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전승행진
다음 날, 롤랑 가로스 결승 당일.
관중들은 선수들이 스타디움에 입장하고 경기를 준비하는 동안 이번 대회에서 누가 우승을 할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작년의 롤랑 가로스 우승자이자 전통적인 클레이의 강자인 나달과 최근 그랜드슬램 2연패를 하며 전승행진을 달리고 있는 지혁.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라인업이 짜인 터라 전문가들조차도 승부를 예측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시작하기 전부터 팬들의 대화 소리로 시끄러운 경기장.
관중들은 워낙 결승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흥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명경기가 나올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탕!!
그렇게 경기는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했다.
서브권을 먼저 가져간 건 나달이었다.
[피프틴 러브.]
[서티 피프틴.]
[게임 나달 1-0.]
와아아아아!!
관중들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훌륭한 경기력에 커다란 환호성을 터트렸다.
평범한 대회에서 보기 힘든 엄청난 수준의 랠리가 1세트 초반부터 나온 것이다.
“와…. 벌써 이 정도라고? 이러면 경기 중반이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솔직히 여기서 더 치열해지는 건 상상이 안 되는데.”
“나달이 괜히 클레이 코트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게 아니지. 그나저나 골든 보이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잘 버티네.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해서 그런가? 하긴 초반에 나달의 카피캣이란 소리가 꽤 나오긴 했지.”
“카피캣?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건 리가 데뷔하자마자 순식간에 빅4의 랭킹을 추월해서 금세 사라진 말이었잖아. 그건 어설픈 유망주 시절일 때나 통하는 소리지.”
보통 어떤 선수의 열화판이라고 별명이 지어지는 건 기량의 격차가 제법 나는 상황에서야 성립된다.
데뷔 2년 차에 그랜드슬램을 찢으며 세계 랭킹 1위로 자리 잡은 천재에겐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라는 뜻이다.
기존 테니스 역사에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행보를 걷고 있는 선수가 왜 누군가의 마이너 버전으로 불리겠는가.
곧바로 선수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된 고유의 별명이 붙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두 선수의 느낌이 비슷하다는 말이지. 실제로 똑같은 리버스 포핸드를 사용하고 있잖아? 골든 보이의 코트 커버력도 베이스라이너 못지않고 말이야.”
“음…. 확실히 그렇긴 하지. 그래도 요즘은 많이 달라졌어. 저렇게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선수를 수비형 선수라고 할 수 있겠어?”
그 말대로 지혁이 특별한 기술들을 얻기 전에나 베이스라이너 느낌이 났지 지금은 페더러 이상의 완벽한 올라운더였다.
현재의 지혁은 네트 플레이랑 발리, 슈퍼 플레이, 빅 서버 스타일을 전부 사용하는 선수였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제 서비스게임이 넘어갔는데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 과연 나달도 머레이처럼 될까?”
“설마. 롤랑에서 라파가 그럴 리 있겠어. 이틀 전처럼 허무하게 에이스를 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네. 결승전까지 왔는데 경기가 싱거우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두 번째 서비스게임은 팬들의 궁금증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이번 경기에서 가장 관건은 환골탈태한 지혁의 서브 실력을 나달이 얼마나 잘 대처 하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대회의 코트가 클레이라는 것이다.
다른 무대였다면 아무리 빅4라고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테니 말이다.
쾅!!!
지혁의 서브는 평범한 서브를 가진 나달과 임팩트 소리부터 차원이 달랐다.
라켓에서 쏘아진 타구는 무시무시한 타격음이 관중석에 전해지자마자 T존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플랫 서브의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라서 궤적을 놓치는 사람이 많이 나온 것 같았다.
아마 코스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긴 터라 더 예상하기 힘들었을 거다.
정상급 선수인 나달마저도 라켓을 허공에 헛스윙하며 에이스를 허용했으니.
부웅!
[피프틴 러브.]
“속도가 더 빨라진 거 아니야? 예전에 봤을 때보다 서브가 더 강력해진 것 같은데.”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 비시즌기에 피지컬 훈련을 해서 그런가?”
“아직 성장할 시기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 그게 아니라면 자세를 보완한 걸 수도 있고.”
“이미 빅4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는 상황에서 개선할 게 있나. 저 경지에서 그게 말처럼 쉬울 것 같지가 않은데.”
“그러니까 그가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천재인 거지. 이때까지 정체기를 한 번도 겪지 않고 끝도 없이 발전하고 있으니까.”
[포티 러브.]
서비스게임은 마치 이틀 전의 머레이와 했던 경기가 떠오를 정도로 비슷하게 흘러갔다.
모든 포인트가 에이스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리턴을 하느라 밸런스가 심각하게 무너져 랠리에서 한, 두 발자국 밀린 상태로 시작한다던가 어쩔 수 없이 한 가지 코스를 강요받는 등 불리한 상황에 처하는 일이 반복된 것이다.
관중들은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단순히 ‘서브의 속도가 빨라졌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탑랭커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과 지혁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속도 때문에 이런 구도가 나오는 거라고?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야. 더 빠른 속도를 뽑아내는 빅 서버들도 나달을 상대로 저렇게 에이스를 못 넣어. 만약 테니스가 속도만으로 결정된다면 진작에 빅 서버가 메이저 대회들을 점령했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베이스라이너들이 상위 랭킹을 전부 차지하고 있잖아?”
“그래. 정말 기가 막힌 코스 선택이구만. 나달의 예상을 족족 벗어나고 있어. 어디로 떨어질지 미리 예상을 하지 못하니 풋워크가 밀리는 느낌이 드는 거지.”
지혁의 천부적인 센스에 홀렸는지 감탄을 쏟아내는 전문가들.
