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233화 (233/241)

233화. 전승행진

지혁은 타이브레이크에 들어가느냐, 마느냐하는 중요한 갈림길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격을 당하자 느슨해졌던 정신무장을 다시 재정비했다.

잘못하다간 2세트에서 저지른 과오를 다시 되풀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스트로크 실력이 급상승한 걸 보면 분위기를 탔나 보네….’

관중들은 눈이 번쩍 떠지는 슈퍼 플레이가 나오자 깜짝 놀랐는지 웅성거렸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는 탑랭커들과 지혁은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아주 가끔이지만 대회의 중요도가 엄청나게 높거나 컨디션이 극도로 좋을 때 집중력이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이 올 때가 있었다.

경기에 완전히 몰입을 해 본래의 능력 이상을 발휘하는 것이다.

테니스 팬들은 그런 날을 ‘긁히는 날’이라고 불렀다.

‘시간이 너무 많이 준 탓이겠지. 이 장소가 나달의 무대인 것도 한몫했겠고.’

나달은 지혁이 아닌 다른 빅4와 했던 매치에서도 초반보다 후반으로 갈수록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탑랭커들 중에서 그와 대등하게 겨룰만한 선수가 거의 없어서 그렇지 보통 그의 진면목은 극한의 상황에 도달해야 진가를 발휘했다.

‘이건 전형적인 나달의 승리 스토리인데….’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는 데자뷰에 불안한 느낌을 받은 건지 이를 악무는 지혁.

그는 안 그래도 컸던 경계심을 더욱 높였다.

밑이나 대등한 상대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강한 선수와 경기를 한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한 것이다.

탕!!

지혁의 달라진 마음가짐은 이후의 경기에서 곧바로 드러났다.

베이스라인에서 안정적으로 랠리를 이어가는 플레이를 전부 집어치우고 공격적으로 나오자 경기장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나달의 움직임도 한층 바빠졌다.

탕!! 탕!! 탕!! 탕!!

“허억…. 허억….”

선수들은 이전만 해도 메트로놈처럼 코트 좌우를 반복하다가 전후좌우 방향으로 급제동, 급출발을 하게 되니 숨이 금방 거칠어졌다.

원래 천천히 오래 달리는 것보다 전력질주를 하는 게 체력을 훨씬 더 많이 소모하는 법이었다.

언제 위닝샷이 나올지 몰라서 살벌한 긴장감이 흐르는 중이기도 했고.

촤아아아악- 퉁!

흙바닥을 미끄러지면서 아슬아슬하게 스트로크를 라켓에 맞추는데 성공하는 나달.

코트 밖으로 밀어내는 지혁의 어프로치 샷에 제대로 당해서 정반대 편에 있었던 그는 엄청난 주파력을 보여주며 포핸드 위너를 끊어냈다.

‘발리를 치는 건…… 어렵겠네. 높이가 너무 높아.’

저 긴박한 순간에서도 네트로 달려오는 상황을 고려해서 로브처럼 높은 공을 쳤다.

지혁은 허공에서 흔들거리며 베이스라인 근처에 떨어지는 공을 가만히 선 채로 기다리며 아웃이 되기만을 기도했다.

이번에 나달이 친 스트로크의 정확도가 엄청나게 떨어지는 만큼 잘하면 라인 밖으로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스윙을 한 게 아니라 단순히 라켓 면에 부딪친 거라 딱히 컨트롤이랄 것도 없었다.

통!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치는 공.

아쉽게도 행운의 여신은 나달의 손을 들어주었다.

스트로크가 1cm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라인을 걸친 것이다.

긴장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체어 엠파이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을 지었다.

선수들의 팬층이 나뉘어 있는 터라 지금 같은 반응이 나온 것이다.

나달도 스타성으로 어딜 가서 밀리는 선수가 아니라 그를 응원하는 관중의 비율이 지혁 못지않았다.

