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되찾은 랭킹 1위
시즌 첫 그랜드슬램인 호주 오픈을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한 지혁은 이후의 대회에서도 마치 자신의 승리가 우연이 아니라는 듯 계속 승승장구했다.
마스터즈에서 참가한 탑랭커들이 1월에 치러진 호주 오픈과 거의 비슷했음에도 3달 넘게 전승 행진을 유지한 것이다.
테니스 팬들은 상대가 같은 빅4나 앤디 머레이라고 해도 단 한 경기도 내어주지 않는 모습에 전율했다.
이제는 지혁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최강의 선수가 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대부분의 경기가 2-0으로 끝나버렸으니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혁의 랭킹은 자연스럽게 조코비치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두 선수의 ATP 포인트 차이는 애초에 700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이건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었다.
그렇게 대회마다 500, 700 포인트씩 격차가 벌어지다 보니 어느새 1, 2위의 차이는 1500점까지 벌어졌다.
두 선수의 ATP 포인트가 이미 1만 점을 넘은 상태라 그리 큰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건 조코비치가 그랜드슬램에서 지혁을 꺾고 우승하지 않는 이상 단기간 안에 넘을 수 없는 격차였다.
정상의 자리가 확실하게 뒤바뀐 것이다.
끝까지 조코비치를 최강의 선수라고 주장하던 보수적인 전문가들과 팬들도 랭킹과 성적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올 시즌의 지혁은 조코비치를 확실하게 넘어섰다.
스페인, 마드리드 오픈 결승전.
지혁은 스트로크를 주고받으며 한창 치열한 대결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대회는 2013 시즌의 네 번째 마스터즈 대회였다.
결승전의 상대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클레이에서 절대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작년 롤랑 가로스의 우승자, 라파엘 나달이었다.
아마 지혁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클레이 비중이 높은 시즌 초반의 마스터즈에서 이전처럼 우승을 하며 좋은 성적을 기록했겠지.
그 조코비치마저도 이번 대회에서 나달에게 2-1로 패배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혁이라는 변수로 인해 마드리드 오픈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탕!! 탕!! 탕!!
유독 바운드 속도가 느리고 베이스라이너에게 유리한 클레이 코트의 특성 때문일까.
다른 대회에 비해 랠리는 승부가 좀처럼 나지 않은 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서 조금씩 선수들의 집중력이 하락할 때쯤.
마침내 지혁 쪽에서 백핸드 위너가 나왔다.
나달 쪽에서 갑자기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니라 힘으로 찍어 누른 모습이었다.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몰라서 그저 환호만 보내고 있었지만 몇몇 관중들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전에 본 광경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조코비치와 했던 경기들의 데자뷰가 느껴지기도 했고.
[피프틴 서티.]
와아아아아아!!
[아!! 라파가 홈 그라운드에서 골든 보이에게 밀리고 있네요. 다른 대회라면 몰라도 스페인에서 개최되는 마드리드 오픈만은 절대 패배하지 않던 그였는데도 이번에는 대회의 결과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나달이 우승하기에는 올 시즌 리의 경기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요. 솔직히 포텐셜이 폭발한 그를 이길만한 선수가 현재는 없습니다.]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같은 빅4라고 하더라도요?]
[네. 그들 중 어떤 선수를 상대로 가정한다고 해도 오늘과 같은 결과가 나올 거예요. 리는 기복도 없는데다가 올라운더나 베이스라이너 같은 플레이 스타일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선수니까요. 실제로 최근 마스터즈 성적도 그랬고요.]
[그렇다면 2013 시즌은 골든 보이가 휩쓸겠네요.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새로운 기록을 세울 수도 있겠습니다. 가령 캘린더 그랜드슬램 같은 것을 말이에요.]
[허…. 정말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1962년 로드 레이버가 달성한 이후로 한 번도 나오지 않던 기록을 다시 볼 수 있다니 상상만 해도 짜릿합니다. 황제라고 불리던 샘프라스와 페더러조차도 결국에는 달성하지 못한 업적이잖아요.]