그들은 구경만 하고 있는 입장인데도 엄청난 속도와 상상도 못 할 위치로 바운드되는 서브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들이 현역이라고 해도 나달 대신 저 자리에 있었다면 무력하게 에이스를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 실력이라면 골든 보이의 서브를 탑랭커들 중에 최고로 뽑아도 되겠는데. 나는 당장 저만한 실력을 보여주는 선수가 떠오르지 않아. 음…. 그나마 전성기의 페더러라면 비슷한 수준일지도 모르겠네. 구속을 거의 230km까지 찍을 때의 그는 무적이었으니 말이야.”
“세계 랭킹 1위를 237주 연속으로 유지하던 시절을 말하는 거군.”
“맞아. 그때의 로저는 같은 탑랭커들 사이에서 무적이었으니까. 괜히 테니스 팬들에게 그가 종교 수준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게 아니지. 요즘처럼 랭킹이 5위까지 떨어지고도 인기가 굳건하잖아. 드라마틱한 데뷔로 테니스계에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골든 보이조차 아직 그에게 견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
말이 237주지 일로 따지면 1659일, 년으로 따지면 거의 5년에 달하는 시간이었다.
연수입 1000억이 그냥 공짜로 떨어진 게 아닌 것이다.
탕!!
그렇게 1세트가 중반쯤 되었을 때.
나달은 드디어 지혁의 서브에 익숙해졌는지 안정적인 리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번 대회가 클레이였던 만큼 서브 하나만으로 승부를 내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가 머레이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이기도 했고.
‘쉽게 우승할 거라고 생각도 안 했어.’
어차피 이대로 체력만 비슷하게 유지하면 결정력이 더 높은 지혁에게 유리했다.
위험한 모험을 하지 않고도 평소의 페이스만 유지해도 아마 절반 이상의 승률을 유지할 수 있겠지.
지혁은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여러 비장의 무기들이 남아있는 만큼 이 상황에서 질래야 질 수가 없다.
US 오픈, 호주 오픈, 롤랑 가로스, 그랜드슬램 3연패가 이제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게임 리 4-4.]
‘이제 슬슬 승부수를 던져볼까.’
실패해도 듀스랑 타이브레이크가 남아있으니 부담은 전혀 없다.
만약 여기서 지더라도 보험은 얼마든지 마련되어 있지만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서브 나달.]
탕!!
수비를 하기 유리한 위치에서 공격적인 포지션으로 변해서일까.
경기의 분위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180도 달라졌다.
탕!! 탕!! 탕!! 탕!!
랠리의 템포가 미친 듯이 올라가면서 관중들 의 숨통을 꽉 쥔 것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네트를 기준으로 고개가 똑같이 좌우로 움직이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다.
쿵!!
왼쪽 사이드라인에 백핸드 다운 더 라인을 꽂아 넣는 지혁.
나달을 방금 전에 친 어프로치샷으로 오른쪽 코트 밖으로 밀어낸 뒤라 관중들은 이번에야말로 위닝샷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촤아아아악- 탕!!
하지만 클레이 코트에서 나달의 코트 커버력은 상식의 범주를 이미 뛰어넘었다.
코트 전체를 가로지르며 다운 더 라인을 기어이 걷어낸 것이다.
그 아슬아슬한 장면이 몇 번 반복되자 사람들은 표정이 완전히 질려버렸다.
[게임 나달 5-4.]
기습적으로 나온 브레이크 시도는 결국 나달의 수비에 막혀 철저하게 실패했다.
이쯤 되니 지혁의 팬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페더러하고 메이저 대회를 쪼개 먹던 선수는 다르구나. 겨우 1년 반짝한 머레이처럼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오히려 잘 됐어. 이러면 경기가 예상보다 더 길어진다는 거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5세트까지 가면 좋겠네.”
“…5세트나? 그럼 롤랑을 우승하는 선수가 나달이 되지 않을까? 5시간이 넘는 초장기전이 됐을 때 리가 이길 것 같지가 않은데.”
“누가 이기든 무슨 상관이야. 재밌기만 하면 되지.”
그들은 무책임한 말을 내뱉으며 가능하면 경기가 장기전이 되길 바랬다.
오늘 같은 경기는 돈을 주고도 못 보는 만큼 주변은 은근히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매 포인트마다 전신에 짜릿한 전율이 흐르는 슈퍼 매치를 어딜 가서 보겠는가.
[세트 리.]
“휴…….”
타이브레이크까지 가진 접전 끝에 간신히 1세트를 가져온 지혁.
그는 한 끗 차이로 승리를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달의 저항이 너무 극렬해서 마지막에 엄청난 출혈이 있었다.
그나마 이겨서 다행이지 만약 패배했다면 체력 배분이 고이면서 대참사가 났을 것이다.
‘여기서 흐름을 끊어놔서 다행이야. 진짜 큰 일 날 뻔했네.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선수란 말이야.’
나달은 경기의 분위기를 탄 건지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발휘하며 평소 이상의 실력을 보여줬다.
실력이 거의 대등한 상황에서 한쪽의 체력이 무한이다?
장기전에 들어갔을 때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괜히 경기가 길어져봐야 나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어. 약간의 여지도 주지 말고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자.’
서브의 등급이 상승해서 호주 오픈보다 쉽게 우승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건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롤랑의 나달은 지혁이 만난 어떤 선수보다 까다로웠다.
‘세트를 하나라도 내주면 쉽지 않겠어….’
지혁은 벌써 경기 후반이 됐을 때가 두려웠다.
나달의 진정한 가치가 나타나는 건 지금 같은 극초반이 아니라 정신력 싸움으로 들어가는 경기의 막바지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