애초에 롤랑 가로스가 유럽에서 열리는 만큼 이곳이 그의 본진이었고 말이다.

‘쯧. 이럴 줄 알았으면 바운드되기 전에 칠 걸 그랬나. 그러면 경기의 주도권을 계속 가져갈 수 있었을 텐데.’

지혁은 반대편 코트에서 완전히 밸런스를 회복한 나달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공이 워낙 천천히 날아온 만큼 지혁의 공격 세례에 몰려있던 걸음이 전부 초기화되어버렸다.

저기까지 몰아붙이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 과정을 다시 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확실히 나달이 긁히는 날이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지금 그가 보여주는 코트 커버력과 경기 센스는 작년에 롤랑 가로스를 우승했을 때 이상이었다.

‘후….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뭐하겠어.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자.’

또다시 회심의 수가 막혔지만 이대로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는지 보자. 언제까지 행운이 따라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지혁은 흔들리는 멘탈을 재정비하며 원점에서 다시 빌드업을 조금씩 쌓아갔다.

스트로크 한 번으로 단번에 마무리하고 싶어도 지금 나달을 상대로 그렇게 하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

쿵!!

[포티 올. 듀스.]

아…….

지혁이 끝내 동점을 만들어내며 듀스까지 추격하게 되지 안타까운지 탄식을 흘리는 관중들.

아직 서비스게임 하나도 완벽하게 끝나지 않았는데도 선수들의 옷은 땀과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대회가 클레이 코트를 사용하다 보니 잔디와 하드 코트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후…. 진짜 잘 버티네. 소름 끼칠 정도로 수비가 단단해.’

지혁은 네 번의 위닝샷 중 세 번을 입이 떡 벌어지는 슈퍼 플레이로 넣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게임이 여전히 동점인 것은 그만큼 나달이 초인적인 실력을 보여줬다는 뜻이었다.

찰나를 사용한 지혁과 대등한 대결을 벌인다는 건 평소의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니.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도 힘들구만. 3세트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확신하기 힘들어. 유일한 대책은 더 많은 대가를 치르는 것밖에 없겠지.’

3세트를 시작할 때 예상했던 출혈은 1세트의 수준을 초과한 지 이미 오래였다.

일단 매몰 비용이 이 정도로 쌓인 이상 3세트를 적당히 포기하는 건 불가능했다.

여기서 패배한다면 지혁과 나달 중에 누가 됐든 경기의 승률이 30% 아래로 급격하게 떨어질 것이다.

미래에 사용할 체력까지 끌어다가 투자했는데 그걸 전부 날려버린다면 솔직히 무슨 방법으로 남은 경기를 뒤집겠는가.

절망적인 상황에 의욕을 잃고 무력하게 패배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탕!!

지혁이 생각을 정리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

긴 루틴을 마친 나달이 드디어 서브를 쳤다.

여러모로 암울한 조건 속에서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 되는 것은 에이스를 당할 걱정이 없다는 거다.

아무리 빨라 봐야 190km, 200km밖에 되지 않는 나달의 서브는 준결승에서 만난 머레이가 치던 서브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랠리가 그 이상으로 지옥이었지만….

타다다다다! 탕!!

경기의 주도권이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라 그럴까.

선수들의 플레이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고지가 바로 눈앞이다 보니 그 나달마저도 공격적인 샷의 빈도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고작해야 위닝샷 두 번, 타구가 네트 상단에 부딪쳐서 넘어가거나 라인을 살짝 걸치는 약간의 운만 따라주면 그랜드슬램 트로피가 넘어온다.

그러니 부동심을 가진 선수라도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어드벤티지 나달.]

와아아아아!!

하늘이 나달의 간절한 바람을 들었는지 스트로크는 정말로 네트에 맞고 반대편 코트로 넘어왔다.

