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전승행진
경기는 세트 스코어가 1-1이 된 시점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약속이라도 했듯이 지혁이 머레이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그림이 나온 것이다.
원래 그뿐만 아니라 다른 탑랭커들도 한 번 템포가 꼬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쿵!!
[포티 피프틴.]
서비스라인을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지혁의 플랫 서브를 보며 감탄과 탄식을 동시에 터트리는 관중들.
지금의 스코어가 될 때까지 비슷한 장면이 꽤나 반복되어서 그들은 이미 승부가 났다는 표정이었다.
머레이가 불리한 상황을 역절할 만한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랠리에서라도 우세하다면 약간의 희망을 가져볼 수 있었겠지만 거의 비슷비슷하게 유지되고 있었으니 그것도 힘들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버틴다고 하더라도 천천히 말라죽는 선택지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 오늘 경기는 힘들겠네. 잘하다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분명 이번 대회는 클레이 코트라서 리턴 난이도가 다른 대회에 비해 엄청 하락했을 텐데 말이야.”
“저걸 보고도 모르겠어?”
의문을 품는 팬의 말에 친구는 지혁의 서브가 막 바운드된 위치를 가리켰다.
T존을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공은 마치 의도적으로 조절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아무리 서브 원툴의 선수라고 해도 속도를 크게 낮추지 않는 이상 저렇게 미세한 조정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전신의 힘을 모두 사용해 라켓을 휘두르는데 정확도까지 가져가는 게 말처럼 쉽겠는가.
괜히 빅 서버들이 폴트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게 아니었다.
세컨드 서브에서 플랫이 아닌 탑스핀 서브를 사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고 말이다.
“확실히 오늘따라 서브가 날카롭긴 했지. 그런데 겨우 그것만으로 경기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다는 거야?”
“그래. 골든 보이의 에이스 횟수를 생각해봐. 갑자기 몇 배는 늘었잖아. 억지로 리턴을 한다고 해도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 제대로 된 랠리가 되지 않고 있어.”
“그런데 앤디도 서브를 잘하는 편에 속하지 않아? 탑랭커들 중에 거의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빅 서버잖아. 속도도 어디 가서 밀리는 편도 아니고.”
“골든 보이는 그 이상이라는 거지. 상위 랭커들 사이에서도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듣고 나서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머레이의 팬은 무언가 느낀 바가 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혁의 서비스게임이 끝날 때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경기를 지켜봤다.
[게임 리 4-2.]
그렇게 서비스게임이 두 번 지났을 때.
그는 드디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정말이네…. 서브가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낸 거였구나. 잠깐, 원래 골든 보이의 서브 실력이 이 정도로 대단했었나?”
결론이 나자마자 곧바로 의문을 품는 남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아니, 컨트롤이 눈에 띄게 늘었는 걸. 또 실력이 상승한 게 분명해.”
“하…. 어째서 같은 탑랭커들에게 괴물 취급을 받는지 알겠네. 저 녀석은 다른 선수들이 겪는 정체기도 없는 건가? 어떻게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실력이 늘고 있는 거야.”
“원래 천재에게 일반적인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는 법이지. 괜히 그에게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별명이 붙었겠어.”
“앞으로 테니스계는 저 녀석이 최소 10년 동안 지배하겠구만. 영국의 테니스 영웅인 앤디마저도 이 꼴인데 다른 유망주들이 그에게 제대로 대항할 수 있을 리 없지.”
이전에도 지혁은 팬들에게 차원이 다른 재능을 가진 선수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로 인해 잠재력을 한 단계 더 높게 평가받게 되었다.
그냥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는 독보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까지 이만한 성장세를 보여준 19살의 유망주는 한 번도 없었으니 이건 충분히 납득할만한 행동이었다.
지혁 같은 선수는 이대로 100년이 지나도 절대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세트 리.]
2세트보다 더 빠르게 끝나버리는 3세트.
벤치로 돌아가는 머레이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자신의 미래를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를 응원하는 팬들도 그런 분위기를 느낀 건지 환호성이 줄어들고 조용해졌다.
* * *
결국 롤랑 가로스 준결승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지혁의 압승으로 종료되었다.
머레이에겐 꽤나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런 결말이 나올 줄 몰랐는지 경기가 끝나고 멘탈이 부서진 표정으로 경기장을 나갔다.
그 당시 상태가 심각한 것처럼 보였으니 아마 당분간은 슬럼프를 겪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뭐, 어차피 지혁과 매치만 잡히지 않는다면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머레이 정도 되는 선수가 무력하게 패배하는 건 지혁이나 빅4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ATP 250, 500에서 우승을 몇 번 하다 보면 그냥 본인이 아니라 상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그렇게 준결승이 끝나고 다음 날, 지혁의 롤랑 마지막 상대가 정해졌다.
상대 선수는 3-2까지 가는 접전 끝에 조코비치를 꺾고 올라온 라파엘 나달.
최근 조코비치가 보여주고 있는 활약을 생각하면 이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랜드슬램과 마스터즈 결승의 라인업은 대부분 지혁과 그였으니 말이다.
상당수의 팬들은 내심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의 한 방을 먹었다.
[롤랑 가로스 마지막 상대는 작년 우승자인 라파엘 나달. 이지혁은 과연 호주 오픈부터 시작된 전승행진을 이어갈 수 있을까?]
[다음 경기만 이기면 US 오픈과 호주 오픈에 이어 그랜드슬램 3연패. 윔블던만 우승하면 논 캘린더 그랜드슬램이 바로 코앞에 있어 이번 경기의 결과가 유독 테니스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어.]
