테니스 레전드들 이지혁의 경기를 보고 극찬을 쏟아내. “예전에도 밸런스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더 완벽해졌다. 이제 그를 이길 수 있는 선수가 없을 것.”, “저 조코비치를 정면대결로 이기다니 골든 보이는 상식을 뛰어넘는 선수다.”]
[호주 오픈이 끝나고 해외 테니스 팬들이 최강의 선수를 투표한 결과, 조코비치 대신 이지혁 선수가 뽑혀서 엄청난 화제다.]
─ 노박 조코비치를 상대로 3-떡 ㄷㄷㄷㄷ 진짜 제대로 왕귀했네..... 도대체 비시즌 동안 무슨 짓을 한 거냐. 얘가 완전히 달라져서 왔는데?
─ ㅇㅇ 작년하고 다르게 랠리에서도 전혀 안 밀리더라. 올라운더가 아니라 베이스라이너 스타일로 경기를 했어도 이겼을 걸?
─ 그냥 조코비치가 컨디션이 안 좋은 거 아니냐? 명성에 비해 너무 싱겁게 끝난 감이 있는데. 얼마 전만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언터쳐블 이미지였잖아.
─ 맞음 ㅋㅋㅋ 대진 잡히면 무조건 탈락한다고 니시코리랑 바브린카, 델 포트로, 데이비드 팬들이 난리 피우던 게 최근이잖아 ㅋㅋ 그때 해외 팬들도 우리나라랑 비슷한 취급이었음.
─ ㄴㄴ 오히려 컨디션은 평소보다 좋았음. 직접 경기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임? 그게 비상 이슈가 있는 상태에서 나올 만한 실력이었냐고.
─ 여기 조코비치 빠들 엄청 많아서 그런 거임 ㅋㅋㅋㅋ 정작 본진인 유럽에서는 세계 랭킹 1위 찍고도 니시코리한테 연수입 밀리는데 이상하게 여기서 인기가 많네.
─ 유독 효율 충들이 많아서다. 가장 이상적인 테니스 선수라나 뭐라나 완성도가 높은 건 맞지만 결승전에서 패배하는 걸 보니 무적도 아니구만.
─ 그래 봤자 이지혁 아래임 지밑조 ㅅㄱ
─ 인기, 스타성, 퍼포먼스 전부 밀려서 조빠들이 유일하게 내세우던 게 랭킹이었는데 이제 그것도 뺏기겠누 ㅋㅋㅋ
지혁이 호주 오픈에서 조코비치를 3-0으로 이긴 영향은 엄청났다.
물론 기존에도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성적을 쌓고 있었지만 팬들은 이번 호주 오픈을 기점으로 드디어 포텐셜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이미 올림픽 1회 우승, 그랜드슬램을 4번이나 우승하고 골든 슬램까지 달성한 정상급 선수가 이런 말을 듣는 건 앞으로도 지혁 말고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상식 밖의 소문이 도는 건 그만큼 그에게 대한 팬들의 기대가 크다는 뜻이었다.
팬들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지혁이 이때까지 테니스 선수들이 아무도 달성하지 못한 전대미문의 기록을 달성할 거라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 현재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전문가들조차 여기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한해에 모든 그랜드슬램을 재패하는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것도 충분했으니 말이다.
현재 탑5 안에 들어가는 선수들 중에 나이가 가장 어린 선수가 지혁보다 6살이나 많은 앤디 머레이와 조코비치였다.
그들이 한국 나이로 27살이니 넉넉잡아 5년만 지나면 피지컬의 하락으로 은퇴할 때가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랜드슬램의 경쟁력이 바닥까지 떨어지겠지.
다른 탑랭커들과 유망주들이 전부 그렇듯 지혁도 조용히 기다리면서 트로피와 상금을 주워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그때가 되기 전에 기록을 달성하길 바랬다.
황금기의 실력자들이 다 은퇴하고 나서 얻은 영광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혁의 생각도 팬들과 같았다.
그는 평범한 선수들과 다르게 처음부터 안주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다시 테니스를 하는 대가로 지불한 게 워낙 많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