[황금기에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성공한다라…. 만약 그 말대로 된다면 골든 보이는 팬들에게 역사상 최강의 선수로 기억되겠네요.]
경기가 워낙 일방적으로 돌아간 탓에 해설자들은 지혁의 승리를 가정한 채로 멘트를 했다.
그들의 행동이 틀린 것도 아닌 게 결승전은 빠른 속도로 스코어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달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스트로크 대결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기습적으로 네트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고도 베이스라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위닝샷을 쌓아가는 모습을 보이자 관중들도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수가 없었다.
오늘 경기의 승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무조건 지혁이었다.
‘음…. 대충 조코비치랑 비슷한가? 이제 클레이에서도 나달을 만나더라도 전혀 밀리지 않는구나.’
불과 2~3년 전만 하더라도 무조건 피해가야 할 대상이었는데 어느새 넘어섰다.
아마 분기점이 된 건 풋워크가 S등급으로 상승한 호주 오픈이겠지.
나달 이상으로 코트 커버력이 넓은 조코비치도 정면대결에서 쓰러트렸으니 이제 지혁이 다른 탑랭커들에게 불리한 상황에 처할 일은 아주 드물 것이다.
[세트 리.]
지혁의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되는 1세트.
최대 3세트가지 진행되는 마스터즈가 중반을 넘어가자 긴가민가한 얼굴을 하고 있던 관중들도 모두 확신을 가졌다.
그들도 지금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역전이 나오는 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달이 전혀 상대가 안 되잖아? 이길 것 같은 느낌이 전혀 안 들어. 정말로 내가 알던 나달이 맞나? 분명 클레이를 한정으로 하면 무적이었던 선수였는데. 혹시 우리가 모르는 문제가 있는 건가. 컨디션이라던가 부상 같은 이슈 말이야.”
“그럴 확률은 아주 낮지. 결승까지 올라올 때 어떤 경기를 했는지 너도 전부 봤잖아. 모든 경기를 2-0으로 이긴 선수가 컨디션 난조라니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야. 그냥 골든 보이가 오늘따라 더 대단한 거라고. 나달은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야.”
“그런데 리가 이렇게까지 대단했었나? 작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아무래도 그 사이에 실력이 성장했나 봐.”
“…응?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게 말이 돼?”
“데뷔부터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줬는데 못할 것도 없지. 애초에 첫 그랜드슬램을 4강으로 출발하고 1년 만에 우승까지 한 괴물의 잠재력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상식이 통하는 선수도 아닌데 말이야.”
“정말로 이제 골든 보이가 테니스계를 지배하는 건가…….”
관중들은 페더러, 조코비치에 이어서 나달마저도 지혁에게 상대가 되지 않자 새삼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4강 1중 5약 체제에서 1강 3중 1약으로 탑랭커들의 구도가 새로 짜인 것이다.
이때까지 빅4가 랭킹이 낮은 선수들을 참혹할 정도로 학살했지만 그럼에도 매 시즌마다 계속 정상의 자리가 바뀌었다.
페더러가 한 해를 지배하면 나달이 다음 해에 1위를 하고 그다음은 조코비치가 모두를 제치고 떠오르는 등 어느 정도 그랜드슬램 우승자가 순환이 된 것이다.
하지만 작년 말부터 올해 지혁의 활약과 성장세를 보니 이제 그런 것도 옛날 일이 될 듯했다.
테니스 선수의 전성기조차 도달하지 않는 만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런 실력이라니.
아무리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평가받는 빅4라고 해도 이런 괴물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쿵!!
[게임 리 3-1.]
올해 처음으로 지혁과 부딪친 나달은 도무지 경기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아웃! 피프틴 러브.]
그 답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강철 멘탈을 가진 그도 이 상화에서 정신이 멀쩡하지 않은 모양이다.
경기가 자신의 마음대로 풀리지 않자 나달의 얼굴은 눈에 띄게 붉어지고 호흡도 자연스럽게 거칠어졌다.