지혁은 그런 상황을 전혀 머릿속에 넣고 있지 않았기에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타구의 방향을 계산하면 바운드 지점이 분명 베이스라인 근처였기에 쫓아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공의 면을 깎는 슬라이스처럼 속도가 느렸으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어서 그 상황에서 랠리를 계속 이어갈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지혁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위치를 바꾸었다.

잠시 후, 움직임이 멈춘 곳의 위치는 베이스라인의 몇 발자국 앞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몇 배는 더 위험한 플레이를 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지혁은 그저 감정에 휩쓸린 게 아니라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마지막 세트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3세트를 가져오자.’

그 과정에서 막대한 대가를 지불할 게 뻔했지만 육참골단의 마음으로 감내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고통스러우면 상대도 그에 못지않게 괴로울 테니 말이다.

그동안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어온 터라 인내심을 가지고 싸우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어드벤티지 리.]

한 번 고삐가 풀리자 지혁의 플레이는 믿을 수 없는 위력을 보였다.

컨디션이 최상인 나달을 정말 무식하게 어거지로 찍어 누른 것이다.

모든 샷에서 찰나가 동원되고 있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위너 한 번에 세트 하나를 전부 태우는 격이었으니.

그 사정을 모르는 관중들은 생전 처음 보는 경기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들이 느끼기엔 지금의 지혁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무적의 선수였다.

[세트 리.]

그렇게 길고 길었던 3세트가 종료되었다.

끝내 원하는 결과를 얻고 웃게 된 것은 지혁이었다.

나달은 다 이긴 경기에서 역전을 당하자 멘탈이 약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

복잡한 분위기 속에서 휴식 시간이 흐르고, 다음 세트를 시작하는 경기.

나달은 어떻게 해서든 세트 스코어를 원점으로 만들어서 경기를 뒤집어보려고 노력했지만 한 번 꺾인 기세를 끝까지 되돌리지 못했다.

4세트에서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더니 듀스까지 가지도 못하고 지혁에게 롤랑 가로스의 우승 트로피를 헌납한 것이다.

세트 스코어 3-1.

경기를 직접 보지 않고 단순히 숫자만 본다면 지혁의 압승으로 보이는 경기였다.

실제로는 엄청난 고생과 외줄 타기를 하며 아슬아슬하게 이긴 건데 말이다.

우와아아아아!!!!

작년 US 오픈에 이어 롤랑 가로스까지 그랜드슬램 3연패를 달성하자 경기장은 팬들의 환호성으로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수많은 대회에서 코트를 가리지 않고 연승을 이어가고 있고 최근 세계 랭킹 1위도 되찾았으니 현재 테니스계의 최강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지혁이었다.

“아니, 경기 내용이 너무 충격적인데…. 내가 생각하던 그림이랑 전혀 달라. 설마 롤랑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될 줄이야.”

“아무리 나달이 클레이 코트에서 오늘처럼 참패할 줄은 몰랐을 거야. 초반은 비슷비슷했지만 마지막에는 완벽하게 압도했어. 그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이러면 논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겠네. 잔디 코트의 특성상 골든 보이에게 윔블던은 롤랑보다 훨씬 난이도가 낮잖아.”

“그건 당연한 거고. 나는 윔블던보다 US 오픈을 우승할지가 궁금하네. 그것만 달성하면 로드 레이버 이후로 오픈 테니스에서 캘린더 그랜드슬램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거니까.”

“허…. 40년 만에 기록이 깨어지는 건가.”

이제 테니스 팬들의 관심은 지혁이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집중되었다.

그랜드슬램 하나, 둘 정도 우승하는 건 그에게 이상할 게 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활약을 2년 이상 지속할 수 있다면 누구도 지혁이 최강의 선수라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요즘 추세를 보면 그 시점이 오는 것도 그리 멀지 않았다.

조코비치와 나달조차 브레이크를 잡아주지 못하고 있는데 누가 지혁을 막을 수 있겠는가.

경쟁자가 될 만한 선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이제 걸림돌은 오로지 시간뿐이었다.

1