[전문가들, 이전 경기들과 선수들의 플레이를 분석한 결과 이지혁과 나달의 결승전을 4:6으로 예상해.]
[앤디 머레이를 침몰시킨 골든 보이의 서브는 과연 이번에도 통할까?]
─ 어제 머레이 털리는 거 본 사람?? 4강까지 무적의 포스로 올라온 선수인데 지혁이랑 붙으니까 평범한 선수로 전락해 버리더라 ㄷㄷㄷ
─ 애초에 급이 안 맞는 라인업이었음 ㅋㅋ 어딜 은근슬쩍 빅4 사이에 비비려고 빅5로 바꾸고 싶으면 최소 그랜드슬램 우승 3번은 더하고 오라고 해라.
─ ㅋㅋㅋ 경기 중반부터 멘탈 깨지기 시작하는 거 보이더라 아무래도 이지혁한테 벽 느낀 듯
─ 솔직히 나 같아도 저런 괴물을 만나면 기피증이 생기겠다. 다시 만날 때마다 더 강해지는 선수가 어디 있냐고 ;; 클레이에서 이 정도면 잔디 코트를 사용하는 윔블던에서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 거기는 바닥이 미끄러워서 바운드가 거의 누워버리잖아.
─ 아마 에이스가 두 배는 더 많이 나오겠지. 상위 쿼터에 배정되는 탑랭커들 다 뒤졌다 ㅋㅋㅋ
***
결승전 라인업이 정해지고 저녁.
지혁은 언제나처럼 코치들과 상대 선수의 분석을 마치고 휴식을 하고 있었다.
괜히 필요 이상으로 훈련을 한다면 거기에 대한 부작용으로 컨디션이 망가질 수도 있었기에 정해놓은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아무리 선수 분력을 잘하고 좋은 전략을 준비해도 경기력이 하락하면 말짱 도루묵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이지혁]
근력: 80▲ 민첩: 80▲ 체력:80▲ 신장: 188cm▲
서브(S), 포핸드(S), 백핸드(S), 풋워크(S), 외모(A), 트릭샷(A), 찰나(A+)
[포인트: 253,006]
“25만 포인트라. 하루 사이에 꽤 많이 모였네. 규모가 작은 마스터즈에서 우승한 수준이야.”
보상이 이렇게 크다니 역시 그랜드슬램의 파급력이 다른 대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괜히 탑랭커들이 우승할 가능성이 없음에도 라운드 하나를 더 높게 진출하는데 목숨을 거는 게 아니었다.
상금도 상금이지만 하루아침에 엄청난 인기를 얻을 수 있으니 투어 비용이 간당간당한 선수들이 부상의 위험까지 감수하는 거겠지.
제대로 된 스폰서를 하나만 잡으면 선수 생활을 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니까.
“드디어 신체 능력에 제한이 풀렸어. 게다가 새로 얻은 기술도 있고.”
하지만 제대로 시험을 해보지 않았으니 실전에서 바로 사용하긴 힘들었다.
나달이 만만한 선수도 아니고 검증되지도 않은 기술을 시험하다간 낭패를 볼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엔 가지고 있는 무기를 더욱 강화하는 게 어느 쪽으로 보나 맞았다.
“잘 됐어. 안 그래도 조코비치랑 나달과 경기를 하면서 피지컬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말이야.”
터미네이터나 외계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체력과 무식한 근육질 몸으로 휘두른 라켓에서 쏘아져 나오는 스트로크는 분명히 지혁의 샷보다 빠르고 강력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상대 전적을 더 높게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기술들과 높은 숙련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기술이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세계 랭킹 1위까지 절대 올라가지 못했겠지.
지혁은 이제 유일하게 밀리고 있던 피지컬조차 따라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반가웠다.
[체력이 1 상승하셨습니다.]
[포인트: 53,307]
“음…. 하나 올리는데 20만 포인트씩 드는구나.”
엄청난 양이지만 등급 하나 올리는데 400만씩 투자했던 지금의 지혁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만 했다.
주력 기술들을 모두 S등급으로 만들고 더 이상 눈에 띄는 성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이었다.
“피지컬까지 빅4와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가면 완벽한 넘버원이 되겠네.”
그때가 된다면 아무리 빅4라도 지혁에게 대항하기 힘들 것이다.
“그 시점이 빨리 오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일 경기를 이겨야겠어.”
우승과 준우승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 약간의 무리를 해서라도 트로피를 가져와야겠다.
게다가 지혁은 논 캘린더슬램이라는 타이틀을 의식하고 있어서 결승전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나달도 롤랑을 지배하다시피 한 선수인만큼 우승을 쉽게 내어주지 않을 게 확실했다.
하드 코트의 조코비치보다 더 까다로울 게 클레이의 나달이니까.
“그래도 시기가 딱 맞아서 할만해.”
서브의 등급이 막 상승한 상태에서 경기를 하게 됐으니 지혁은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비록 작년의 롤랑 가로스 결승전에서는 나달에게 패배하고 준우승으로 그쳤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렇게 어플의 포인트를 전부 사용하고 할 일을 모두 마치자 방안의 불이 꺼졌다.
수면 시간을 정확하게 지켜서 내일 경기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약간이라도 더 좋은 조건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이런 사소한 부분을 지키는 건 기본이었다.
무려 그랜드슬램 우승 트로피가 걸려있는데 어떻게 안일하게 행동하겠는가.
게다가 내일 경기는 롤랑의 나달인 만큼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는 건 다른 그랜드슬램보다 훨씬 어려울 게 뻔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