숨 쉴 틈도 없이 조여 오는 압박감이 서서히 가중되면서 드디어 신체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3세트 경기를 하고 나서도 멀쩡하던 외계인급 체력을 가진 나달이 2세트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손을 가늘게 떠는 게 그 증거였다.
[게임 리.]
[게임 나달.]
[게임 리.]
5세트 경기를 하는 그랜드슬램이라면 그나마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있겠지만 지금처럼 마스터즈에서 한 번 삐끗하면 되돌릴 수 없었다.
심지어 세트 스코어조차 1-0 상황이어서 나달의 패배는 결국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한 게임만 더 내주면 마드리드 오픈의 트로피는 지혁에게로 넘어간다.
“하앗!!”
탕!!
차마 6-2로 패배하기는 싫었는지 승부가 이미 결정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나달.
그럼에도 지혁은 조금의 자비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모든 전력을 다해 찍어 누른 것이다.
타다다다다. 탕!!
손에 땀을 쥐는 랠리를 이어가던 도중 네트 앞에서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발리.
오른쪽 코트 끝 베이스라인에 서있던 나달은 네트 앞 반대쪽 사이드라인을 때리는 스트로크에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위너를 헌납했다.
아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방금 전에 지혁이 친 결정구는 나달이 아닌 어떤 선수가 오더라도 물리적으로 쫓아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놓칠 확률이 100%인데 굳이 체력 소모와 부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따라갈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제자리에서 가만히 있던 나달의 선택은 전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그렇게 지혁은 경기 초반과 중반보다 더욱 완벽해진 기술들과 빌드업으로 남은 경기를 완벽하게 제압해갔다.
어차피 한, 두 포인트만 더 얻으면 롤랑 가로스 본선이 시작할 때까지 휴식 시간이 넉넉하게 있으니 여기서 체력 소모를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찰나 몇 번 정도는 사용해도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다.
[러브 서티.]
[러브 포티.]
[세트 리.]
세 번의 슈퍼 플레이를 연달아 보여주며 마드리드 오픈 결승전을 마무리하는 지혁.
그 완벽한 승리에 경기장은 나달과 국적이 같은 스페인 팬들조차 기립박수를 보냈다.
경기의 결과를 떠나 진심으로 지혁의 실력에 감탄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테니스 역사상 최강이 될 게 분명한 선수에게 진 것이니 딱히 엄청나게 분한 것도 아니었다.
팬들의 전반적인 생각은 ‘질 만해서 졌다.’와 ‘상대가 골든 보이니까 어쩔 수 없다.’가 주류였다.
“후…. 이번 대회는 골든 보이의 완승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 오랜만에 잡힌 경기가 클레이 코트라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쉬워…….”
“그래도 얼마 뒤에 롤랑 가로스가 개최되니 그때는 라파가 오늘 당한 것을 그대로 복수해줄 거야. 라파 같은 베이스라이너는 단기전보다 장기전에서 훨씬 유리한 선수잖아. 그랜드슬램이 마스터즈보다 전략의 선택지도 훨씬 많아지고.”
“글쎄. 평소 같으면 당연히 그렇다고 말했겠는데 상대가 리인 터라 확신이 서지 않네. 왠지 그때가 돼도 쉽지 않을 것 같아. 솔직히 골든 보이가 지는 그림이 전혀 안 그려지거든. 너도 그렇지 않아?”
“…아니. 그곳의 주인은 라파인 만큼 반드시 작년처럼 롤랑을 우승할 거야.”
“그래. 정말로 네 말대로 됐으면 좋겠네.”
“…….”
나달의 열성적인 팬인 두 사람은 말을 그렇게 했지만 사실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오늘 경기를 보고 지혁의 패배를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대화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불편한 진실을 회피한 것이다.
과반수의 팬들이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려면 아직 멀었다.
아마 시즌이 한, 두 번 정도 지나면 지금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고 평범한 상식처럼 자리 잡겠지.
지혁이 대회에 나갈 때마다 우승을 하면 괜한 억지를 부리기도 힘들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